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00화 (100/164)

< 안속 - [5] >

저들에게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우선은 칼부터.

‘갑옷과 칼집, 허리띠마저 죄 녹아버린 마당에 칼은 무사한가?’

다행히 발리사다는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도 모르가나가 주워준 모양이었다.

그것을 주워들며 롤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순 다른 물건이 뇌리를 스쳤다.

성검.

트랜스 상태에서 얻은 검이라 일순 남의 것처럼 여겨졌지만, 그래도 그것을 얻었다는 사실은 어찌어찌 기억해냈다. 그것은 어디에 있나?

혹시 용암에 묻혀버렸나 싶어 롤랑은 허겁지겁 주위를 살폈고 다행히 저 멀리서 바위에 박힌 검을 발견해냈다.

어째서 박혀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건 달려갔다.

칼자루를 쥐고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경직.

‘어?’

칼이 뽑혀나오지 않을뿐더러 손에 열까지 가해졌다. 마치 칼이 뽑혀나오길 거부하는 것처럼.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뽑으려면 무슨 조건이 있는 모양인데, 난쟁이의 창고 바닥에 박혀있을 때는 어찌 뽑았던가?

‘발키리가 축복해주었지 아마?’

그 상황을 재현해보았다. 자신에게 축복을 건 다음 다시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다시금 힘을 주었다. 역시나 쉬이 뽑혀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온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그제야 뽑혀나온 성검을 쥐고서 롤랑은 저 격전지를 향해 달렸다.

멀리서 볼 때는 아직 싸우고들 있는 줄 알았지만 접근해서 보니 아니었다. 모두들 그저 재난에서 피하고자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 피난처로 지붕이 있는 굴 만한 곳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안에 남겨진 자들은?

앤지의 얼굴을 떠올린 롤랑은 더욱 필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바깥부터 어두운 와중이었다. 당연히 굴속은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롤랑은 성검을 앞으로 내밀어 그 빛에 의지한 채 굴속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이 느껴졌다.

롤랑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굴 한 가운데에 거대한 윤곽들이 보였다. 대부분 주저앉아 쉬고들 있었다.

그들의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앉아있는 덩치들만 봐도 그들이 인간이 아닌 트롤들임을 알 수 있었다.

롤랑은 놈들을 향해 돌격하듯 달려 나갔다. 그러나 잔뜩 지쳤는지라 트롤들은 그 돌격에 너무나도 늦게 반응했다.

롤랑이 지척까지 다가온 그 순간까지 트롤들은 멀거니 있었다. 앉아서 쉬고 있던 트롤들은 몸도 일으키지 않았다.

트롤들이 고개만 겨우 돌렸을 때, 롤랑은 이미 칼을 휘두르려던 차였다.

그러나 그 목들을 베어내기에 앞서, 트롤들 뒤에 선 조그만 윤곽들이 보였다.

‘인간 어린애들?’

롤랑은 칼을 휘두르려다 말고 앞을 가로막은 트롤들을 뛰어넘었다. 급히 그곳으로 달려 나갔다.

“앤지!”

다행히 외침에 응답하여 익숙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기사님?”

앤지의 목소리였다.

롤랑은 그 앞에 다가갔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인간들이 보였다. 앤지와 종자들, 그리고 부상자들. 남겨진 약자들은 굴 한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해코지 당한 흔적은? 이 어두운 와중에는 쉬이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무사해 보였다.

롤랑은 안도하며 그들 앞을 가로막고 뒤돌아섰다.

어깨 위로 높이 든 성검이 빛을 발했다. 그 안면이 드러났다.

그제야 트롤들은 지금 들어온 자가 인간임을 알아챘다.

트롤들은 뒤늦게나마 일어나 각기 든 무기를 겨누었다. 그러나 바로 롤랑을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오늘 벌어진 전투는 정말 너무 오래 끌었다. 트롤들도 너무 지쳐있었다. 굴속에 이미 들어와 있던 조그만 것들을 상대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함께 주저앉았을 정도로.

심지어 몇몇은 이 인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한 트롤이 중얼거렸다.

“광전, 사?”

이 층의 주인, 악룡에게 달려들더니 살아 돌아왔나? 어떻게?

트롤들은 긴장하여 온몸이 굳었다. 몇몇 전사들이 위협하고자 함성만을 내질렀지만, 포효라기보다는 비명이나 신음에 가까울 만치 힘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롤랑 또한 저들에게 바로 달려들지 못했다. 뒤에 지켜야 할 자들이 있었고 저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양쪽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 채 노려보았다.

그러고 있는 차, 다른 자들도 굴속에 들어왔다. 도망쳐온 인간과 트롤들.

그들도 롤랑과 트롤들의 대치를 눈치 챘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합류하여 대치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젠장.’

롤랑은 속으로 신음하며 고함질렀다.

“롤랑이 말한다! 모두들! 모두 이 자리에서 나가라!”

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도 없다. 괜히 병장기를 휘둘렀다가는 동족을 해치고 말 테니까.

다들 쭈뼛거렸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그 말에 따랐다.

롤랑이 앤지와 그 무리를 보호하는 가운데 인간들은 굴 밖으로 나섰다. 트롤들은 긴장한 채 그들의 움직임을 경계했지만, 그렇다고 기습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굴 밖으로 나서자 세계수의 붕괴는 끝나 있었다.

불티야 아직 휘날리고 있었지만, 이제 천장에서 파편이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 군은 다시금 자기 진영에 뭉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발키리가 롤랑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발키리 밑의 제이슨, 그리고 그가 이끄는 인간 군대 모두 굴 앞으로 다가왔다.

롤랑을 바라본 제이슨이 소리쳤다.

“야, 모지는!”

롤랑은 제이슨 옆에 선 모지를 바라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전사했다.”

“씹할······.”

제이슨은 순간 외칠 뻔했다. 분신을 대신 보내지 왜 자기가 거기 가고 자빠졌느냐고. 그러나 그 분신이 옆에 있었기에 불평은 입속으로 삼켰다.

분노의 화살을 롤랑에게 돌리려던 것도 그만두었다. 롤랑의 강인한 근육질 몸, 그저 보기만 해도 힘이 넘쳐흘렀던 그 몸에 지금 생기가 전혀 없었다. 옷은커녕 갑옷의 조각만 그 몸에 겨우 붙어있는 마당이었다.

저 용과의 싸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저 역시 죽을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이제 제이슨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제이슨이 입 다문 가운데 롤랑이 경고했다.

“저 굴 안에 트롤들이 남아있다.”

“매복?”

“그건 아니고. 백 놈 넘게 들어가 있어.”

그 말에 제이슨이 지시했다.

“그럼······ 다들 무기 들어.”

어째서인지 뒤따라온 인간 병사들은 그 말에 따랐다. 모두들 무기를 들고 경계를 취했다.

바깥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굴속에서 트롤들이 나왔다.

“아르, 테미스·······”

트롤들은 바깥에 몰려든 인간 병력을 보고 움츠러들며 뒷걸음질 쳤다.

“다 죽······”

제이슨의 외침에 롤랑이 끼어들었다.

“잠깐.”

“뭐?”

롤랑은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트롤들도 오고 있다.”

그 말대로 트롤 무리 또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돌격할 기운도 없는지 천천히.

제이슨은 일순 생각했다. 저들 무리가 오기 전에 여기 남은 트롤들이라도 미리 죽여 그 수를 줄여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러나 결국 이대로 싸운다면 적의 수를 줄이든 말든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자각했다.

용의 불꽃은 원정대의 벙력을 많이도 태워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구원이었다. 그 상태로 트롤들에게 둘러싸인 채 계속 싸웠더라면 더 오래 싸웠겠지만, 결국 다 죽었을 테니까.

아까 그 전투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인간보다 세 배 이상 강한 괴물 군대에게 포위당한 상황이라니? 어찌 분전한들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포위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고작이었으리라.

게다가 이미 다들 지쳤다. 더 싸울 수도, 싸워서도 안 되었다.

결국 트롤들이 다가올 동안 인간들은 굴 입구에 선 트롤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마침내 트롤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병력도 확연히 줄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규모였다.

이내 아까 굴속에서의 대치가 재현되었다. 다만 훨씬 더 큰 규모로, 양 종족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로를 향한 욕설과 도발 따위는 없었다. 지금 깔린 침묵이 롤랑으로서는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문득 제이슨의 뒤에 선 보어조아와 아이스피시가 보였다. 가장 강대한 지휘관들.

그들을 향해 롤랑이 물었다.

“어쩔 거요?”

먼저 대답한 것은 보어조아였다.

“저는······ 결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영웅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뒤이어 아이스피시도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 말에 롤랑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영웅들의 뜻에 따른다니? 영웅들이 알아서 하란 말인가?

이렇듯 자기네 임무를 방기한 마당에 보어조아는 스스로가 꽤나 훌륭한 결정을 내렸노라 느끼는 모양새였다. 그 입가에 미소조차 감돌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것을 롤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만 해도 정체까지 의심하고 난리를 피우더니 갑자기 뜻에 따르긴 뭘 따라? 미쳤나? 가뜩이나 아이스피시 저 작자는 우릴 실제 영웅이라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언뜻 보니 아이스피시의 안면에는 기력이 없었다. 모든 것을 내던진 얼굴이었다.

지휘관으로서 아이스피시는 끝장난 마당이었기에.

아이스피시의 병력이 유독 많이 죽었다. 그들에게 용의 불꽃이 직격했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스피시 휘하의 병력은 일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군으로서는 거의 전멸이라 판단해야 할 지경이었다······.

“우리에게 당신네 군의 운명을 맡기겠단 말인가? 정말인가?”

롤랑이 확인 차 물었고 보어조아가 대답했다.

“예, 부탁드립니다.”

아이스피시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듯 두 지휘관은 자기네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영웅들이 나서야 했다. 이 상황에 롤랑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지만 행동조차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옷 좀 빌려주시오. 벌거벗은 채 나설 수는 없으니.”

그 말에 따라 지휘관들이 자기네 외투를 벗어 롤랑에게 빌려주었다.

그리 복장을 갖추고서 롤랑은 양 옆에 두 동료, 모지와 제이슨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섰다.

롤랑이 외쳤다.

“오딘의 대전사, 롤랑이 원정대를 대표하여 협상을 요청한다!”

그리고 트롤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이내 몇몇 트롤들이 다가왔다. 화려한 복장으로 보아 지도자쯤 되는 자들이었다.

“뭐, 냐. 광전사.”

트롤 추장의 물음에 롤랑이 대답했다.

“휴전을 원한다.”

“일시적인, 전투중지? 언제까지.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싸우자는 건가?”

내일 다시 싸우자니? 롤랑은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다.

트롤들의 수도 잔뜩 줄었지만 원정대의 수는 더욱 줄었다. 전투를 내일로 미뤄봤자 그것은 전멸을 미루는 것에 불과했다.

롤랑이 말했다.

“더 긴 휴전을 원한다.”

“어처구니가, 없군.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하고 요구하는가?”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롤랑은 애써 모른 척 물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더 긴 휴전이라 했나? 풀이하자면, 너희 군대가 다시 제 땅으로 돌아가, 보급하고, 휴식하고 새로운 병력을 보충하고 나서야 다시 싸우길 원한단 뜻 아닌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겠나?”

“이로움을 원한다면 주겠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아라.”

트롤들은 인질이나 식량, 혹은 몸값 따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평화다.”

“평화?”

물론 트롤은 평화주의자로서 그리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장 몰려온 이 침입자들을 제거해야만 이루어질 것이다. 이후로 후환이 없으려면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해.”

결국 트롤들은 이 원정대를 다 몰아붙이기를 원했다. 그래야 훗날 안심하고서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므로.

사실이 그러했다. 롤랑도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몰려온 침입자들을 전멸시킬 기회를 놓치는 것은 저쪽에게 결코 이롭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볼 때 롤랑은 저들에게 제대로 된 협상조건을 내걸 수 없었다. 결국 롤랑은 논리적으로 굴기를 포기했다.

롤랑은 광전사로서 말했다.

“쉽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나는 저기 웅크려 있던 용을 죽이고 온 참이다! 불을 뿜던 용!”

한 트롤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죽였다고?”

“끔찍하게 고생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더군! 기적과 신들의 가호가 있었던 덕분이다! 얼핏 승산이 없어보였지만 달려들었다! 그리고 죽였다! 원한다면 너희를 상대로도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승리할 것이다!”

“결국 네놈도, 너희가 이대로는 불리하다 생각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대로는 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리 전멸한들 끝이라 생각하는가?”

롤랑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트롤 호위병들은 바로 경계를 취하며 창을 찌르려 했다.

“정지하라. 더 다가온다면······”

“찌를 텐가? 찔러봐라! 그 무기를 시험해 봐!”

그러면서 롤랑이 계속 달려들자 호위병들이 위협 차 창을 뻗어왔다. 롤랑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결국 창이 그 몸에 찔러왔지만 그 창날은 외투만 조금 뚫었을 뿐, 그 피부를 뚫지는 못했다. 어안이 벙벙한 트롤들에게 롤랑은 외쳤다.

“더 찔러봐라, 더!”

그리 말하면서 한 발짝 더 내딛었다. 어쩔 수 없이 두 트롤이 창을 찔러왔고 한 창날은 롤랑의 목에 닿았다. 그러나 그 창날은 뚫을 옷조차 없었기에 아무런 소득 없이 튕겨나갔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은 몸으로 롤랑이 외쳤다.

“더 찌를 텐가! 그래보아라! 어차피 너희는 날 죽이지 못한다!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뿌리를 뽑느니 뭐니 그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나 하나 죽일 수 없는 것처럼 너희는 결국 우리를 전멸시킬 수 없을 것이며, 살아 돌아간다면 우리는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돌아올 것이다! 더 많은 병력과, 더 날카로운 칼로 무장하고서 돌아올 거라고!”

호위병들 뒤에 서있던 트롤 추장은 조금 뜸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 서?”

“그러지 않으려면, 휴전에 응하라. 휴전의 기한은 우리뿐만 아니라 너희들에게도 이롭도록 길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영구적인 휴전을 원한다. 더 나아가서는 정전을.”

< 안속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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