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고 - [1] >
“당신조차 못 훔친단 말이오?”
비카파의 물음에 모르가나는 체념한 투로 대답했다.
“그래. 웬만해서는 못 가져오겠던데.”
“말도 안 돼. 당신은 투명한 까마귀의 모습으로 잠입할 수 있잖소? 그런데도 훔칠 수 없다고? 보어조아의 하인들이 마법을 꿰뚫어볼 재주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그 저택에 숨어 들어가기는 했어. 하지만 황금사과는 구경도 못했고.”
“그럼 어디 있는지도 모른단 거요?”
“정확히는. 짐작은 가는데, 웬 금고가 보이더라고. 그 앞에 보초까지 세워둔 걸로 보아 황금사과 같은 귀물이 있다면 그 안에 넣어두지 않았을까 싶던데?”
“그럼 그 보초들만 어찌 하면······”
“보초만 문제가 아니더라. 금고 자체가 너무하더라고. 그 금고는 열쇠로 열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어.”
“열쇠로 여는 게 아니라면 뭐요?”
“아예 열쇠구멍 따위는 없더군. 내부에 염동력을 써서 여는 방식 같던데?”
듣도 보도 못한 물건, 아마 공방 장인들을 시켜 만들었을 것이다.
비카파는 그 말에도 도둑질을 체념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금고를 통째로 가져올 수 없냐는 등 온갖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러나 모르가나의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힘들어. 애초에 요즘 보어조아 그놈, 밖에 나가지도 않아서 틈을 노리기도 버거운 판이야.”
비카파는 울분에 차 중얼거렸다.
“남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더니 외출하기도 껄끄러운 게지.”
병신 새끼, 하고 속으로 읊조렸다. 정말이지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머저리의 쓸데없는 염동력 탓에 일이 이토록 어려워질 줄이야? 그동안 비카파가 고찰해온 것들, 그러니까 훔쳐온 황금사과를 어떻게 해야 몰래 넘기거나 습득한 계기를 어떻게 해야 속일 수 있을까 등등의 계획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해야 할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보어조아에게 직접 돈을 주고 황금사과를 사온다든가······.
그러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을 생각하니 비카파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
‘정말 그래야 하나?’
지난 세월 벌어들인 재산이라면 가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처럼 거의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구입해야 할 것인지 의문이었지마는.
황금사과를 메디아 왕에게 바쳐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과연 그 값 이상의 이득이 될 것인가? 이 비프로스트에서 이십 년 더 벌어먹을 수만 있다면 그런 지출을 감행해볼 만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가능성이라도 열어두어야 했다.
비카파는 굳은 얼굴로 집무실을 나와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지시를 내렸다.
“채권을 있는 대로 회수해라. 이자 받아먹는 데 만족하던 채권도 가리지 않고 모두 긁어모아 와.”
많은 채권들. 비프로스트에 거주하는 귀족들에게 빌려준 돈, 외국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 등등. 그 모든 빚을 당장 돌려받아야 했다.
사과 경매에 참여할 현금을 모아야 하므로.
*******
아침부터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 오스론은 자기 방에 들어가버렸다.
찾아온 손님은 비프로스트 주교였다. 주교는 머쓱한 투로 말했다.
“아말릭 경, 있습니까?”
그리하여 손님을 맞고자 나온 아말릭에게, 비프로스트 주교는 양피지 몇 장을 내밀었다.
아말릭이 물었다.
“이게 뭐지요?”
“졸업 증서입니다. 신학 대학 졸업증이요.”
그리고 예의 대학을 졸업하면 정식 사제로 인정받는다.
졸업 증서에는 ‘아말릭’이라는 이름이 똑똑히 적혀있었다. 그 이름의 주인에게 증서를 쥐어주며 비프로스트 주교가 말했다.
“이제 경께서는 정식 사제입니다. 기사이기도 하니 앞으로는 성기사를 자처해도 되겠군요.”
아말릭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거의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이리도 빨리? 그것도 학생 신분 복구뿐만 아니라 바로 사제 임명이라니······”
아무리 추기경 오스론이 압박을 넣는다 한들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머리가 굳어 자기네 결정을 번복하지 않기로 성직자만한 족속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교황청에서 이 증서가 발송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지 아말릭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주교가 말했다.
“듣자하니 교황청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합니다.”
“놀라운 일이라 하시면?”
“교황 성하와 추기경단이 모두 같은 꿈을 꾸었다더군요. 토르 신께서 그 성직자들 모두를 자기 앞에 꿇어앉히고는 호통 치며 아말릭에게 보상하도록 명령하시는 꿈을.”
토르가? 그 위대한 신이 직접 호통 쳤다고? 자신의 신자를 위해서?
아말릭이 굳어버린 가운데 주교가 계속 말했다.
“물론 그 분들은 당장 아말릭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곧 비프로스트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고, 그리하여 조치를 취해주신 거라고······”
아말릭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기도 모르게.
이내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무릎 꿇은 그대로 아말릭은 기도드렸다. 감사 기도였다. 토르 신께. 화내주신 데, 그리고 이러한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신 데 감사드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도. 영웅들을 비롯한 모든 성스러운 것에 아말릭은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그날 점심이었다. 저택의 일원들끼리 식사를 할 때 아말릭은 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모두에게 알렸다.
알론소가 눈을 크게 뜨며 물어왔다.
“토르 신께서 직접 호통치셨다고?”
“예, 그렇다 하시더군요.”
“그것 참······ 통쾌한 일이로군!”
모지도 입을 열었다.
“신의 총애라, 결코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것이지. 그 사실에 겸손하되 긍지를 가지고 행동하시오.”
과연 고결한 마우그리스다운, 그러나 얼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말투였다.
그날 이후 모지의 성격이 확 변해버렸음을 아말릭도 알고 있었다. 물론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순수하게 감격을 표했다.
“물론입니다, 경.”
그 모두의 축하를 아말릭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롤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대에 벅차는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하고서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롤랑도 아말릭이 지금 자신도 칭찬해주기 바란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진심으로 축하하오, 경. 그대도 머지않아 영웅의 반열에 들겠군.”
알론소가 말을 받았다.
“저는 어떻습니까?”
“물론 경도. 모두 이대로만 정진하면 그리 될 거요. 아니면 이미 영웅이던가.”
그리 덕담을 던지며 롤랑은 속으로 생각했다.
‘토르 신이 직접 성직자들에게 호통쳤다고?’
신들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꿈, 혹은 정신세계에 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접해보았으니까.
하지만 정신에 간섭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 롤랑이 알기로 멀리 보는 옥좌 흘리드스캴프가 있다 한들 신들에게도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에게 신들이 함부로 훈수 두지 않는 것이리라 추측해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상의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이 좀 어렵긴 해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그렇다면 신들은 왜 우리 영웅들을 방치했나?’
그저 권력자들에게 신들이 직접 한두 마디 하는 것만으로 영웅들은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들이 미리 비카파에게 영웅들이 올 것이니 잘 떠받들라 말해두었다면, 롤랑은 늑대 괴물들에게 달려들기까지 하여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비프로스트의 모두에게서 권위를 인정받고 뜻대로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저번 트롤과의 대전도 더욱 잘 풀렸을 것이다. 롤랑이 직접 신들이 보증한 영웅이었다면 원정대의 그 누구도 그 권위에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롤랑은 그 무모한 돌격일랑 집어치우고 원정대를 철수시킴으로써 그 끔찍한 대량살상자를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신들이 지휘관들에게 영웅들 말을 들으라 명령하기라도 해주었다면······.’
그처럼 여러모로 신들이 영웅들을 도와줄 방법은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 방치의 이유를 롤랑은 이렇게 생각해왔다.
신이니까. 함부로 인간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거나 간섭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리라.
하지만 이번 토르의 호통으로 증명되었다.
토르가 자신의 신자들에게 그러했듯, 신들은 영웅들을 챙겨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인가.
*******
영주의 연회가 하루 만에 끝날 리는 없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이 띄엄띄엄 도착했으므로, 비프로스트는 그 손님 모두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하여 연회는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끝났다. 그동안 롤랑은 연회에 찾아온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모습을 보이고, 그들에게 자신의 영웅성과 세계수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느라 애썼다.
하지만 연회가 끝난 지금, 세계수 홍보대사 노릇도 끝이었다.
이제는 다시금 모험할 시간이었다. 세계수에 올라 괴물들과 싸울 시간.
세계수에 자리 잡은 괴물들을 죽여 길을 닦고, 놈들의 영혼을 신들에게 바쳐 보상을 받아야 했다. 마치 RPG 같은 그 짓거리를 이제는 함부로 중단할 수도 없었다.
보어조아마저 자기 저택에 처박혀 있었다. 이제 롤랑의 무리가 일하지 않으면 아무도 세계수에 오르지 않을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이제 곧 출정해야 했다.
롤랑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쁜 앤지에게 말을 걸었다.
“곧 출발할 거다. 뭘 아직 안 챙겼기에 아직도 바쁜 모양새냐?”
앤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제 손수건이 안 보여서요, 잠시만······.”
그리고 오스론이 다가왔다. 롤랑은 오스론이 이 종자에게 준비성 부족을 꾸짖으려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스론은 자기 품에서 수건을 꺼내주었다.
“여기, 이거 쓰거라.”
“감사해요, 예하.”
오스론은 앤지를 향해 미소지어주더니 이내 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보어조아에게서 드디어 소식이 있더군요.”
“어떤?”
“저번 발언을 철회하고, 롤랑 경께 사죄드리고 싶다 합니다.”
롤랑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었다. 보어조아는 궁니르에 맹세했는데 그 발언을 그저 말실수였다는 양 철회하고 있었다.
‘저 추한 번복행위를 오딘마저 한다면······.’
롤랑은 이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출정해야 해서 직접 말 건네진 못하겠지만 모쪼록 대신 전해주시오. 사과를 받아들이겠노라고.”
“어쩌면 제가 전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군요. 듣기로 보어조아도 두문불출하던 것을 그만두고 다시 성전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라던데요?”
“잘된 일이군. 아무튼 우리는 가오. 앤지? 손수건 챙겼으면 이제 가자.”
앤지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잠깐만요, 기름 한 통만 더 챙길게요. 좀 부족한 거 같아서요.”
“기름?”
꽤 무거울 것이었다. 롤랑은 앤지에게 기다리고 있으라 말하고는, 직접 창고에 들어가서 기름 한 통을 들고 나왔다.
앤지는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지켜보던 오스론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 기름을 수레에 실은 다음, 롤랑은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을 이끌고 세계수로 향했다.
비프로스트의 주민들이 그 뒤를 배웅했다.
“롤랑, 롤랑, 롤랑!”
이제 롤랑의 무리는 귀환뿐만 아니라 출정까지 모두의 환호를 받았다. 그만큼 그 무리가 비프로스트에 차지하는 비중이 늘었기 때문에.
쏟아지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롤랑은 세계수 입구에 발을 디뎠다. 바로 그 순간, 어깨에 살짝 무게가 느껴지더니 속삭임이 들려왔다.
‘롤랑? 전할 말이 있어.’
롤랑은 흠칫하지 않고자 애쓰며 물었다.
“모르가나?”
‘쉿, 듣기나 해. 너 황금사과를 구하고 있지? 혹시 구하거든 오스론에게는 주지 마.’
롤랑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째서?”
‘그건 말 못해. 아무튼 난 전했다.’
< 창고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