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04화 (104/164)

< 공터 - [3] >

“이대로는 안 돼.”

비카파의 중얼거림에 멍하니 앉아 있던 모르가나는 성의 없이 물었다.

“뭐가?”

“전사들이 족족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 말이오. 이건 좌시할 수 없는 위기요.”

“그놈의 성전을 못하게 되어서?”

“그렇소.”

“네가 그리 성전에 열정적인 줄 몰랐는데······ 거인 군대가 밀려올지 모른다는 핑계로 원정대를 몇 년째 오십 층에 붙잡아둔 건 너 아니었나?”

비카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사실 내 의지가 아니었소. 그들이 원해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었지. 정말 진격하길 원했다면 군대까지 거느린 주제에 내 말을 들어먹을 리 없었을 터요.”

“아무튼 그때도 성전은 멈춰있었잖아.”

“아니, 아니오. 당시 성전은 정체되었으나마 계속되고 있었소. 하지만 이대로는 끊길 판이야. 지금은 전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아예 떠나버리는 거잖소? 이대로면 나와 비프로스트는 파멸하오.”

마지막으로 비카파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망할 놈의 도시.”

비카파가 보기에 이 도시를 다스리는 것은 심히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문제만 해도 그러했다.

비프로스트에는 아무런 작물도 자라지 않는다. 밀도, 귀리도, 보리도 모두. 세계수의 뿌리가 지력을 있는 대로 빨아들이는 탓이다.

심지어 세계수 안에 심어보기도 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판명되었다.

비프로스트는 자생할 수 없는 도시라는 사실. 그리고 이 도시가 살아남으려면 모든 물자를 타지에서 끌어와야만 한다는 사실이.

타지라면 어디에서?

인접국 메디아에서.

비프로스트에 도착하는 거의 모든 물자는 메디아를 통과했다. 원한다면 메디아는 단순 교역로를 끊어버리는 것만으로 비프로스트를 고사시킬 수 있는 위치다.

그리고 메디아의 오스 왕은 그런 불이익을 줄 동기가 충분했다. 비카파가 그의 형 오스론에게 벌인 짓이 있었으므로.

그나마 지금까지 오스 왕이 무슨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식량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기에는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전이 일어나는 중이요, 함부로 굶길 수 없는 외국인 귀족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그러나 성전의 열기는 식고, 전사들은 빠져나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비프로스트는 오스 왕의 한 마디에 다음 달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에 대폭 줄어든 세수 따위는 그에 비하면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비카파는 손톱을 씹으며 생각했다.

‘니미.’

이럴 줄 알았으면 순례자들을 엄격하게 가려 받지 말아야 했다.

비프로스트 백작이 관문을 걸어 잠그고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순례자들을 관문 밖에서 굶어죽게 만든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진 뒤였다. 그리하여 민중 순례자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 사실에 비카파로서는 기꺼워했더랬다. 세금도 못 내면서 식량은 축낼 비렁뱅이들은 도시에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그러나 이제 전사를 가려 받아서는 성전을 지속할 수 없을 상황에 처했다.

물론 각국의 세력가들이 다시금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해 이곳에 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언제의 일이 될 것인가?

당장 새로운 귀족들이 유입되기는 요원할 것이다. 가뜩이나 대오공국의 공작이 대패한 마당 아닌가.

결국 몇 년쯤은 기다려야 다시 성전다운 성전이 재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몇 년 사이 메디아에서 수작을 부린다면, 이쪽은 감당할 수 없다.

‘오스가 그저 원조만 중단해도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 메디아의 분노를 산 영주를 갈아치우려 들 테지.’

그리 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간단한 일이었다.

메디아 왕과 관계를 개선해야 했다. 다행히 그러기 위한 좋은 선물을 알고 있었다.

비카파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해도 되겠소?”

모르가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 싫어.”

“제발, 내 목숨이 달린 일이외다!”

“저번에 도시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어쩌니 하면서 수천 명 불태우랬지? 결국 쓸모없는 일이었고. 내 보기에 용을 부려 그런 참사를 벌이게 했으면 더 이상 빚을 주장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

비카파는 착잡하게 부탁했다.

“그렇다면······ 조언이라도.”

“뭔 조언? 말해봐.”

“황금사과를 어찌 구할 수 있겠소?”

모르가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죽을병 걸렸니? 아니면 벌써 늙어죽을 것 같아서 회춘하고 싶어?”

“아니, 내가 먹으려는 게 아니라. 오스 왕에게 바치려는 거요. 병석에 드러누운 오스마 여왕을 치유하도록. 그리 되면 오스 왕이 내게 큰 빚을 진 셈이니 정치적으로 괴롭히지는 않겠지······”

모르가나는 얼핏 들었던 메디아의 상황을 떠올리며 물었다.

“황금사과를 준다고 오스 왕이 정말 고마워할까?”

“무슨 소리요?”

“실제 통지자인 여왕이 나으면 섭정 노릇하던 오스 왕이 독재할 수 없게 되는 셈이지? 그럼 고마워하는 척하면서도 내심 원한을 가지는 거 아냐?”

비카파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부정했다.

“그렇지 않소. 오스마 여왕이 이대로 죽으면 오스 왕은 끝이오. 덤으로 메디아 왕가도 끝장이지. 대가 끊기는 셈이니.”

“오스랑 오스론, 두 수컷이 남아있는데 왜?”

“딴 가문이면 남자 하나만 있어도 대를 이을 수 있지만 메디아 가문에서는 그럴 수 없소. 메디아 혈족 사이에서 태어난 순수혈통만이 적통성을 인정받으니까.”

“혈족 사이? 근친을 한다고?”

“그렇소.”

“그럼 오스 왕이랑 오스마 여왕은 피붙이야?”

“남매요. 오스에 오스마에다 오스론, 이렇게 삼남매.”

모르가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음, 근친쯤 왕가에서 자주 있는 일인 건 아는데. 남매끼리 붙어먹는다니 좀 역겹네.”

“애초에 그네들은 근친 외에는 인정하지 않소. 다른 가문의 피가 흐른다면, 메디아 혈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오. 귀족의 피든 왕족의 피든 한낱 인간의 피가 섞이면 반신(半神)이 아니라 이거지. 그리고 지금 죽을병에 걸린 오스마 여왕은 메디아 가문에 남은 유일한 순수혈통 여성이오.

그녀의 병을 낫게 해주는 것은 오스 왕에겐 단순 권력을 나눠가질 마누라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가문을 되살려주는 일이 될 거요. 그러니 그 병을 낫게 해줄 만병통치약, 황금사과를 원하오. 당신 같은 오래된 마녀라면 그놈의 사과를 구할 방법을 알 것도 같은데······”

모르가나는 침통하게 대답했다.

“미안한데, 몰라.”

“그 행방도? 듣자하니 백 층에서 웬 요정들이 황금사과를 던졌다던데? 그건 누구 손에 들어간 건지······”

“그것도 몰라. 난 그 근처에 가지도 않았어. 위험하게 까마귀의 몸으로 화살 날아다니는 전장을 날아다닐 리 없잖아?”

비카파는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단 거요?”

모르가나는 이미 도움은 줄 만큼 주었지 않느냐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껏 무얼 해주었건 목숨 값은 값진 것이다. 평생 갚아도 모자랄 만큼.

모르가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구해는 볼게.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리고 조언? 어찌 사과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못 말해줘. 나도 모르니까. 하지만 다른 조언을 하지.”

“경청하겠소.”

모르가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황금사과를 구하거든 오스론에게 넘기지 마.”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 오스론한테 황금사과를 주지 마. 더 이상 지껄이면 옛 거래인에게 배신이 될 것 같으니 조언은 이걸로 끝. 아무튼 명심해. 알겠어?”

비카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후로도 시간이 흘렀다.

두 달이 지날 동안 사냥을 거듭한 결과 소득이 있었다.

롤랑을 제외한 모두가 레벨이 올랐다. 유저들뿐만 아니라 두 현지인 동료에다 따라다니던 기사들까지.

20레벨이 된 두 유저들은 특히 소득이 컸다. 제이슨은 레벨 업의 성과를 흑기사 소환물에 집중 투자했다. 그리하여 흑기사 소환물은 이제 플레이어 캐릭터에 비할 수 있을 만치 고강해졌다.

그리고 모지는 새로운 주문을 얻었다······.

롤랑은 별 변화가 없었지만, 그나마 발전한 점이라면 성검을 쓰는 데 한층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이제 롤랑은 축복의 지속시간을 분 단위로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성검이 바닥에 꽂히지 않도록 따로 연습해두었기에.

지진이 울렸다.

거대한 거북 괴물, 오나추스가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 주둥이 속이 붉게 빛났다.

이내 방출된 오나추스의 불꽃에 맞서 성검이 빛을 발했다. 그 힘이 주인을 보호한바, 롤랑은 터럭 하나 상하지 않고 괴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갑옷에 그을음조차 생기지 않았는데, 이 역시 성검의 보호였다.

이처럼 탱커가 일하는 사이 딜러들도 제 역할을 다했다.

“롤랑을 위하여!”

맨 먼저 알론소의 창이 박혔다.

오나추스가 비명 지르는 사이 흑기사와 서리거인이 그 머리 양쪽에 무기를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그 머리를 등껍질로 넣지 못하게 양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 괴물이 무력화 된 틈에 기사들이 덮쳤다.

“티르여!”

웬 기사가 대검을 휘둘렀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대검이었는데, 그 검신만 이 미터를 넘어 실용성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 초인적인 근력에 힘입어 기사는 아주 간단하게도 오나추스의 다리에 거대한 상처를 만들어냈다.

다른 기사들도 싸움을 거듭한 동안 신들의 선물을 받았다. 그들 모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는 이제 저 저급한 용에게도 충분히 통했다.

신들, 혹은 롤랑의 이름이 연호되었다. 그리고 오나추스의 드러난 살갗마다 강맹한 일격이 퍼부어졌다.

“롤랑을 위하여!”

머리, 다리 그리고 꼬리 모든 곳에 피가 흐르는 가운데 오나추스는 발버둥 쳤다.

괴물이 질량을 이용해 몸을 뒤틀었지만 기사들은 그 동작이 뻔히 보였다. 이미 놈을 잔뜩 상대했고, 선물을 받아 동체시력 또한 향상되었기에.

결국 아무도 쓰러지지 않은 채 한 마리의 거대한 괴물이 쓰러졌다.

“영웅의 인도를 찬양하라!”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웬 기사가 무릎 꿇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기도 올리는 것을 보니 아마 또 다시 신의 부름을 받은 모양이었다.

‘또 레벨 업.’

저 기사의 레벨은 한 6쯤 될까? 게임으로 치면 낮은 레벨이었지만 여기서는 명백히 초인이다.

쓰러진 오나추스에게 청소부들이 몰려드는 동안 휴식을 취했다. 롤랑도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도살 작업이 오래 걸렸으므로 휴식도 길었다. 순식간에 한 시간이 흘렀다.

문득 앤지가 다가와 물었다.

“충분히 쉬셨어요?”

칼을 닦아주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성검은 아무나 만질 수 없어 감히 내줄 수도 없었으므로.

“수련?”

롤랑의 물음에 앤지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려요.”

롤랑은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시작할까.”

앤지는 적당한 모형검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서 롤랑은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나뭇가지를 통해 검술 자세를 잡더니, 한 발 내딛으며 앤지에게 내리쳤다.

“읍!”

사전 동작을 보여주고 적당한 힘을 실었으므로 앤지는 수월히 막아내었다.

휴식간의 검술 연습.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요새는 저택에 있는 시간보다 세계수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즉, 이럴 때가 아니면 종자에게 가르침을 줄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롤랑은 신호를 보내며 검을 뻗었다.

“왼쪽.”

그에 맞서 앤지는 진지하게 방어동작에 집중했다······.

어린애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히 한국인 대학생에게 생소할 일이었다.

그러나 롤랑은 지금 이 상황이 어쩐지 그리웠다.

주종 모두 수련에 열심인 가운데 모지가 다가왔다. 모지는 롤랑을 흘긋 보더니 말을 던졌다.

“그만두지 그러나.”

롤랑이 물었다.

“어째서인가?”

“네 종자는 어리다. 걷는 것만으로도 지쳤을 테지. 몸에 무리가 가면 성장이 지체된다. 쉬게 해라. 롤랑.”

“전 괜찮아요······”

앤지가 말했지만 모지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기사끼리 말하는데 종자가 끼어드는 게 아니다.”

감정 없는 목소리. 앤지는 감히 대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수련은 잠시 후 중단되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이슨이 다가와 롤랑에게 속삭였다.

“모지, 저 새끼 변해도 너무 변했어. 말투뿐만 아니라 성격이며 사상까지······”

롤랑도 긍정했다.

“그렇군.”

“씹할, 기사끼리 말하는데 종자가 끼어드는 게 아니다? 그게 뭐야, 대체? 그 소심한 녀석이 이제 싸가지 없고 기사작위 있는 마법사가 다 됐어. 미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제이슨은 이후로도 하소연했지만 롤랑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문득 제이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평을 거들어주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제이슨은 롤랑의 귓가에 대고 날카롭게 속삭였다.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넌 아무렇지도 않냐?”

롤랑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실제로 난 별로 감흥이 없네. 그날 이후로도 제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고, 이번 말도 어쨌건 선의로 조언한 것이었고······.”

“그게 문제냐? 지금 그 새끼 맛이 간 게 문제잖아!”

제이슨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착잡한 표정.

롤랑은 조금 뜸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모지가 변한 것은 알겠는데, 솔직히 그게 피부로 와 닿지가 않아.”

“안 느껴진다고? 다 변했는데?”

“설명하기 곤란한데. 지금 말투나 태도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 네 표현대로, 그러려니 하고 있어.”

“미친?”

“아무튼 그래. 미안. 내가 좀 무디게 반응했나 보네. 앞으로는 더 신경쓸게.”

제이슨은 입을 다물었다. 워낙 당황했기 때문에.

‘익숙하다고? 저게?’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모지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제이슨이 그 사실을 체감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 공터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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