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회장 - [3] >
남자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듯이.
“나는······”
“모든 걸 내버리고 괴물과 싸우러 나서지는 못하겠다고? 물론 상관없소. 몸소 칼을 드는 것만이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니니. 하지만 여러분 모두 알아두시오.”
롤랑은 지켜보는 귀족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은 비단 침대에 걸터앉아 백성들 고혈을 어찌 더 효율적으로 짜낼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바쁘실 거요. 죽어서 헬과 마주할 분들이시지. 가끔 수도원에다 기부금 좀 내서 더 나은 사후를 꾀하겠지만 천상의 신들께서 귀족들 기부금 장부라도 기록하고 계시리라 기대하진 마시오. 신들께서는 여러분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선심 쓰듯 베풂에 별 다른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오.”
그 말에 반박한 것은 교황 특사였다.
“그래서 싸우다 죽어야만 좋은 사후세계에 갈 수 있다고?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아는데.”
“물론 전사(戰死)만이 방법만은 아니지. 성실하게 일하다 죽은 농부를 토르 신께서 당신의 저택에 데려가는 것처럼. 하지만 모든 농부가 토르 신께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모든 전사가 발할라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신들께서 모두를 보고 계실 수 없는 노릇이거든.
하지만 말이오, 이곳 세계수에서라면 다르지. 저 위에서 싸우는 모든 전사들을 신들께서 지켜보고 계시오. 격전 끝에 신들의 선물을 받는다면 새삼 그 사실을 실감할 테지. 그리하여 영광스레 싸우다 죽는다면 비로소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될 터요.”
“발할라?”
“그래, 발할라.”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에야 누군가가 입을 열어 지적했다.
“그게 그리 좋은 선물이라면, 얼마 전까지 여기 있던 전사들은 왜 그 선물을 마다하고 떠나간 거요?”
롤랑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다.
“금 좀 얻었거든. 영광스러운 싸움 끝에 말이오.”
“나도 금은 꽤 있는데.”
“영광도?”
롤랑의 웃음과 함께 또 다시 침묵이 깔렸다.
롤랑은 거만한 미소를 유지한 채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보아하니 더 이상의 연설은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롤랑은 뒤돌아선 다음, 다시 탁자 앞에 가 잘라놓은 돼지 뒷다리나 다시 먹기 시작했다.
꽤 잘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고기 맛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질겅질겅 씹으면서 다른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제이슨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발키리 바로 밑에 서있는 지금 그 누구도 그에게 시비를 걸 수 없을 터였다.
역시 언제나 그랬듯 이런 자리에서 걱정되는 것은 모지였지만 다행히 지금 그는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지는 제이슨의 뒤에서 말없이 팔짱 낀 채였다. 그 모습은 딱히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움츠러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지루한 것 같은 얼굴.
저것이 옛 마법사 모지, 신실한 마우그리스가 살아있을 적 연회에서 보였을 법한 모습이리라.
그렇듯 잘하고 있다면 유저들에게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롤랑은 관심을 돌려 함께 데려온 현지인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있는 아말릭이 보였다. 그 얼굴이 가면에 가려져 있었기에 얼핏 보면 모지처럼 무심하게 있는 듯했지만, 롤랑은 달리 추측했다.
‘그저 이 자리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양이지.’
롤랑은 아말릭에게 다가갔다.
그 앞에 당도한 순간 아말릭은 흠칫 하더니 말했다.
“롤랑 경?”
“그렇소. 놀란 것을 보니 딴 생각하고 있었나?”
“아,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고. 잠시 같이 좀 가지.”
“예?”
롤랑은 아말릭을 이끌고 자줏빛 옷을 입은 성직자에게 다가갔다. 교황 특사는 롤랑을 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뭐요?”
당연히도 이쪽에 호의적이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롤랑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묻소. 여기 있는 기사 아말릭 경은 좀 낫기 힘든 피부병에 걸렸는데, 이 점을 어찌 생각하시오?”
교황 특사는 아말릭의 전신을 가린 복장을 보고서 예의 피부병을 짐작했다.
“문둥이?”
“나병. 그 이유로 아말릭은 신학 대학에서 쫓겨났소. 그 대학이 교황청 직할이었다 하니 그대에게 따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묻소. 그 처분이 정당했다 생각하시오?”
교황 특사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정당했소. 신벌을 받았으니 분명 그럴 만한 짓을 했을 테지. 매춘이라든가, 달리 입에 담기도 힘든 뭐라든가······.”
롤랑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토르 신의 의견은 다르던데.”
“무슨 소리요?”
“그 분께서는 아말릭이 나병환자임을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셨소. 몸이 좀 불편한들 소경이나 절름발이보다 못하겠는가 말씀하셨지. 설마 그들마저 죄인이라 여기지는 않겠지? 아시다시피 천상에도 소경 신과 절름발이 신이 계시오. 그렇듯 소경과 절름발이를 핍박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보다 나은 나병환자 또한 핍박받지 말아야 하오.”
감히 신까지 들먹이다니. 교황 특사는 목소리에 분노를 띄우며 물어왔다.
“영웅뿐만 아니라 신의 뜻까지 자칭하는가? 왜, 롤랑 노릇은 그만두고 토르 행세를 하시려나?”
“내 신분 여부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성직자. 토르 신께서 하신 말씀이 실제 그러했고, 그 증거로 손길이 아말릭 경에게 닿았으니까. 보오.”
롤랑은 발리사다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칼을 들어 제 목에 가져가면서 아말릭에게 말했다.
“아말릭? 기도하시오.”
아말릭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롤랑은 발리사다를 옆으로 그었다. 붉은 혈선이 그어지더니 그 목에서 붉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지켜보던 사람들과 함께 그 앞에 서있던 교황 특사마저 비명 질렀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흥건해졌다. 롤랑은 그 위에 주저 앉아 비틀거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고, 실제 그럴 터였다.
그리 생생한 자살 시도 현장에서 아말릭도 당황했지만, 그저 비명 지르지만은 않았다.
아말릭은 롤랑의 지시를 따랐다.
“토르여, 이 자를 가호하소서······”
그리고 토르 신이 응답한 바, 기적이 내렸다.
아말릭이 롤랑의 목에 손을 가져가자 강렬한 광채가 그 혈선을 감쌌다. 그와 함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던 롤랑의 몸에 핏기가 돌아왔다.
롤랑은 피 웅덩이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품에서 수건을 꺼내 피 묻은 목을 닦아냈다.
어느새 그 목에는 붉은 피딱지가 일자로 돋아나 있었다.
롤랑은 또 다시 발리사다를 들어올렸다.
“멈춰!”
교황 특사가 고함질렀지만 롤랑은 그만두지 않았다. 또 다시 발리사다를 제 목에 가져간 다음, 또 다시 옆으로 움직였다.
다만 이번에는 긋는 것이 아니라 긁었다. 그러자 그 목에 돋아있던 피딱지가 붉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그로써 드러난 롤랑의 목은 어느새 원상태가 되어있었다.
방금 그 폭포와 같았던 출혈을 증명하는 것은 그 옷에 묻은 피와 바닥에 흥건한 피뿐이었다.
롤랑이 물었다.
“토르 신의 행사를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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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바닥에 흐른 피가 닦인 후에야 회장은 다시금 열띤 분위기를 되찾았다.
비카파로서는 기쁘게도 이제 회장의 화제는 성전이었다. 다들 세계수에서 벌어지는 성전이 어떤 식인지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어떤지.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아마 그에 대해 가장 잘 알 터인 롤랑 경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지금 롤랑은 흘린 피를 보충하느라 피 소시지를 먹어치우는 데 열심이었기에.
고아하신 귀족 기사답게도 격식 있게 먹었다. 방금 그 짓거리와 그로 말미암아 상의가 온통 붉게 물든 꼬락서니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그 간격에서 사람들은 이질감을 넘어 공포심을 느꼈고, 그리하여 광전사의 존재를 새삼 떠올렸다.
저자가 실제 롤랑일지 어떨지는 몰라도 광전사이기는 분명할 터였다. 그리고 광전사는 적합한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그보다 만만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댔는데, 구석에서 팔짱 끼고 있는 모지는 질문을 흔쾌히 받아줄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관심을 받은 것은 우선 제이슨과 그 옆에 있던 알론소였다. 둘은 신나게도 질문을 받아주어 회장의 모두를 만족시켰다.
물론 둘에게만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세계수의 전사도 관심을 받았으니, 보어조아였다.
“당신도 신들의 선물을 받았소?”
보어조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리 말하며 보어조아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어어 하더니 질문한 남자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아아악!”
그 비명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서야 보어조아는 만족하고 남자를 내려주었다.
그로써 보어조아는 자신 또한 초인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받게 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나 싸워야 그리 되나?”
“많이. 충분히 싸우면 이렇게 됩니다.”
“초인성을 얻을 수 있다는 거로군. 그 밖에 뭘 얻을 수 있나? 당신이 얻었다는 그 황금은 이미 유명한 것이고, 다른 것은······”
“괴물 시체? 나름 쏠쏠하죠.”
“시체 말고 다른 건? 보물이라든가······ 그러니까 황금사과 같은.”
그 질문에 보어조아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보였다.
“쉽게 얻을 순 없죠.”
“얻을 수는 있고?”
“잘하면.”
그 어영부영한 대답이 모두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운이 좋으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운이 좋았던 것처럼.’
“정말 황금사과를 얻었습니까?”
“글쎄요.”
“본인 이야긴데 왜 남 이야기처럼 구나? 애매모호한 대답일랑 말고······”
“설령 얻었더라도 쉬이 대답하겠습니까? 그 귀물을요.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것인데.”
보어조아의 말에 한 남자가 말했다.
“값을 매길 수 없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죄다 한가락 하는 자들인 건 아실 터인데. 황금사과를 거래할 능력이 될 분들이죠, 모두.”
보어조아가 물었다.
“그래서 산다면 얼마에?”
물론 간단히 대답할 수 없을 질문이었다. 말 그대로 부르는 것이 값일 물건 아닌가.
맨 먼저 입을 연 것은 웬 상인이었다.
“이백만 닢?”
어마어마한 액수.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그보다 높은 액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경매라도 하듯이.
“삼백만.”
“삼백오십!”
그러다 웬 화려한 복장의 외교관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시며 말씀하셨지요. 만약 그곳에 정말 황금사과가 있다 하면 사오라고.”
황제의 나이는 쉰이었다. 언제 늙어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나이를 생각하면 황금사과를 간절히 원할 만도 하리라.
보어조아는 애써 관심이 덜한 척 물었다.
“얼마에 말입니까?”
“원한다면 국고를 좀 비우겠지만 그마저 부족하다면, 당신의 직할령을 좀 떼어서라도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그곳의 영주로 삼아주리라 하시더군요.”
영토, 그리고 당연히 딸려올 작위. 당연히 나쁘지 않았다. 당장 보어조아로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이었지마는.
그 말에 사람들은 황제가 떼어줄 수 있을 법한 땅덩이 크기와 그 가치를 생각해 보고는 그보다 높은 액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이백만······”
그 와중에 롤랑 경이 다가왔다. 천박하게 돈 이야기나 하느냐고 훈계라도 할까봐 사람들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롤랑은 그 경매에 끼어들었다.
“이번에 우리가 차지한 황금, 전부.”
믈론 손님들로서는 그 말로는 당장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보어조아와 비카파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롤랑과 그 영웅들이 차지한 몫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얼마나 차지하셨기에?”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보어조아였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황금의 무게에 이 자리에 모인 손님들 대부분은 이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액수를 넘기란 불가능해보였으므로.
“미쳤군······”
문득 누군가가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다.
“고대 영웅씩이나 되어 황금사과가 필요합니까? 게다가 당신, 롤랑이라면서? 대제에게 황금사과를 양보했기로 유명한 분이 어째서······”
“우리가 이번에 불려나온 목적이 그거거든. 황금사과를 얻는 것. 그리하여 메디아의 여왕이신 오스마 폐하를 치유하는 것이 임무요. 임무를 위해서라면 뭘 못 내줄까? 어차피 이 지상에서의 황금 따위, 발할라에 속한 우리에게는 별 가치가 없는 것을.”
롤랑이 그리 말하는 가운데 비카파는 보어조아를 흘긋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어떻게든 억제하려 하고 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해 비틀려버린 그 미소를.
‘황금사과의 주인······’
< 연회장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