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10화 (110/164)

< 연회장 - [4] >

잠시 경매가 중단되었다. 사람들은 방금 언급된 황금을 넘어설 대가를 과연 지불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실제 경매가 아니라 가상 경매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체면이 걸려있었다. 허풍선이처럼 굴 수는 없는 것이다.

아까 황제 폐하를 언급했던 외교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무 큰 액수인지라 그보다 많이 내줄 수 있노라 확언은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작정하신다면 더 내주실 수도 있을 텐데요. 비단 현물로 보상할 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양보도 상당히 해주실 테고. 정계에 한 자리 보장해주실 수도 있고.”

‘정계에 한 자리’라는 말에 비카파는 마음이 동했다. 황제가 직접 작위를 내려주면 그 권세는 수도 귀족들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보장만 있으면 메디아 왕이 아니라 황제에게 사과를 바쳐도 좋지 않을까?

비카파는 누구에게 사과를 주는 것이 미래를 위한 선택일지 고심해보았다. 그 머릿속에서 이미 그놈의 사과는 자기 것이었다.

비카파는 이 연회가 끝나자마자 모르가나에게 도둑질을 부탁할 생각이었으므로. 보어조아가 아무리 잘났던들 고대의 마녀 앞에서 어찌 제 물건을 지킬 것인가?

‘아니, 아예 지금 회장에서 빠져나가 바로 부탁할까? 집주인 보어조아 놈이 여기 있는 사이에 도둑질하는 게 더 쉽지 않겠나?’

문득 그리 생각했지만 결국 비카파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장 벌어지는 가상 경매를 지켜보는 쪽이 더 도움 될 터였다.

방금 어마어마한 황금을 제시했던 롤랑은 다시 제 종자와 연회음식이나 먹고 있었다. 더 이상 경매에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러나 여전히 이 가상 경매에서 롤랑과 그가 제시한 황금의 존재감은 막대했다.

경매인즉 롤랑이 제시한 황금 이후로 제시된 것들은 전부 그보다 가치 있어야 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제시되는 것들은 이권 보장이니 영토 할양이니 하는 것들뿐. 그 가치도 모호하며 이행이 될지 여부도 불확실한 것들이었다.

반면 롤랑이 제시한 황금은 눈에 보였다. 당장이라도 가서 받아올 수 있을 것처럼.

그리고 보어조아는 그 황금을 넘어선 가격에 사과를 팔고 싶어 하리라.

가능할 일이었다. 사실 이 중 몇 명의 재산이라면 제시된 황금을 넘어설 터였으니까.

비카파만 해도 그러했다. 그동안 벌어들인 재산의 총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인 것이었다. 채권을 모조리 회수하고 자산도 정리한다면 롤랑과도 대등한 자금 승부가 가능하리라.

그러나 비카파로서는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사과 하나와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은행가가 수중에 있는 현물을 다 비운다니 도저히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리고 다른 귀족들 또한 비카파와 마찬가지 사정일 것이다. 모두 미래를 생각할 필요 없는 영웅과 사정이 다르므로.

비카파는 문득 생각해보았다.

‘만약 사과를 훔치는 데 실패하면, 사실 당신네 영웅은 진짜 발할라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프레이 신의 농간으로 생겨난 복사체나 그 비슷한 무언가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줄까? 그러니 굳이 임무를 다할 필요도 없거니와 황금사과를 구해 임무를 다한 순간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영웅의 그림자로서 소멸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사과 한 알 사는 데 그 많은 재산을 낭비할 생각일랑 말고 미래를 생각해서 저축이나 하라고······’

그리 영웅들을 심적으로 몰아붙이면 황금사과를 구하는 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따위로 지껄인 순간 신들은 물론 저 영웅들마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마는.

어쨌건 만약의 상황에 시도할 가치는 있어보였다. 비카파는 머릿속에 이 계획을 담아두기로 했다······.

한편 가상 경매는 분명한 승리자 없이 끝났다. 암묵적인 승리자야 롤랑이었지마는. 결국 그 누구도 황금 무더기를 능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 괴물 박제 전시회와 조련된 하피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오직 이 비프로스트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

살아생전 온갖 것들을 보고 들어온 높으신 구경꾼들도 그 구경거리들에 지루함을 표하지 않고 즐거이 감상했다.

앞선 공연들이 그처럼 흥미로웠다. 그렇기에 연회가 파할 즈음 한 남자가 모두의 앞에서 몸소 흥을 돋우겠노라 선언했지만,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남자는 잔뜩 취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제가, 부족한 몸입니다마는 시 한 수 읊어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해보입죠.”

“시?”

“저, 시인이거든요. 음유시인.”

갑자기 웬 음유시인? 그것도 술 취한 채 그리 말하다니. 모두들 이 예인(藝人)의 출현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심지어 연회의 개최자인 비카파마저도.

비카파는 이 상황을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내가 음유시인을 초청했던가?’

초청했던 것 같기도, 초청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왠지 초청한 것 같다는 쪽에 생각이 기울었다. 하기야 영웅과 괴물이 모인 도시에서 그들을 찬미할 음유시인이 없어서야 말이 되나.

비카파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디 읊어보시오.”

그 말에 음유시인은 모자를 벗어 좌중의 모두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하프를 뜯으며 읊조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들으시오, 높으신 분들이여.

포도나무와 물푸레나무의 자손이여.

내 천상과 이 도시의 비밀을 아노니

입 다물고 모두들 경청할지어다.

여러분 저기 저 롤랑 경을 아오.

황제의 기사, 오딘의 대전사여

그 옛날 수르트와 맞선 위대한 기사여.

그 롤랑이 자기 원수, 화염거인 수르트에게

귀한 칼 내주셨던 프레이 신의 명을 받아

그 후손 구하고자 비프로스트에 당도했도다.

여러분 천상의 신들을 아오.

그들의 왕, 지존자 오딘도 아오.

오딘이 신들의 아비란 것도 아오.

아비가 세계수에 목 매인 지 수백 년인데

그 자식 놈들은 도무지 구해주질 않누나.

여러분 빛의 신을 아오.

제 아비 내팽개치고 권좌에 앉은 주신을 아오.

만물이 사랑하는 패륜아, 발두르 신을 아오.

발두르 신이 내린 신탁을 아오.

잘생긴 로키가 풀려나 신들이 떼죽음 당하게 생겼으니

인간 족속들이 나무에 올라 신들의 적을 죽여주면 좋겠구나.”

이 정도면 모두 당장 저 음유시인의 목을 졸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충분했다.

지금 저 취객은 감히 영웅과 신을 조롱하고 있거니와 술 취한 목소리라 노래도 끔찍하게 못 불렀다. 심지어 운율도 다 틀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모두들 입 다물고 그 엉터리 시를 듣고 있었다.

음유시인은 계속 하프를 뜯었다.

“여러분 성스러운 군대를 아오.

신들의 명을 받아 성전에 나선 군대를 아오.

자기네끼리 잘 살던 트롤들을 해치다가

이 세상에 정의가 있어 아주 떼죽음을 당했구나.

그래도 황금은 얻었으니 잘되었지 않은가?

여러분 성전에서 활약한 장군을 아오.

아군한테 선동하고 포격하신 장군을 아오.

그 이름도 성스럽나니 보어조아라.

이 새끼는 그날 살아남은 게 자기가 잘난 덕인 줄 안다.

왜 자살하지 않니, 이 십새끼야? 네 포탄에 맞아 내 동생이 뒈졌다 미친 새끼야. 뒈져라 이 좆같은 새끼. 주제 파악 못하고 허세 떨기나 바빠서는. 자기보다 잘난 사람들 앞에서 감히 거물 행세냐?

네가 널 죽이려고 네 저택에 숨어 잠복할 곳을 뒤졌다, 개새꺄. 그런데 누런 사과 따위 어디에도 없던데? 높으신 분들, 속지 마시오. 이 새끼 황금사과 없어!”

후반에는 이미 의도를 숨길 생각조차 없어진 조롱이 비로소 끝났다.

어째서 그 엉터리 시가 끝까지 읊어지도록 내버려두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뒤늦게나마 행동에 나섰다.

비카파가 고함질렀다.

“끌어내!”

보어조아가 이어 외쳤다.

“죽여!”

그러나 비카파는 저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술 취한 귀족일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놓았던들 그 목을 함부로 칠 수 없는 것이다.

“참으시오, 장군. 한낱 취객일 뿐이오.”

비카파가 진정시키고자 애썼지만 보어조아는 분노에 차 고함질렀다.

“저자가 나와 신들을 모욕했다! 감히 살려둬? 감히? 어떻게!”

그리 부르짖는 보어조아를 좌중의 모두가 바라보았다. 소리지르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은 물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금 분노한 보어조아가 보기에 그 시선은 자기를 비웃는 시선이었다. 그 시의 내용에 따른 비웃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내 보어조아는 협박에 나섰다.

“말해두겠는데, 난 황금사과가 있소. 그날 성전에서 주웠지. 그리고 지금 저 취한 놈이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해서 그 내용을 믿은 자, 그리하여 내게 무례한 언사를 던진 자에게는 절대 황금사과를 넘기지 않겠소. 궁니르에 맹세코!”

용병들에게 끌려가던 음유시인이 고함질렀다.

“너 이미 그 맹세 깨고 아군한테 포 쐈지 않냐 십새꺄!”

“닥쳐!”

보어조아는 그리 외치더니 모두를 향해 외쳤다.

“저놈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 감히 한 마디도 했다가는······”

슬슬 그 태도에 화가 난 귀족들이 분노를 드러냈다.

“어쩔 거요? 사과 안 판다고? 애초에 살 생각도, 돈도 없으면 막 욕해도 되나? 아군한테 포격하신 분?”

“닥치란 말이다!”

보어조아는 외치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보어조아에게 내재된 힘이 방출되어 욕한 귀족에게 향했다.

염동력에 몸이 붙들려 귀족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허공에 발이 뜬 채 귀족은 제 목을 붙잡으며 발버둥쳤다.

목이 졸려 숨넘어가는 소리. 염동력이 그 목을 조이고 있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롤랑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멈춰!”

그 순간 보어조아의 눈길이 난입자를 향했다. 방해하는 놈마저 죽이겠다는 살의에 찬 시선. 그러나 난입자가 염동력으로도 죽이기 힘들 영웅 롤랑이라는 사실, 그리고 지금 롤랑이 쥔 성검이 발하는 빛을 보고서는 겁을 먹었다. 이내 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움츠러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수치스럽다 못해 더욱 분노했다.

보어조아는 이내 살의에 찬 시선으로 롤랑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다.

“내가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안 했나? 내가 이미 궁니르에 맹세했으니, 내 당신에게 황금사과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 외치면서도 슬그머니 염동력을 해제했다. 그리하여 염동력에 속박되었던 귀족은 지면에 몸이 닿아 켁켁거렸다.

이런 소동이 일어났는데 태연하게 연회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연회는 분위기가 확 식더니 이내 중단되었다.

비카파는 분노에 겨워 보어조아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개자식, 이따위로 날뛰었으니 그 대가를 치러라. 이제 네 사과는 내 거다.’

*******

연회가 끝난 뒤 롤랑은 일행과 함께 저택으로 귀환했다. 돌아가는 길에 동료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제이슨이 반문했다.

“뭐가?”

“그자가 이제 내게 사과를 팔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것도 궁니르에 걸고······”

“팔기 싫으면 팔지 말라고 해, 그 병신새끼.”

롤랑은 오스론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황금사과를 구하는 것은 우리 임무다.”

“괜찮아, 마. 그 새끼가 빡쳐서 지껄인 거에 신경 쓸 거 없어. 애초에 그놈 이미 궁니르에 건 맹세 깨고 아군한테 자기 병력 돌격시킨 새끼 아냐? 한 번 깬 맹세 두 번은 못 깰까.”

모지도 맞장구쳤다.

“그래, 모처럼 이 천둥벌거숭이가 옳은 말을 하는군. 사죄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롤랑. 오히려 그 상황에 나서지 않았다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라니? 제이슨은 그 말에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해서 모지를 쳐다보았다.

뭔가 밉보일 짓을 했던가? 제이슨이 생각하기에 나름 이 소심한 동료를 잘 챙겨줬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인격이 변한 뒤로 모지는 제이슨에게 유독 쌀쌀맞게 굴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편 롤랑은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 누구보다도 황금사과를 구하고 싶어 할 오스론도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 역시 아까 그 보어조아의 선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말릭도.

아말릭은 지금 전혀 낭패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롤랑 경. 기사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사죄입니까?”

“내 그대에게는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두 번째 사과를 주기로 했으니 어서 첫 번째 사과를 구해야 할 판 아닌가? 그러지 못할 위험을 내가 이끌었잖소.”

아말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 그놈의 사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전 지금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영웅들과 함께 하는 것,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싸움을 거듭하여 신을 뵙기까지 했으니 이미 분에 겨운 행복입니다. 이 상황에 문둥이가 어찌 더 바라겠습니까?”

그 말은 전혀 빈말이 아니었다. 아말릭은 지금 이 상태에 충분히 만족했고, 나병을 낫게 할 황금사과조차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먹게 되면 좋겠지만 그뿐이었다. 애초에 신의 축복을 받으면서 나병은 더 이상 몸을 좀먹지 않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저 위대한 기사 롤랑 경을 욕할 마음도 없었다. 전혀 없었다.

오늘 롤랑은 교황 특사 앞에서 제 목을 가르면서까지 퇴학당한 일을 따져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뒤늦게 파악한 오스론이 롤랑과 아말릭 앞에서 약조했더랬다. 기필코 그 불합리한 퇴학 처분을 취소해주겠노라고.

이후로 아말릭은 내내 감격에 젖어있던 차였다.

정말이지 뭘 더 바란단 말인가?

*******

< 연회장 - [4]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