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13화 (113/164)

< 창고 - [3] >

보어조아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 음유시인 놈 안 죽였나? 아니, 옥에 가둬두지도 않았나?”

“물론 당시에 가뒀지마는 신분이 확실한 것치고 처벌 근거가 미약했는지라. 함부로 처벌할 수 없었소이다. 그래서 신들을 모욕한 대가로 참회기도 좀 시키고 석방했지. 어쩔 수 없었소. 그런데 그가 혼자 세계수에 들어갔다고? 이 무슨······”

“이상한 일이지! 수상한 일이고!”

보어조아는 버럭 고함지르며 생각했다. 그놈의 음유시인이 범인인가?

충분히 그럴 만했다. 훔칠 동기도 충분할뿐더러 수상하기 짝이 없는 놈이니까.

보어조아가 황금사과의 존재를 떠벌리던 그 자리에 음유시인도 있었다. 비록 끌려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나마 엿들었을지 모른다.

그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요소에도 불구하고 놈이 범인임을 확신할 수 없었지마는.

‘하지만 놈에게 금고를 태울 능력은?’

얼핏 불가능해보였다. 저택에는 어찌 숨어들 수 있다 해도 그놈이 어찌 금고를 녹여버릴 수 있단 말인가? 롤랑과 그 패거리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평범한 남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롤랑도, 음유시인도 충분히 수상했다. 그렇다면 보어조아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양쪽 다 잡아내는 것.

보어조아는 비카파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백작, 당신의 명성 자자한 용병 부대를 빌려주시오. 지금 바로 도둑을 쫓아 세계수에 올라야겠으니.”

비카파는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빌려드릴 수야 있소. 그러나 음유시인을 잡으려는 거겠지? 그 용병들에게 롤랑과 그 기사들에게 쇠뇌라도 겨누라 명령하지는 않으시겠지?”

“필요하다면······”

보어조아의 애매한 대답에 비카파는 딱 잘라 말했다.

“절대 안 되오. 그들과 충돌하는 데 용병들을 동원하겠다면 절대 빌려드릴 수 없소.”

가뜩이나 요새는 성전의 부흥을 위해 롤랑의 명성을 팔아먹는 처지였다. 게다가 메디아와 관계도 회복해야 할 판에 그들과 척질 수 없는 것이다.

이쪽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는지 보어조아도 어쩔 수 없이 말햇다.

“그렇다면 그러지 않으리다.”

“맹세할 수 있소?”

“물론, 궁니르에 걸고.”

“약조하신다면야······ 당장 용병들을 불러모으지.”

그리 말하면서도 비카파는 불안했다.

평소에도 궁니르 타령을 믿지 않았던 그가, 이미 그 맹세를 모두의 앞에서 깨버린 보어조아를 믿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비카파는 출정하게 된 용병 지휘관들에게 따로 분부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롤랑과 그 무리에게 그 어떤 적대행위도 하지 마라. 공격은 물론 값싼 도발도 안 된다. 보어조아의 무리가 롤랑의 무리를 압박하려 할 경우, 너희는 함께 있지 말고 바로 돌아와야 해. 보어조아를 편들어 이쪽에서 뭔가 해코지하려 했다는 인상을 조금도 주어서는 안 돼. 알겠나?”

용병들도 자기네 대장의 말에 수긍했다. 그들로서도 그 강력하신 영웅들과 창칼을 부딪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된 수색대가 세계수에 발을 디뎠다.

*******

이제 오십 층까지 오르는 것은 승강기 없이도 한결 쉬운 일이 되었다.

롤랑의 성검은 세계수를 태울 수 있다. 그러니까 롤랑의 무리는 장애물을 만나면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곧장 뚫고서 지나갈 수 있었다.

외벽 아닌 내벽은 뚫더라도 복구되는 속도가 빨랐다. 그 탓에 영구적인 길을 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행군 속도를 두 배로 끌어올리기는 충분했다.

그러기 위해 롤랑이 조금 고생해야 했지마는.

벽이 가로막을 때마다 롤랑은 성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는, 벽에다 성검을 휘두르기를 반복했다.

성검의 빛마저 물릴 만큼 지겨운 작업이었지만 롤랑이 그 일을 할 때마다 청소부들의 환호성이 일었다.

“롤랑, 롤랑, 롤랑!”

그 와중에도 롤랑은 묵묵히 칼질을 반복한 끝에 길을 터냈다.

일을 마친 뒤에야 다시금 무리에게 손짓했다.

“갑시다.”

그 모습을 보며 모지는 새삼 느꼈다. 역시 롤랑답지 않다고.

원래 롤랑이라면 몸소 일하는 것을 달갑잖게 여겼을 것이며, 오딘께서 내려주신 성검을 저런 식으로 쓰는 것을 불경하게 여겼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는 오십 층에 이르렀다. 승강기가 위치하는 세계수 원정의 중간거점.

알론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역시 사람이 확 줄었는데요. 야영지도 텅 비었고, 박제상들도 거의 다 사라졌군요.”

덕분에 덜 난잡했지만 생기가 없었다.

롤랑과 그 무리는 빈자리가 남아돌게 된 야영지에서 잠시 쉬다가 계속 걸었다.

그 속도는 역시나 터무니없이 빠른 것이었다. 때문에 육십 층 너머에 이르러서야 추격대가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흑기사 소환물이 경고했다.

“누가 온다.”

쿵쾅거리는 소리. 롤랑과 그 무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흑요석 갑옷을 입은 기사와 그 뒤를 따르는 병력이 보였다.

보어조아의 염동력자들. 그들은 빠르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고는 고함질렀다.

“멈추십시오!”

제이슨이 뭔가 욕설을 지껄이기 전에 롤랑이 얼른 나서야 했다.

“뭔가, 앞을 가로막고. 이 무슨 무례지?”

염동력자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예를 신경 쓸 수 없을 만치 급한 일입니다! 혹시 이곳을 홀로 지나가는 누군가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홀로 지나가는 누군가? 무슨 소린가?”

“도둑입니다! 위로 도망쳤다니 붙잡아야 합니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롤랑이 보기에 말 같지 않은 소리였다.

세계수는 도피처로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칠십사 층까지는 그럭저럭 개척이 되었으나 괴물은 절멸하지 않았다. 세계수는 언제나 괴물들이 잔존하여 호시탐탐 사냥감을 노렸다. 예전에 나무늑대들이 그러했듯이.

당장에도 제법 괴물들이 보이는 마당이었다. 홀로 다니다가는 금세 언덕 위에서 날아온 날개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더 위층에서나 볼 수 있던 도마뱀들까지 보이는 마당이고.’

지금 저기에도 슬쩍 지나가는 거대도마뱀이 보였다.

군대가 활동을 중단한 지금 거대도마뱀들은 슬금슬금 영역을 넓히더니 아래층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잡식성일까, 사냥감이 없는 환경에서도 놈들은 번식하고 번성했다.

롤랑이라면 저들 사이를 홀로 걷더라도 패배하여 잡아먹히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한들 오래 그러기는 불가능할 터였다. 자는 도중에 저놈의 도마뱀이 독니를 뻗어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마당에 롤랑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혼자 걷기는 아예 불가능할 터였다. 그것은 그저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그 점을 들어 롤랑이 말했다.

“보지 못했소. 사실 굳이 추격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이미 잡아먹혔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잖은가?”

염동력자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격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절대요.”

“뭘 도둑맞았기에?”

“황금사과입니다.”

롤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쪽에서도 돕길 바라나?”

“그래주신다면 정말이지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염동력자는 그리 말했는데,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지금 염동력자들을 비롯한 소수정예만이 승강기를 통해 위로 올라온 마당이었다. 보어조아와 그가 이끄는 본대는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합류할 동안 염동력자들은 롤랑의 무리에 붙어있어야 했다.

롤랑이 물었다.

“그럼 도와주지. 수색할 계획이 있나?”

“당장으로서는 급히 달려왔을 뿐이라······”

“백 층 위로 올라갔을 가능성은? 백 층 승강기가 있지 않나. 오십 층에 연결된.”

“승강기를 조작하는 조합원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사용한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걸어 올라간 것이겠지요. 아무튼 괜찮으시다면 바로 수색에 착수하고 싶습니다. 의논할 시간조차 없으니.”

롤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 무리에게 돌아왔다.

제이슨이 바로 욕설을 지껄여왔다.

“저 새끼 돌았나?”

“또 뭐가.”

“길을 가로막더니 뭔 시간이 없소 타령이야? 자기네 시간은 아까워도 이쪽 시간은 축내도 괜찮다 이건가? 보어조아 그 새끼가 돌아버리더니 그 부하 새끼들도 죄 미쳤나?”

“상황이 그러하니, 이해해라. 제이슨.”

그리 말하면서도 롤랑은 착잡했다.

역시 보어조아는 황금사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저번에 황금사과가 경매에 올라온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사겠노라 공언했는데, 그렇다면 황금사과를 되찾고는 구입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 황금사과를 얻은 이후로는? 모르가나는 그 사과를 오스론에게 주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의 본의를 롤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황금사과를 오스론 개인에게 주지 말라는 뜻이었나? 그렇다면 사과를 구하더라도 단순히 오스론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메디아에 보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 말이 오스론으로 대표되는 메디아 궁성에 사과를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면? 유저들이 걱정하던 그 일, 용도가 다한 일꾼들은 쫓겨나는 그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만약 후자라면 롤랑과 유저들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황금사과를 구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어쩌면 황금사과의 습득이 눈앞에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롤랑과 그 무리가 도둑맞은 사과를 회수해준다면 잔뜩 겁먹은 보어조아는 되찾아준 답례를 겸해 롤랑에게 얼른 팔아치우려 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리 황금사과를 얻고 나서 모른 척 발뺌할 수는 없겠지. 오스론에게든 메디아에든 주어야 할 텐데······’

그리하여 롤랑은 생각했다.

황금사과는 적당히 수색하는 척만 해야겠다고.

롤랑은 사냥을 위해 데려온 청소부들의 대표에게 제안했다.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사냥할 상황이 아니로군. 돌아가 주겠소?”

“어쩔 수 없지요. 먼저 돌아가 귀 영웅들의 성공을 응원하겠습니다.”

헛걸음한 셈이지만 싫은 기색조차 내보일 수 없었다. 청소부들은 감히 그럴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그렇기에 다음 롤랑의 제안은 정말이지 반가운 것이었다.

“미안하오. 약소하게나마 하루치 일당을 드리지. 돌아가실 때 여러분끼리 가야할 테니 위험수당도 쳐서. 먼저 돌아가 계시면 나중에 찾아뵈어······”

청소부 대표는 연신 굽실거렸고 롤랑은 종이를 꺼내 뭔 증서를 써주기 시작했다.

“지금 그럴 시간이······”

지켜보던 염동력자가 불평을 터뜨렸지만 반쯤 흘려 넘기고서. 롤랑은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중요한 일이오.”

“황금사과보다 말입니까?”

“이들에게는 그렇겠지.”

기어이 증서를 다 써주고서야 롤랑은 청소부들을 돌려보내더니 수색에 나섰다. 롤랑은 기사들에게 외쳤다.

“갑시다, 도둑을 찾으러!”

롤랑의 임무를 알고 있던 기사들이 합창했다.

“오스마 여왕을 위하여!”

그러고는 바로 수색을 시작했다.

제이슨은 발키리를 불러내 정찰을 지시했다. 누군가 보인다면 보고하라고.

그 와중에 모지가 중얼거렸다.

“역시 롤랑답지 않군.”

“뭐가? 저놈 일처리 꼼꼼한 거야 알아주는데.”

“원래 롤랑은 그렇지 않았다. 롤랑은 그리 배려심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어.”

무슨 말을 하는지 제이슨도 알아들었다. 저것은 옛 영웅으로서의 평가일 것이다.

입술을 삐죽이며 물어보았다.

“그럼 나는? 나답게 굴고 있나?”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모른다, 이아손이 본디 어찌 처신했는지 내 알게 뭔가? 지금 얼마나 천방지축으로 굴든 원래도 그랬으려니 여길 뿐이지.”

그리 말하더니 모지는 다시 전방에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제이슨, 그러니까 악명이 자자한 이아손 따위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제이슨은 행군 도중에도 일순 온몸이 굳었다. 그제야 모지가 왜 변한 이후 자신을 이토록 대하는지 알았기에.

제이슨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이아손임을 말하지 않았다. 메데이아의 후손들이 나라를 세운 세계에서 그 정체를 밝힌들 좋은 일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모지는 그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경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아손의 이름을 듣는다면 다른 이들조차 그러하리라.

제이슨은 화낼 기력조차 사라졌다. 불합리한 대우에 분노하기는커녕 눈물을 글썽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할 판이었다.

결국 제이슨도, 모지도 입 다물고 걸어 나갔다.

그 옆에서 염동력자들이 따라 걷고 있었다. 속으로 불만을 터뜨리며.

‘날품팔이들을 챙겨주겠다고 시간을 잡아먹다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당장에는 울분을 억누르고 걷던 와중이었다.

어두운 숲속, 야수의 안광이 번뜩이더니 야수가 덮쳐왔다. 염동력자가 자기 힘을 발휘할 틈도 없는 사이에.

수풀에서 나타난 괴물은 코끼리 만한 코뿔소였다.

그 거대한 괴물은 순식간에 돌격해왔다. 그 괴물과 염동력자들의 거리는 곧바로 지척이 되었다.

그 거대한 괴물의 돌격 앞에서 두터운 갑옷은 소용없을 터였다. 피하거나 막아내야 했지만, 그 육중한 돌진 앞에서 염동력자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눈 감을 틈조차 없었기에.

죽는구나 하고 느낀 그 순간, 그 앞에 웬 두 명이 나타났다.

모지와 그 손을 붙잡은 롤랑이었다. 단거리 순간이동.

< 창고 - [3]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