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터 - [2] >
이후로도 롤랑은 신성한 빛을 관측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망원경까지 구입하여 거리에 따라 빛의 크기가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기록하고 계산했다.
관측 결과에 따르면 빛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각 층의 높이가 앞으로도 같으리라 전제한다면, 오딘은 약 백오십 층에 있었다.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요, 멀다면 먼 거리지만 어쨌건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되었다.
굳이 세계수 끝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다. 오십 층만 더 올라가 오딘을 구해내면 그것으로 모험의 목적은 끝.
이제 원정에 한층 박차를 가하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백 층에서 있었던 전투로 병사들이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 인원수로 계산될 졸개들이 아니었다.
이번에 죽은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세계수 원정이 막 시작될 무렵부터 차근차근 괴물들을 토벌해온 자들. 그들 중에는 전투를 거듭한 끝에 신들에게서 선물을 받은 자들도, 하급지휘관이 될 수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그런 세계수 원정의 핵심들이 거의 다 죽었다. 이 손실은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지에서 발할라에 가고픈 한량들을 꾀어다가 인원수를 보충한 다음 그들을 전장에 세워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 선 그들이 괴물을 상대로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지휘관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지휘관들 역시 태반이 죽었고, 가장 중요하고 강력했던 군주 아이스피시는 아예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자기 병사들을 거의 전멸에 이르게 한 지휘관이라니? 군주가 아니라 장수였으면 가히 군법재판에 처해져 참수될 실패 아닌가. 그리 생각한 아이스피시는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제 아이스피시는 대오공국에서 신병을 데려오지도, 다른 지휘관들을 다독이며 재기를 꿈꾸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더 이상 세계수 원정을 계속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비프로스트 전체의 생활상이 변했다. 먹을 입이 대폭 준 나머지 식량 가격이 절반 이하로 싸졌다. 덕분에 유족들을 더욱 쉬이 부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롤랑으로서는 결코 좋지 않았다.
저번 전투 후 원정을 그만둔 지휘관은 아이스피시뿐만이 아니었으므로.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귀향을 선언했다. 병력도 죄다 죽어 보충도 어렵겠다, 황금은 잔뜩 건졌으니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노라 판단했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 또한 더 이상의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저번 전투는 모두에게 악몽이었고, 주머니 속 황금은 충분히 무거웠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산 다음 마을 사람들에게 무용담을 떠벌릴 일만 남은 것이다.
황금이 있는데 발할라가 부러울 리 없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이곳에 온 병사들마저 귀향하는 지휘관을 따라 도시를 나섰다. 더 이상 이 도시에 볼일은 없다는 듯이, 뒤돌아보지 않고.
결국 비프로스트 시는 텅 비게 되었다.
이제 세계수 공략의 주역은 귀족 지휘관들과 그들이 이끄는 군대가 아니었다. 요새 세계수에 오르는 것은 소수의 모험가들뿐이었는데, 그들은 무슨 사업을 주도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세력이었다.
세계수 원정은 사실상 중단된 셈이었다.
하필이면 목표가 저기 보이는 마당에 이런 사태라니. 롤랑은 갑갑하기 그지없었지만 이 상황을 막고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세계수를 오르는 것뿐.
지금도 그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롤랑과 기사들은 백 층 너머가 아니라, 칠십 층부터 백 층 사이를 쏘다녔다. 길이라도 닦아두자는 이유였다.
그 ‘길 청소’는 제법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지난 전투에서 롤랑을 따르던 기사들 모두 자기네 신을 만났다. 그리고 선물을 받은 바, 더욱 고강해진 그들은 가히 초인 기사단이라 부를 만했다.
자잘한 괴물들과의 전투는 이제 그저 사냥에 불과했다.
지금 수색하고 있는 것은 칠십삼 층이었다. 홀로 다니는 괴물을 죽이고, 군락을 형성한 괴물들에 맞서 전투를 치르며 다녔다.
그리고 지금 괴물 군락과 맞닥뜨렸다.
거대도마뱀 괴물 군락. 앞서 백 층까지 행군하는 동안 지겹게도 만나서 익숙한 놈들이었지만 방심할 수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없는 상대였다.
저 도마뱀 괴물들은 지능적이었다. 암습에 능했고, 약한 사냥감부터 노릴 줄 알았다. 사실 정면에서 싸우기도 그다지 만만한 적들은 아니었는데, 죄다 독이 있을뿐더러 몇몇 늙은 개체들은 그 몸 크기가 가히 작은 용이나 코끼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롤랑은 도마뱀 군락을 유심히 살폈다.
‘코끼리급 덩치, 세 마리. 나머지는 서른 마리······’
롤랑이 도마뱀들을 보는 가운데 놈들 또한 이 기사 무리를 알아챘다. 망보는 놈이 있어 이미 무리에 신호를 보낸 뒤였으므로.
이내 상대할 만하다 판단한 롤랑이 소리쳤다.
“공격!”
거의 언제나 그랬듯 알론소가 맨 앞에서 뛰쳐나갔다.
“발두르여!”
끼라라라라락. 돌격해나간 유령 군마의 말발굽이 괴물도마뱀의 머리를 짓밟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간, 다—!”
비늘이 돋아난 서리거인이 뛰쳐나가는 가운데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롤랑이 달려 나갔다.
기사들은 모두 갑주로 무장했으니 도마뱀 괴물들의 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월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갑옷을 무시하고 그 몸을 짓부술 수 있는 거대한 개체들이 문제였다. 그러니 희생을 줄이려면 놈들부터 맡아 처리해야 했다.
롤랑은 언덕 위 거대한 도마뱀 앞에 순식간에 도달했다.
거대한 도마뱀이 앞발을 휘둘러왔다. 그 앞발에서 독이 흘러내렸지만 롤랑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롤랑은 도약하여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그 팔 위에 올라탔다.
도마뱀이 팔을 내리기 전 한 번 더 도약, 놈의 등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도마뱀의 목에다 칼을 쑤셔박았다.
발리사다의 예리한 칼날은 단숨에 그 목덜미를 도려내었다.
울부짖는 거대한 괴물을 뒤로하고 롤랑은 다음 사냥감을 찾아 뛰쳐나갔다.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공터에 도마뱀들의 시체가 가득 쌓인 가운데 무리를 뒤따라온 청소부들이 일하기 시작했다.
청소부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도마뱀 시체를 해체했다. 그 작업을 가만 지켜보던 롤랑이 물었다.
“꽤 공들여서 해체하는군. 이놈들 시체는 뭔가 가치가 있나?”
질문을 받은 청소부는 긴장했지만 이내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 롤랑 경. 말 걸어주셔서 영광입니다! 물론 가치가 있지요. 이놈들은 가죽은 물론 독도 꽤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나름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청소부로서는 이 영웅을 속였다가는 앞으로의 벌이가 걱정이었으므로.
오십 층의 거인 부대가 사라진 후, 군대가 본격적으로 전진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체를 처리해야 했다. 그리하여 청소부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세계수에서 군대가 활동을 멈춘 지금, 군대 규모의 토벌은커녕 변변한 사냥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쏘다니는 모험가들을 따라나서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모험가들은 괴물과 싸우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괴물이 보이면 그저 피해 다니기 바빴다.
결국 청소부들의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식량 가격이 싸져서 어찌어찌 버티고 있을 뿐, 이대로는 다들 굶어죽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마당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토벌다운 토벌을 하는 무리는 둘뿐이었다. 롤랑의 부대와 보어조아의 염동력자들만이 나름 규모를 거느리고 세계수를 오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청소부들의 사이에서 롤랑은 거의 신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들의 무리가 당장 괴물들을 가장 많이 죽였고, 분배도 섭섭하지 않게 해주었기 때문에. 게다가 저번 백 층까지 롤랑을 따라나섰던 청소부들이 황금을 분배받고 돌아온 것은 그들 사이에서 거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롤랑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뿌듯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랑 기사들이 죽어라 싸워봤자 수십 명의 분투에 불과해. 아무리 용을 써도 군대가 휩쓰느니 보다는 못하지.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이 괴물을 죽이고 있다는 것은······ 세계수 전체로 보면 거의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씁쓸한 가운데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론소가 외쳤다.
“발두르 신을 뵈었습니다!”
또 다시 레벨 업 했다는 것이다.
알론소와 아말릭 모두 지난 전투에서 ‘레벨 업’을 했으니, 이제 그들은 게임으로 치면 레벨 7이었다. 게임 메디아에서는 막 초보 티를 벗어난 수준이던 레벨.
그렇다고 레벨 7의 플레이어 캐릭터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레벨이 오르면 기술도 절로 오르던 플레이어 캐릭터와 달리 여기서 신들의 선물에는 한계가 있었다. 레벨 업을 거듭했지만, 알론소의 창술은 여전히 세련되었다 평하기는 모자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알론소는 비프로스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존재였다. 영웅들에 비하면 부족해도 충분한 초인.
롤랑은 착잡한 가운데 알론소를 향해 웃어주었다.
“축하드리오. 뭔 선물을 받으셨소?”
“육체의 강건함을······”
“한층 더 든든해졌다 이거군. 더욱 의지하겠소.”
동경하는 영웅의 말에 알론소는 더없이 감격스럽게 웃어보였다.
‘딜탱 성기사가 되어가는군. 게임에서야 힐러 성기사에 밀려 천민 취급이었지만, 여기서는 당연히 환영이다. 이 노인네도 점점 도움이 되어가고 있어. 물론 진짜배기 성기사 취급이던 힐러, 아말릭 또한······.’
아말릭도 조용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싸움 이후 통증을 호소하는 기사들 사이를 활보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올렸다. 부상자들의 경미한 상처가 치유되고, 정화 기도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독을 그 혈관에서 불태워 없앴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롤랑이 팔자에도 없는 치유자 역할을 하느라 숨돌릴 틈도 없었을 것이다.
‘알론소가 레벨 업 했으니 아말릭도 곧 레벨 업 하겠지. 한층 더 도움이 될 테고.’
모지와 제이슨도 다음 레벨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롤랑은 새삼 의욕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은 사냥이다.
RPG에서도 당장 공략이 막히면 자잘한 괴물들이라도 해치우며 레벨을 올렸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면 새삼 급할 것이 없다. 당장 구해야 할 신이 보이게 되었더라도 서두를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놈의 오딘은 롤랑이 오기 한참 전부터 매달려 있었지 않은가. 조금 더 뜸들인들 큰 상관은 없을 터였다.
그리하여 롤랑은 스스로에게 다독였다.
좋아, RPG를 하는 것처럼 굴자. 몬스터를 해치우고 돈과 경험치나 벌자.
세계수 원정 같은 장엄한 사업에는 별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쓸데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롤랑은 간단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간략하게나마 캐릭터 시트를 정리했다. RPG답게.
롤랑 LV 21
- 광전사 LV 15, 성기사 LV 6
근력 8
민첩 8
정신 4
지혜 4
건강 5
신성 8(투자된 능력 점수 3/6, 추정)
* 특기 : 장검 숙련 LV 4, 방패 숙련 LV 3, 중갑 숙련 LV 3, 반격 숙련 LV 3, 전투함성 LV 3
+ 염동력 LV 1
* 주문 : 원소 룬, 축복, 회복, 소생, 정화, 신 내린 무기
* 가호 : 초재생, 바람의 화신, 부활하는 자, 불가침 피부, 화완
다 적고나니 아말릭은 모두의 치유를, 청소부들은 도살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앤지 또한 저들처럼 제 할 일을 끝냈다.
“칼 다 닦았어요, 기사님.”
앤지는 공손히도 발리사다를 내주었다. 기묘하게 번뜩이는 칼을 롤랑은 감사히 받아들었다.
“언제나 고맙다. 앤지.”
히죽 웃는 앤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휴식 끝, 모두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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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터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