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속 - [6] >
트롤은 조금 생각하더니 물었다.
“철수하도록 돌려보내주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는 건가?”
롤랑은 부정했다.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돌아올 것이다. 대신 당신들의 영토를 이용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 식량이든 자원이든 간에.”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싸울 뿐이다. 아마도 둘 중 한쪽이 끝장날 때까지.”
“너는, 협상을 하자면서 협박만을 하는군?”
“협박이 아니야. 우리는 끝없이 싸울 것이고, 그것은 담담한 사실의 토로에 불과하다. 성전에 임하는 전사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 법이니, 모두 이 세계수를 오르고 또 오를 것이다. 저 천상에 닿을 때까지!”
그리 말하면서 롤랑은 제국주의자가 된 기분이었다. 원주민에게 영토 사용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고상하신 문명인.
‘심지어 전투에서 거의 패배한 주제에 이따위로 굴다니.’
그렇다고 패배자다운 겸손을 보일 수도 없었다. 약자로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신들이,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귀족적인 롤랑 경은 거만하게 굴어야 한다는 사실을 롤랑은 종종 잊곤 했지만, 지금만은 그 설정을 상기해야 했다.
롤랑은 여전히 거만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우리가 줄 자원을 통행료가 아니라 공물이라 생각해도 좋다. 그래서 어쩔 텐가? 선택하라, 트롤!”
트롤 추장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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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협상이 대체 어떻게 통한 거냐? 누가 보면 우리가 핵무장한 항공모함이라도 끌고 와서 포함외교 성공한 줄 알겠는데?”
제이슨이 투덜거렸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모지였다.
“저들은 평화를 원했으니까. 설령 협상상대가 지나치게 거만하더라도 그가 내건 조건을 진지하게 생각할 자세가 되어있었다. 잘 생각해봐라, 제이슨.”
“뭘?”
“우리에게 이곳은 전장에 불과하지만 저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그 삶의 터전에서 그들의 젊은이들이 절반 이상 죽었어. 저들로서는 거의 학살당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승리자의 기분에 취할 수 없었을 테지.”
제이슨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저 모지와 대화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저번 죽음으로 모지는 명백히 바뀌었다. 원래도 모지의 말투는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이제는 거의 문어체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핵무장이니 항공모함이니 하는 현대적 용어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그 인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변했다. 그 사실이 제이슨은 매우 쓰게 느껴졌다.
‘같이 있기 불편해.’
그나마 모지가 같이 있기 편한 동료였는데. 롤랑과 달리 말이다.
저택에서 편히 있을 때면 모를까, 세계수에서 투쟁에 임하는 롤랑은 제이슨에게 내심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연기에 임하는 롤랑은 지나치게 기사다웠고, 영웅다웠다. 제이슨으로서는 저 동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생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방금 전 협상만 해도 그렇다. 이쪽에서 굽혀야 할 입장에 롤랑이 그리 구는 것을 그 옆에서 지켜보며 제이슨은 내심 겁을 먹었다. 롤랑이 아직 광폭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러나 그 막가파식 협상은 성공했다. 아직도 제이슨은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마당인데, 어째서인지 다른 두 동료는 그 성과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롤랑의 저 담담한 태도야 연기일지 모른다고 쳐도, 모지 이놈은 정말 그리 여기는 눈치인데······.’
이처럼 말투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조차 변한 듯했다. 그나마 만만하게 여기던 소심한 동료조차 보다 영웅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세 유저 중에 일반인이라고는 제이슨 혼자뿐인 것 같았다.
제이슨은 일하느라 바쁜 원정대 병사들을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병사들은 분주하게 작업하고 있었다.
원정대는 황금을 건져내고, 자기네 수레에 옮겨 담거나 제 주머니에 넣기 바빴다.
협상이 체결된 후. 트롤들은 호수를 이룬 황금들을 흔쾌히 내주었다. 인간들이 좋을 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원정대는 다들 환호성을 내지르며 황금을 수집하고들 있었다.
롤랑을 포함한 영웅들의 몫도 충분했다.
영웅들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분할 만치 많은 몫을 분배받았다. 보어조아와 아이스피시, 두 사령관이 직접 그리 양보했기에.
그리하여 모두들 두둑이 황금을 얻었다. 이제는 이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갈 일만 남았지만 지휘관들은 걸어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짐도 많고 부상자가 너무 많습니다. 철군하는 동안 그들이 풍기는 피 비린내가 사방에서 괴물들을 꾀어낼 텐데요.”
보어조아의 말에 롤랑이 물었다.
“걸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어쩔 거요?”
“여기에 설치하려고 챙겨온 승강기들이 있습니다. 수는 넉넉하니 가능하면 이걸로 내려가고 싶은데······”
그 말에 롤랑은 의문을 표했다.
“승강기는 애초에 구멍이 있어야만 설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걸 왜 가져왔소?”
“오십 층에 구멍이 있었으니 백 층에도 있으리라 여겨서······”
“처음부터 백 층까지 전진할 작정이었다고?”
“그건 아닙니다마는, 도중에 백 층까지 갈 것이 보인 순간 추가 보급을 통해 챙겨오게 했지요.”
롤랑으로서는 그 설명이 그저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애초에 오십 층에 구멍이 있다는 이유로 백 층에도 구멍이 있으리란 추측은 어떻게 내린 것인가? 오십의 배수 층이라서?
터무니없는 낙관론. 역시나 이들이 백 층까지 온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롤랑이 말했다.
“어찌어찌 구멍은 났군그래. 그렇다면 승강기, 설치할 수 있겠소?”
그러나 곧 병사들에게서 용의 불꽃이 뚫어낸 구멍에는 승강기를 설치할 수 없으리라는 보고가 돌아왔다.
“당연히 백 층에서 일 층까지 곧바로 승강기를 내리기는 불가능합니다. 승강기를 내린다 해도 이미 개척된 오십 층 절벽에다 닿도록 해야 할 텐데, 구멍과 그 절벽의 위치가 달라서······”
지휘관들이 한숨 쉬는 가운데 롤랑이 물었다.
“어느 위치에 구멍이 났다면 설치할 수 있겠나?”
다름아닌 영웅의 질문이었다. 병사는 긴장한 채로 어느 지점을 말해주었다.
롤랑은 무리를 이끌고 그 방향으로 향했다.
스스로에게 축복을 걸고, 성검을 쥔 채.
이내 병사가 말한 지점 앞에 섰을 때 롤랑은 그 위치를 가로막은 벽에다 성검을 겨누었다. 성검에서 태양빛이 발해진 순간, 그것을 휘둘렀다.
이내 세계수의 벽이 녹아내렸다.
그리 칼질을 반복했다. 이내 롤랑은 벽에다 큼지막한 구멍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인부들도 거들어준 끝에 비로소 새로운 출구가 생겼다.
모두들 탄성을 내지르며 뚫린 세계수의 바깥으로 나섰다. 이 높은 곳의 공기는 차갑고 희박했다.
모두들 바닥을 내려 보지 않고자 애를 썼다. 아말릭이 중얼거렸다.
“끔찍이도 높군요······. 이곳에다 설치 작업을 해야 할 인부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동감이오.”
한편 롤랑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계수의 가지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빛나는 광휘도.
저 광채는 별빛이 아니었다.
‘신성한 빛, 오딘이 보내는 구조신호······.’
롤랑의 옆에서 그 빛을 보던 모지가 입을 열었다.
“저기에 전쟁신이 있다고?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은 것 같군.”
“어떻게 알지?”
“어림짐작을 통한 계산이다. 사람 하나 크기에서 발하는 빛임을 감안할 때, 저 빛의 크기가 꽤나 크니까. 아마 오십 층 내로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에 롤랑은 비로소 희망이 생겼다. 비록 원하던 황금사과는 얻지 못했지만, 궁극의 목표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롤랑은 그 빛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인부들은 설치할 승강기의 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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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가 귀환했을 때, 비프로스트의 시민들은 그들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않았다.
사 분의 삼 이상 죽은 것이니 사실상 전멸이지만, 그 손실을 패배로 받아들이는 자조차 없었다.
모두들 그저 원정대가 가져온 황금에 매료되었고, 그 성과에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
물론 그 성과를 이루어낸 영웅들에게도.
영웅들은 시가행진의 선두였다. 그들의 위에서 발키리가 나는 가운데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롤랑 만세!”
롤랑으로서는 저 외침이 끔찍하게 듣기 괴로웠다.
롤랑은 흘긋 자신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롤랑을 추종하던 기사들은 많이도 살아남았다. 그 싸움 덕에 ‘레벨 업’까지 여럿 하고 황금까지 얻은 마당이니 그들로서는 모험의 성과를 제대로 거둔 셈이다.
하지만 부랑자 군대는 거의 다 죽었다. 백오십칠 명의 인원만이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이다. 태반이 사지가 멀쩡하지 못한 채로.
그것을 의도하고 데려간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역시 필요한 희생이었으려니 여길 수는 없었다.
행진을 마치고서 롤랑은 바로 저택에 돌아갔다.
닦을 갑옷은 사라졌으므로 몸만 씻고 나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후로 사흘 연속 앓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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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프로스트의 영주와 주교는 손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을 금하지 못했다.
비카파는 궤짝에 가득 담긴 금붙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말 기부하겠다고? 이걸 다 말이오?”
궤짝에다 금화들을 한 가득 담아주는 것은 비카파도 즐겨 쓰는 보상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금화들은 금 함유량이 적은 화폐였는데, 지금 저 궤짝의 금붙이들은 모두 순금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내민 기부자로서 롤랑이 말했다.
“순수한 기부는 아니오. 지원을 요청하는 기부지. 나와 함께 올라갔던 부랑자들, 그 가족들이 도시에 남아 있잖소? 이 재산을 써서 보살펴주시오. 영주로서.”
“그러고도 남을 금 같은데······.”
“충분히 성심껏 보살피라 이거요. 당신에게 불리한 제안은 아니지 않나? 설령 순수하게 자기 것이 아닌 금이라 해도, 은행가로서 현물이 수중에 들어와 나쁠 거 없지 않은가?”
“그렇지. 어찌 이쪽 사업의 생리를 아시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끊고 롤랑이 말했다.
“오스론에게도 같은 양의 황금을 내주었소. 그에게도 마찬가지 이유로 기부했지. 부랑자들의 유족을 보살펴달라고······. 그러니 당신의 부담은 절반이오. 그러고도 금이 남거든 당신이 가지든가 좋은 데 쓰든가 하시오. 다만 영주씩이나 되어 그 지원이 추기경보다 못하리라고는 믿지 않겠소.”
문득 주교가 성호를 긋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고결한 일입니다. 신들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
“아마도. 아무튼 믿겠소. 신들께서 지켜보시니, 신실하게 일을 처리해주시길.”
그리 당부하고서 롤랑은 성을 나섰다.
유족들을 위해 잔뜩 기부했음에도 롤랑의 황금은 충분했다. 그리 지불하고도 충분할 만치 많은 금이 저택 창고에 보관된 바였다.
목적이 재산축적이 아닌 만큼 순수하게 기뻐할 수는 없었지마는.
‘결국 황금사과는 얻지 못했다. 성검을 얻긴 했지만······.’
롤랑은 저택에 돌아와 자기 방에 들어섰다.
바로 예의 성검이 보였다.
성검은 저택의 대리석 바닥에 꽂혀있었다. 롤랑이 허리춤에서 풀어낸 순간 저절로 그리되었더랬다.
그리고 바로 뽑히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축복을 걸고서야 겨우 뽑아낼 수 있었다. 이 황당한 사실에 제이슨이 내놓은 추측은 다음과 같았다.
“뽑는 조건이 신성 ‘9’인 거 아닌가? 네 신성이 8이니까 축복으로 신성 1 오르면 뽑히는 거지.”
“그럴 듯한데?”
제이슨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서 너 이번 레벨 업으로 신성에 능력치 투자했다고? 아직 신성 9는 아니고 8이지? 능력치 8에서 9로 올리려면 능력점수 몇 투자해야 하던가?”
“6?”
“그럼 좀 더 레벨 업 해야 편하게 쓰겠네. 당분간은 축복 버프 끊이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못써먹겠고.”
시험해본 바로는 축복이 끊긴 순간 성검은 바로 무거워지더니,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불가사의한 인력으로 주변 바닥이나 바위에 박혀버리곤 했다. 그러지 않도록 안심하고 이 무기를 휘두르려면 좀 더 투자가 필요할 터였다.
문득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새삼 좆같네. 대체 게임에서 황금사과 왜 네가 먹지 않고 카를한테 준 거냐? 카를 그 새끼, 원래 신성 9였는데 네가 준 황금사과 먹어 신성 10이라고? 그게 가능한 수치인 줄도 몰랐네, 니미······. 그 쓸데없이 높은 능력치 실화냐? 방구석 현인신인 거야?”
*******
< 안속 - [6]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