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터 - [4] >
제이슨이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자니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강철군화가 지면을 두들기는 소리.
흑기사 소환물. 이번 레벨 업으로 외형적으로는 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가장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흑기사가 말했다.
“무리가 온다.”
“사람이?”
흑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롤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적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세계수를 활보하는 사람 중에 흑기사가 경계할 만한 자들이라면 이제는 오직 한 무리뿐이었다.
과연 예상한 인물, 보어조아가 다가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양 팔을 벌리며 호들갑스럽게 기쁜 티를 내었다.
“아, 영웅 여러분!”
그의 등장에 제이슨은 바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저 남자에 대한 유저들의 의견은 인격이 변해버린 모지까지 포함해 하나로 일치했던 것이다.
‘아군한테 포격한 좆같은 새끼.’
롤랑의 의견 또한 그러했지만 속마음과는 별개로 미소를 지어 그를 맞이했다. 비프로스트에 남은 장군이라고는 저 남자밖에 없는 마당에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지나가는 길이오?”
롤랑의 질문에 보어조아는 거의 아첨하듯 밝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소소한 사냥을 마치고 오는 길이죠. 보니까 오나추스를 잡으셨군요? 저흰 어찌 건드릴 엄두도 못 내는 놈인데······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과연 영웅과 그 기사들입니다!”
그리 말하는 보어조아의 부하들도 한 마리 거대한 괴물의 시체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오래 살았을 거대한 괴물도마뱀의 가죽.
다만 그 시체는 병사들이 나르고 있었다. 롤랑은 그 점을 지적했다.
“청소부들에게 맡기지 않고 왜?”
“그놈들은 운반비를 떼어가잖습니까? 안 좋아요, 안 좋아. 가뜩이나 돈 나갈 데 많으니 지출을 하나라도 줄여야지요.”
그 말에 롤랑은 아연해졌다. 저번 전투에서 보어조아가 차지한 황금은 실로 막대한 양이었음을 기억했기에.
‘괴물의 시체가 아무리 비싸다 한들 그때 번 돈에 비하면 티끌일 텐데. 그걸 아끼겠다고 병사들의 부담을 가중시켜?’
그러나 역시 괜한 훈수로 그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롤랑은 그저 입 다물고 보어조아 뒤에 선 자들을 바라보았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져 검게 빛나는 갑옷들. 크기부터가 육중한 그 갑옷들은 칼날처럼 삐죽삐죽한 뿔이 갑옷 전신에 돋아나 있었다.
무장한 인간이라기보다는 RPG에 나올 법한 골렘에 가까운 모습. 그러나 그들은 전원 인간이었고, 염동력자들이었다.
‘흑요석 칼날 갑옷.’
모든 부위에 룬을 새겨 염동력을 흘려 넣으면 움직이기 쉽도록 제작했다고 한다. 전신에 돋아난 칼날 뿔에 염동력을 불어넣으면 접촉해온 괴물을 도려낼 수도 있다고.
전부 보어조아가 주문제작한 물건이었고 당연히 터무니없는 거금이 들었다. 저 갑옷 한 벌만 팔아치우면 다섯 명의 기사에게 밭과 집 그리고 말과 갑옷을 근사하게 마련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흑요석 갑옷을 입었으니 무기 또한 흑요석제인가 싶겠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공방 장인들은 보어조아의 지원금을 받아 신무기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그 신무기란 룬검도 아니요 마법갑옷도 아닌 화약무기 포였다.
그 성과로 조그마한 포가 개발되었다.
이제 염동력자들은 전투에서 흑요석 검이 아닌 포를 썼다. 크기를 줄이고 또 줄여 어떻게든 들고 다닐 수 있게 된 소형 포.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야 어찌 된다 쳐도 그 반동 때문에 도저히 홀로 쏠 수는 없을 법했지만, 염동력자들은 그 잘난 염동력을 발휘해 쉬이도 발포했다.
옛날의 그들이라면 불가능하거나 끔찍하게 힘든 일이었겠지만 지금 와서는 그럭저럭 할만한 짓이 되었다.
저번 트롤과의 전투에서 보어조아와 염동력자들은 영웅들을 따라다니며 적들 사이를 휩쓸고 다녔다. 예리하게 갈린 그들의 염동력은 트롤들을 죽이고 죽여 수두룩한 영혼을 천상에 바친바, 그 보답으로 신들의 선물을 받았다.
그리하여 모두들 ‘레벨 업’.
그 전에도 이미 선물을 여러 번 받았던 그들의 정신력은 이번 선물로 말미암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고강해졌다. 작은 포쯤이야 혼자서도 얼마든지 들고 다니며 쏠 수 있을 만큼.
그 소형 포는 염동력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병사들이 쓰기에도 괜찮은 무기였다. 그 성능에 고무된 보어조아는 이제 포병대를 이끌고 다녔는데, 포 하면 공성병기 취급받는 이 시대에 그들의 존재는 지나치게 두드러졌다.
롤랑은 추측했다.
‘저 거대한 괴물도마뱀 시체도 그 포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겠지.’
전 현대인씩이나 되어 포의 존재를 경시할 수는 없었다. 롤랑은 그들의 모양새를 유의 깊게 살폈다.
롤랑이 알건대 화약무기의 발달로 말미암아 기사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롤랑은 기사도의 상징쯤 되는 위인이었다.
‘판타지 세계니까 좀 다를지 몰라도, 어쨌건······.’
잠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일상적이라 해도 보어조아의 관심사는 온통 돈이었지마는.
이후로 보어조아가 꺼낸 화제는 다음과 같았다.
금 시세가 하락하여 괴롭다든가. 당장 인구수가 줄어 식량 가격이 폭락했어도 그건 그저 상인들이 가져온 물량을 처리하고자 떨이한 탓이니 시간이 지나면 그 비싼 운반비 때문에 다시 예전처럼 비싸질 것이라든가.
보어조아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지껄여댔다.
“그러니 얼른 사재기를 해두어야······”
롤랑은 사재기 따위 사악한 일은 하지 말라 경고해야 하나 고민했다. 롤랑의 캐릭터라면 그리 지적하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다행히 롤랑이 무어라 말 꺼낼 틈도 없이 보어조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놈의 도마뱀들, 욕 나오게도 많더군요. 하지만 다행이지 뭡니까?”
“뭐가 말이오?”
“놈들이 그나마 만만하니까 말이죠······ 오나추스 같은 놈은 포격도 먹히지 않아서 놈 등껍질 비슷한 바위만 보였다 치면 저흰 줄행랑치기 바쁘거든요. 저흰 그저 도마뱀 소굴만 들락거리기 바쁩니다. 이제는 놈들 상대하면서 졸병들도 전보다 덜 죽더군요. 도마뱀들이 독이 있다지만 뭐 철판을 뚫진 못하니까, 하반신만 두껍게 가려놓으면 그럭저럭 사냥할 수 있게 되었지요. 덕분에 병사들 중에도 신들의 선물을 받은 자이 여럿 나왔습니다.”
“일개 병사들도? 경사로운 일이군. 참으로 축하하오.”
보어조아는 문득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래서 말인데, 롤랑 경. 이제 세계수 고층을 누비는 건 우리 둘뿐이잖습니까? 세계수를 관리하는 자들끼리 의논할 것이 있습니다.”
“듣겠소. 뭐요?”
“앞으로 도마뱀 군락이 발견되면 토벌 후 알과 새끼는 남겨두지 않겠습니까?”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다음에도 사냥할 수 있게 말입니다. 고령 개체는 너무 커서 위험하지만 아성체는 별 위협적이지 않거든요. 그러니 적당한 놈들만 남겨두었다가 조금 성장한 다음 죽여 그 영혼을 바치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롤랑도 알아들었다.
세계수에서 괴물들을 죽이면 영혼, 그러니까 RPG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괴물 사냥은 단순한 시체 획득 이상의 의미가 있다. 괴물과 싸우는 것은 끔찍하게 위험한 일이지만 그래도 계속할 가치가 있을 만큼.
그 사실로 볼 때 거북 용 오나추스의 경우 좋지 않은 사냥감이다. 그 영혼이 다른 괴물들보다 크더라도 죽이는 데 들이는 수고에 비해 너무 강력하므로.
반면 거대도마뱀의 경우 괜찮은 사냥감이다. 눈에 띄게 거대한 개체와 놈들이 지닌 독만 조심하면 평범한 성인이 창으로 찌르기만 해도 죽일 수 있는 놈들이니까.
그러니 보어조아는 그 개체수를 적절히 보존해두어 지속적인 사냥을 가능케 하자 주장하는 것이다. 사냥터에서 위험한 늑대 무리는 씨를 말리지만 사슴과 멧돼지는 계속 번식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처럼.
이 경제적인 제안을 롤랑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미쳤소?”
“왜 그러십니까?”
“괴물을 계속 번식하게 둬? 사냥이나 하게? 적을 쓰러뜨려야 할 의무를 방기하는 셈 아닌가! 그건 성전을 모욕하는 짓이자 천상을 향한 반역이오!”
롤랑이 분노했지만 보어조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미리 생각해둔 설명을 줄줄 늘어놓았을 뿐.
“안정적으로 신들께 괴물의 영혼을 바칠 수 있으면 천상에도 이로운 일 아닙니까?”
보어조아의 물음에 롤랑은 애써 조용히 말했다.
“신들께서는 영혼을 바치느니보다 괴물들을 빠르게 절멸시키고 전사들이 천상까지 올라오길 바라실 거요.”
“애초에 괴물을 살려두는 게 뭐 그리 죄입니까? 이롭다는 이유로 하피도 살려두지 않습니까?”
“하피는 그럭저럭 무해하니까 내버려두는 거지. 지금 남겨두자는 도마뱀들은 분명히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놈들 아니오?”
“동물들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요? 애초에 동물과 괴물의 경계는 불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드물고 위험한 짐승이면 괴물이요 흔한 놈들이면 동물인데, 그건 썩 말끔한 구분이 아니에요. 그리 구분하자면 좀 희귀한 곰이나 호랑이도 괴물로 쳐야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곰과 호랑이를 절멸시키는 게 뭇 전사들의 의무는 아니잖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 도마뱀들을 다 죽이는 게 성전에 임하는 전사들의 의무는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마는.”
“만약 곰과 호랑이가 세계수에 서식하고, 전사들이 천상까지 오르는 길을 가로막는다면 모조리 해치우는 것이 의무일 거요. 물론 거대도마뱀들도 예외는 아닐 테고.”
보어조아는 더 늘어놓을 주장이 없나 고심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롤랑의 굳은 얼굴로 보아 설득이 먹히지 않으리라 예감했기에.
한편 롤랑은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게이머 출신 유저들도 얼핏 생각해보았을 뿐 실행에 옮기기는 뭐해 속으로만 담아두었던 제안을 저리 당당하게 꺼내다니?
롤랑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들의 뜻을 자신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해서는 안 될 법한 짓을 저지르려 하지 마시오. 신성모독 아닌가. 신들께서 주시하는 이곳 세계수에서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야.”
보어조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롤랑 경. 반성하지요.”
대답이야 저리 했어도 실제로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보어조아가 원한다면 자기만 아는 장소에다 도마뱀 알과 새끼들을 숨겨두었다 적당히 성장하면 죽여 경험치를 벌어들일 수도 있으리라.
물론 롤랑은 그것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신성모독을 막자고 감시원을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진짜 막나가는 새끼.’
롤랑이 입 다물고 있는 차 보어조아는 지겹게도 다음 화제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롤랑 경, 귀 영웅들의 임무는 황금사과를 얻는 것이었죠?”
“그렇소마는.”
“유감입니다.”
“왜? 저번 전투에서 존재가 드러나긴 했는데 얻진 못해서? 유감일 게 뭐 있겠소. 거기선 운 좋은 누군가가 차지했겠지. 물론 그 운이 이쪽에도 돌아오면 나도 언젠가 얻을 테고.”
롤랑은 별 생각없이 대답했지만 보어조아는 목소리를 내리깔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운에만 의존할 수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롤랑 경, 혹시 황금사과를 누가 판다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사야지. 필요하니까.”
롤랑은 이번에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지만 보어조아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황금사과는 말할 것도 없이 귀물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자, 장생하고 싶은 자, 권력자에게 바치고 환심을 사고픈 자 등등 별별 인간 군상이 그 사과를 얻고자 경쟁할 겁니다. 경매라도 올리면 역대 최고의 낙찰가가 갱신되겠지요. 롤랑 경께서도 금을 상당히 얻으셨을 텐데, 그대부분, 혹은 몽땅 써서라도 그 황금의 전쟁에 끼어들 의향이 있으십니까?”
이번 질문에는 조금 고심해보아야 했다. 하지만 롤랑은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전쟁에 끼어들 의향이 물론 있소. 가진 금을 다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놈의 사과를 얻는 게 우리 임무니까 말이지.”
보어조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과연 롤랑 경이군요. 대제의 뒤를 지키던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
롤랑은 그 환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황금사과, 당신이 가지고 있소?”
< 공터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