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고 - [2] >
갑자기 어깨에서 느껴지던 감촉이 사라졌다. 까마귀가 날아오른 것이다.
롤랑은 다급히 속삭였다.
“잠깐, 더 자세히 좀 말해주시오. 그게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이긴, 말 그대로인데.’
“왜 그자에게 주면 안 된다는 거지?”
‘말 못 한다니까.’
롤랑은 전에 구원 받은 일도 잊고서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이런 예언자적 캐릭터들은 왜 조언을 해주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빼놓는 것인가? 만화에서든 소설에서든 저런 한 문장짜리 조언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롤랑은 간절하게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제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롤랑이 애타는 가운데, 다행히 잠시 후 깍깍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는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말해두지. 이건 조언이자 부탁이야. 그리고 당신은 내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있지 않아? 당신 내게 빚이 있지?’
“그렇소.”
‘그렇다면 잠자코 따라줘. 그런다고 피해 보진 않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모르가나는 사라졌다. 롤랑은 계속 무리를 이끌고 걸으며 생각했다.
대체 왜 오스론에게 황금사과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오스론이 영웅들을 불러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황금사과를 구하는 것. 그런데 그자에게 황금사과를 주어 소환 계약을 달성할 경우 무슨 큰일이 생기는 것인가?
‘불러낸 목적을 달성한 소환물은 이내 소멸하지.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생긴다든가······’
그런 가능성은 유저들끼리 여러 번 거론한 바였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인가?
만약 그 염려가 정말이라 임무를 다한 순간 영웅들이 전원 발할라로 돌려보내진다면? 이후로는 어찌 될 것인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신들에게서 임무를 마쳤음에 칭찬 좀 들은 뒤 발할라에서 일상을 영위하기는 불가능할 터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황금사과를 구하는 것은 보류해야······ 하지만 우리가 영영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오스론이 신에게 항의하는 거 아닌가? 그리 되면······’
심경이 복잡해졌다. 롤랑은 한숨 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 겉보기로는 위풍당당한 걸음을.
선두에서 그리 걷고 있자니 옆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청소부 대표가 말했다.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드립니다, 경. 대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롤랑과 그 무리는 지금 승강기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 올라갈 계획이었다. 청소부들을 호위하면서.
소문에 따르면 칠십 층 너머의 괴물들이 그 아래층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소부들 사이에서 사상자가 나왔기에 그들을 보호하고자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롤랑 쪽에서 그래주겠노라 제안한 것이었다. 청소부로서는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말을 흐렸다.
“승강기로 올라가는 것보다 한 나절쯤 더 걸릴 텐데······”
롤랑은 쉬이도 대답했다.
“상관없소. 원정대가 죄 빠져나가 최전선에서 사투가 벌어지지도 않는 판에 굳이 시간을 아낄 필요가 뭐 있나? 해야 할 것은 괴물 사냥이요, 당신네들은 그 뒤처리를 해줄 것 아니오. 그처럼 도움을 받을 예정이라면 이쪽에서도 도와야지. 당연한 도리 아닌가.”
정말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더니 롤랑은 무신경하게 계속 걸었다. 그 뒤에서 청소부 대표는 고개 숙인 채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모지는 생각했다.
참으로 보기 좋다고.
성전이 중단된 탓에 청소부들의 일거리가 거의 다 사라진 지금 그들은 빈곤해졌고 일거리를 주는 측에서 어찌 대하든 불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귀족 기사 롤랑과 비프로스트의 최하층 청소부들 간의 신분 격차는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저리 동등하게 대해주다니. 청소부들이 괜히 추앙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겸손한 롤랑 경, 몫을 나눠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위대한 고용주 롤랑 경 하면서······.
그러나 모지, 옛 마법사 마우그리스는 알고 있었다.
저 겸손한 모습은 롤랑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본래부터 귀족적이었던 롤랑은 발할라에 오른 뒤로도 그 지위가 드높았다. 카를 대제의 사촌이자 친구나 다름없는 최측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처럼 위대한 기사가 겸손을 배우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실제로 롤랑은 겸손을 배우지 못했다.
원래 롤랑이라면 저런 상황에 잔뜩 으스대고 또 으스대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랫것에게서 자기가 얼마나 기사도를 잘 숭앙하는지 칭송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롤랑답지 않았던 행동이 하나 더.
모지는 방금 롤랑이 오스론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보어조아가 앞서 한 말을 취소하고 사죄하길 원한다고 했던가? 저 롤랑은 그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진짜 롤랑이라면 그 사죄를 거부하다 못해 결투 신청까지 했을 것이다. 궁니르에 건 맹세가 우습냐며, 그 맹세를 깨버렸음에 오딘의 대전사로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롤랑의 오랜 동료로서 당연하게도.
결국 저 롤랑은 진짜 롤랑이 아닐 터였다.
그 사실이 새삼 속 쓰리게 다가왔다. 이 영웅들이 가짜임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맨 정신으로 자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지금 롤랑의 인격이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당장 비프로스트 모든 주민을 불러 모으시오!”
불청객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비카파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저게 웬 명령이란 말인가?
“무슨 소리요, 보어조아?”
보어조아는 그저 고함질렀다.
“잔말 말고, 주민들이나 소집하라고!”
“이 도시 주민들 대부분은 내가 맘대로 부를 수 없다는 것 알잖소? 귀족들과 그 사병이니 내 어찌······”
“그건 옛 이야기고, 지금은 아니잖아! 이제 도시에 남은 건 거지같은 청소부들이랑 다른 잡것일 건데 뭔 핑계인가! 당장 주민들 소집하시오!”
비카파로서는 어디서 명령하느냐 따질 수 없었다. 지금 격분한 보어조아는 강력한 염동력자였고 지난 연회에서 그 사실을 실감했기에.
비카파는 상대를 진정시키고자 애쓰며 말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요? 이유라도 알고 그럽시다.”
“사라졌소!”
“뭐가?”
“황금사과! 도둑맞았다고!”
비카파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큰일이군.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불러모으리다.”
“빨리 그래주시오! 놈이 달아나기 전에, 관문도 걸어 잠그고! 오밤중에 누가 달아났는지 당신이라면 필시 파악하고 있을 테지? 관문의 출입 명부를 일일이 작성한다는 거 유명한 일이니까 말이오! 그러니 말해두건대, 하필 이 사태에 그놈의 출입명부 작성이 소홀히 되고 관문 경비가 허술해진다면 난 그걸 우연이라 여기지 않겠소!”
숫제 협박이다. 그 사실에 굴욕을 느끼면서 비카파는 말했다.
“돕긴 돕겠지만, 날 도둑 취급했다가는······”
그제야 보어조아는 진정하고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미안하오, 하지만 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렇소. 지금 그렇지 않고 배기겠나? 그러니 제발 빨리 도둑을 잡게 도와주시오. 지금 기댈 건 당신뿐이오, 백작.”
비카파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리다.”
그러고는 바로 자기 집무실에 들어가 앉아있던 모르가나에게 물었다.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그러나 희열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훔쳤소? 훔친 거지? 비로소 성공한 거요?”
모르가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과? 아니.”
“뭐? 그럼 방금 나갔다 온 건?”
“당신이 황금사과를 아예 사버릴 작정이라 했잖아? 그걸 구입하는 데 가장 큰 경쟁자가 될 롤랑한테 황금사과 웬만하면 구하지 말라, 강권하고 온 참이었는데.”
“아······ 그럼 황금사과는······”
“못 훔친다니까. 그놈의 금고를 나보고 어쩌란 거야? 깨질 때까지 까마귀 부리로 열심히 쫄까? 그 두꺼운 금속 벽을?”
모르가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비카파는 허탈하게 대꾸했다.
“이미 도둑질 당했다는데?”
그 말에야 모르가나는 당혹감을 내보였다.
“어떻게?”
이 고대의 마녀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물건의 소유자를 납치해서라도 챙기고 마는 성정이었기에 도둑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잘 숨다 못해 아예 투명해질 수도, 새나 쥐로 변해 숨어들 수도 있는 도둑 아닌가.
이 마법적인 도둑이 보기에도 그 금고에서 물건을 가로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훔쳤다면, 물건은 금고에 있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었다. 모르가나의 추측대로 황금사과는 그 금고에 있었다. 열쇠가 존재하지도 않는 정신 나간 금고 말이다.
그리고 어젯밤 혹은 오늘 새벽, 그 금고가 뚫렸다.
다시 돌아온 비카파 앞에서 보어조아는 하소연했다.
“황금사과는 금고 안에 잘 넣어두었던 채였소. 관리 소홀은 맹세코 아니었소. 그 금고가 얼마였는데? 두께로만 포탄을 튕겨낼 수준이었고 열쇠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비카파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열쇠가 존재하지 않는 금고라니? 그렇담 뭔 수로 여는 거였소?”
“염동력으로. 내부에 힘을 흘려 넣어 조작해야 하는 구조였소.”
“그렇담 다른 염동력자의 짓일 수 있지 않나?”
“내 염동력자 부하들 짓이 아니오.”
“염동력 없이는 열 수 없다며? 그런데 어찌 부정하오?”
“염동력으로 뚫린 게 아니었으니까. 금고에는 구멍이 뚫려있었소. 마치 불에 녹아내린 것과 같은 구멍이. 그런데 그 금고는 열 좀 가한다고 녹을 물건이 아니었단 말이오!”
그 금고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비카파는 그 말에 공감했다. 불로 어찌 될 수준이었다면 모르가나가 손대지 못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러면 대체······ 쇠를 녹였다면 대장장이들 짓일까?”
문득 보어조아가 중얼거렸다.
“나로서는 롤랑과 그 패거리가 의심스럽소.”
“롤랑 경? 왜?”
“놈이 든 빛나는 성검. 그 물건으로 결코 뚫지 못한다던 세계수 벽에 구멍을 냈던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이다. 그러니 금고 하나쯤 억지로 뚫어내지 못할까? 게다가 그놈의 목적이 황금사과였으니······”
비카파가 보기에는 완전히 헛소리였다. 그 정체가 진짜이든 복사체든 간에 그 롤랑은 자신을 영웅이라 믿고 있을 것이다. 롤랑의 업적과 영웅성은 지금 비프로스트 전역에 칭송이 자자하지 않은가.
그런 위대한 영웅이 한낱 임무를 성사시키고자 도둑질을 한다고? 발할라에 귀환한 이후로도 두고두고 욕을 먹도록?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어조아는 그 어처구니없는 가능성에 매달리는 눈치였다.
“게다가 놈의 동료 마법사는 모지였지? 마우그리스, 놈은 투명해질 수 있으니 숨어들기 쉬웠을 테고 금고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고대의 마법으로······”
“그래서? 그들이 의심스럽다면 어쩔 거요?”
“잡아서 추궁해야지.”
추궁이라니, 벌써부터 죄인을 다루는 투 아닌가.
비카파는 감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롤랑 경이 도둑이라면, 감당하실 수는 있고?”
상대가 용이든 거인이든 해치우기로 유명한 고대 영웅을 그 잘난 염동력으로 족칠 계획이신가 묻지는 않았다. 보어조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는 눈치였으므로.
보어조아가 중얼거렸다.
“인질을 잡아야지.”
“인질?”
“오스론.”
비카파는 기겁하여 입을 벌렸다. 오스론이 납치를 당한다면 속으로 환호성을 올리겠지만 그 범죄행위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별개였다.
비카파가 물었다.
“미쳤소?”
“왜? 당신도 오스론 그 작자를 싫어할 텐데?”
“설령 그렇다 한들 심중만으로 그럴 수는 없는 거요. 게다가 여기가 어딘지 잊었소? 비프로스트요. 언제나 신들이 지켜보고 계신 도시. 이곳에서 프레이 신의 후손을 욕보이겠다고? 제 후손을 보우하고자 당신의 궁전에서 영웅들까지 내려 보낸 분인데?”
“프레이 신이 자기 후손을 얼마나 아끼시더라도, 도둑질 한 후손까지 보우하진 않으실 게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아무튼 날 그런 일에 얽히게 하지 마시오. 협조하지 않다 못해 방해해야 할 입장이니까!”
격렬한 거부. 보어조아는 눈살을 찡그렸지만, 실은 상관없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오스론의 저택에 부하들을 보내둔 바였다. 그놈의 추기경을 정중히, 말을 듣지 않으면 덜 정중히 모셔두라고.
비카파는 그 황당한 계획에 치를 떨면서 황급히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당장 주민들에게 소집령을 내리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약 한 시간 후, 보어조아가 바라는 대로 광장에 주민들이 소집되었다. 비카파가 뜻대로 부를 수 없는 세력가의 저택에는 따로 사람을 보내 그 거취를 파악했다.
주민 명부는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과 비교하여 조사한 바,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주민들의 소재가 파악되었다.
도둑이라면 꽁무니를 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지금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많았다. 세계수에 오르는 청소부들, 그리고 모험가들. 그러나 누군가 세계수에 들면 용병들이 따로 기록해두곤 했는데 그 명부와 어긋남이 딱히 없었다.
그리고 그 세계수 출입 목록을 보고서 보어조아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보어조아는 분노에 차 물었다.
“그놈의 음유시인이 혼자 세계수에 들어갔다고?”
비카파도 출입 목록을 보고서 말했다.
“그리 적혀있군그래······”
< 창고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