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속 - [4] >
바위산은 이내 산의 형체를 잃고 용암이 되어 흘렀다. 거기 있던 난쟁이의 동굴, 그 아래 쌓여있던 황금마저 함께 녹아내렸다.
원래부터 라인 강은 난쟁이의 보물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가끔 보물고에서 몇몇 보물이 강물에 떨어져 흐른바 축적된 것이 라인 강의 황금들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모든 황금이 녹아 강을 통해 흘러내렸다.
이내 라인 강은 녹아내린 황금으로 뒤덮여 나갔다.
그 황금물결에 휘말린 수초며 물고기는 모조리 물속에서 익어버렸다.
님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터였다. 얼른 강물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라인 처녀들은 그러지 않고 강물에 잠겨 있었다.
님프들은 강물 속에서 전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용의 불꽃이 세계수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리하여 그 바깥의 공기와 함께 위성의 빛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달빛.
라인 처녀들, 한때 아르테미스의 사제였던 님프들은 구멍 너머로 내다보이는 보름달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사방에 화살이 쏟아져 내리는 와중에도 요정들은 강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넋을 잃은 채 달빛에 몸을 맡겼다.
마침내 황금의 물결이 요정들을 휩쓸었다. 그 뜨거운 황금 물은 요정들을 감싸고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 안에서 요정의 몸은 순식간에 익어 내렸다. 그리 삶아져 죽는 순간에도 라인 처녀들의 시선은 저 바깥의 달을 향해있었다.
이내 라인 처녀들의 시체는 강을 따라 흘러가다가 이내 그 너머의 구멍으로 사라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 강물을 따라 흐르던 황금은 흐르다 말고 굳었다. 그리하여 라인 강은 여전히 황금색인 채 고여 호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한편 트롤들은 자기네 사제들의 안위를 신경 쓸 상황이 못 되었다.
트롤들 위로 세계수의 벽을 이루고 있던 껍질과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피해 달아나느라 바쁜 와중에도 맞아 죽는 트롤들이 속출했다.
물론 재앙은 인간들을 상대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양 군대의 위로 세계수의 파편들이 떨어져내렸다.
이제 양 군은 싸울 틈이 없었다. 옆에서 달리는 것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신경 쓰지 않고 모두들 미친 듯이 달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벗어나고자.
게다가 방금 전 용의 불꽃이 양군의 절반을 불살라버린 마당이었다. 모두 공황상태에 빠질 만했고 실제 그러했다.
심지어 제이슨마저도 겁에 질려 반쯤 미쳐 있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겁먹은 와중에도 목청껏 소리 질렀다. 원체 그런 성격이었으므로.
“따라와!”
제이슨이 어디서 외치는지 알아듣기란 어렵지 않았다. 발키리가 그 위를 날고 있었으므로.
인간들은 그저 그 천사를 따라 달리면 되었다.
그리하여 양 군은 흩어졌고, 싸움은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다행이라고 안도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상자를 내고서.
*******
까마귀는 투명한 채 아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서진 황금 투구가 그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난쟁이의 보물을 노리지 않겠노라 서약한 마당이라 멀쩡하더라도 넘볼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까마귀는 실망했다.
가장 위대한 변신도구가 지금 파괴된 것이다. 변신술사로서 애석해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까마귀는 투구에서 관심을 돌려 그 옆 시체를 바라보았다.
까맣게 탄 시체 형상의 숯덩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정말이지 형체만 겨우 남아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바위산은 물론 세계수 일부까지 불살라버린 화염이 살덩어리로 된 육체를 그 흔적이나마 남겨놓다니.
‘하기야 수르트한테 죽은 후에도 그 시체가 나름 온전했던가.’
사실 형상이 남았든 말든 저 시체는 그대로 용암에 흘러가 자취를 감출 운명이었다.
그러나 흘러가던 이 시체를 까마귀가 건져내었다. 타른헬름의 잔해와 함께. 결국 건져낸 둘 모두 못쓰게 된 셈이었다.
이내 그녀는 까마귀의 모습을 버리고 여인의 형상을 취했다.
모르가나는 주변이 온통 달궈진 와중에도 맨발로 사뿐사뿐 걸어와 시체 앞에 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한숨 쉬었다. 그러고는 시체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이내 모르가나의 등 부위 옷이 찢어지더니, 그 위로 한 쌍의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발키리로서의 날개.
모르가나가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땅바닥에 던지자 그것은 기다란 룬 창이 되었다.
이 역시 발키리일 적에 쓰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모르가나는 전 발키리로서 당연히 신성한 주문도 쓸 줄 알았다.
모르가나 천사는 시체에 대고 기도했다.
오딘을 향한 기도였다.
원래라면 모르가나는 그 역겨운 늙은이에게 기도 따위 아첨은 하지 않을 터요, 오딘 또한 그 기도에 응해주지 않을 테지만 지금만은 예외였다. 이 시체는 오딘과 모르가나 모두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곧 시체에 회색빛이 번졌다.
그리 소생 주문은 성공했지만 모르가나는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저 시체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신들조차 살려낼 수 없을 법했으므로. 지금은 그저 시도라도 해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시체에 살이 돋아났다.
그 현상을 모르가나는 크게 뜬 눈으로 지켜보았다.
시체에 살이 돋아나고, 근육이 돋아났다. 까맣게 탄 뼈가 굳어져갔다. 그것은 회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창조에 가까웠다.
‘저게 살아나? 어떻게?’
자신의 주문이 일으킨 현상임에도 모르가나는 일순 이 현상에 놀라버렸다.
이내 그 손가락마저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하여 모르가나는 방금까지 재에 덮여있던 황금 반지를 볼 수 있었다.
니벨룽의 반지. 모르가나는 거기 속박된 울부짖는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전 발키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아, 영혼이 단단히 고정되었나.’
과연 신들마저 탐낼 만한 보물이 아닌가.
일순 그 반지를 시체의 손가락에서 뽑아내고 싶은 충동이 덮쳐왔지만 모르가나는 애써 참아내었다.
오래된 마녀로서 모르가나는 수많은 미신과 전설들을 믿었다. 마찬가지로 저 황금 반지의 저주를 믿었다.
반지의 소유자는 필히 파멸하리라는 저주를.
그러니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리 결정한 이후로도 침이 꿀떡 삼켜지는 등 유혹을 참아내기 힘들었지마는.
모르가나는 애써 시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새 시체에는 피부가 생겨나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칼과 수염까지 재생하는 것을 보며 모르가나는 혀를 찼다.
마침내 시체는 롤랑의 모습으로 화했다.
모르가나는 롤랑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맥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소리가 워낙 작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살아나려면 도움이 더 필요할 터였다.
모르가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이 쌍놈이 감히 몸값을 요구했던가?’
그렇다면 도움도 줄 겸, 지금 줘버리기로 했다.
모르가나는 아까 까마귀의 모습으로 악룡과 광전사들의 전투 아닌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악룡의 눈이 터져 내린 순간, 그 흘러내린 피를 수집해두었다.
몸속 주머니에 말이다. 변신술사로서 가능한 재주였다.
이내 모르가나가 롤랑의 입에 자기 입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체내에 넣어두었던 그 피를 흘려보냈다.
악룡의 피에 깃든 마법의 힘은 모르가나가 외부와 잘 차단해두었기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마법적인 재생에도 충분히 도움이 될 만큼.
이내 롤랑의 심장박동은 더욱 커졌다.
*******
오딘이 치하했다.
“장하다, 나의 대전사여. 그 지긋지긋한 난쟁이를 끝내주었구나. 그리고 그 투구도······. 사실 그것은 좀 아쉬운 일이다.”
“정말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여!”
롤랑이 죄를 청하자 오딘은 머리 하나 움직이기 힘든 와중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되었다. 그보다 네 몸을 돌려놓도록 하자. 용의 피가 새로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미 그 피가 피부를 충분히 적신 마당이니 이제 충분히 가호를 내려줄 만하다. 우선은 약속했던 가호를.”
롤랑이 등을 돌리자 통증이 덮쳐오더니, 그 피부에 새로운 룬이 새겨졌다.
불가침의 가호.
옛날 영웅 지크프리트에게도 새겨주었던 가호였다. 사실 불가침이라 한들 정말 모든 것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창칼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여!”
“감사는 이르다. 아직 선물은 끝이 아니지. 네가 보내준 영혼은 또 다른 룬을 빚어낼 수 있을 양이었다. 새로이 선물을 주마. 어떤 가호를 원하지?”
롤랑은 조금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영혼에 보강을······”
“신성? 좋아. 마땅히 주리라.”
또 다른 룬이 그 몸에 새겨지며 롤랑은 비명을 참아내느라 애썼다. 이내 선물이 끝나자 롤랑은 다시 등을 돌려 오딘에게 깊이 절했다.
“은혜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주여!”
“되었다. 되었어. 마땅히 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뿐이다. 그리고······ 이제 나도 선물 하나를 받을 수 있을까, 롤랑?”
오딘의 시선은 롤랑의 손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손가락을.
롤랑도 그 시선을 눈치 챘다. 롤랑의 그 눈길이 자기 손의 반지를 향한 순간 오딘은 애가 탔다.
과연 줄까, 주지 않을까······.
이미 호쾌하게도 주겠노라 확언한 마당이지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오딘이 저 입장이라면 결코 주지 않을 것이었기에.
그러나 롤랑은 반지를 뽑아내더니, 제 손바닥에 올려 내밀고는 정중히 말했다.
“바라신다면 당연히 제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주여.”
오딘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흥분, 감격, 회한 등이 뒤섞여 그 머리에서 소용돌이쳤다. 오딘은 그 모든 몸떨림을 이겨내고는 겨우 입술을 떼었다.
“이걸 받은 마당에 더 요구하기는 염치없겠으나 그래도 한 가지 더 부탁해야겠구나. 그것을 내 손에 끼워 주어라, 롤랑.”
롤랑은 즉시 그 말대로 따랐다. 무릎 꿇은 채 조심스럽게 반지를 오딘의 주름진 손가락에다 끼웠다.
그 순간 오딘은 온몸에 감도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온전해지는 힘.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딘은 온몸을 뒤척여보았다. 그러자 그 목을 매단 끈이 더욱 조였기에 오딘은 컥컥거려야 했다.
롤랑이 놀라 비명 지르자 오딘은 겨우 진정시켰다.
“되었다. 별 일 아니야. 풀려나고자 발버둥칠 때마다 언제나 있던 일이니. 그보다는 감사를 표하마. 지극한 감사를. 이 오랜 세월 이토록 근사한 선물은 받아보지 못했다.”
롤랑이 흐느끼는 동안 오딘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반지가 있다 하여 당장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만, 그러기 위한 단계를 밟을 수는 있게 되었다. 잔재주라도 부릴 수 있게 되었어. 보아라.”
오딘이 반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반지에 깃든 룬이 황홀한 빛을 뿜었다.
신성한 빛. 거기 매료된 롤랑이 멍하니 있는 와중에도 오딘의 몸은 계속해서 광채를 발했다. 그 광채는 계속해서 더욱 강렬해졌다.
빛 속에서 오딘이 말했다.
“이 빛은 지상에서도 보일 것이다. 순수한 영혼의 빛이므로. 보고자 한다면 보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이 빛나는 곳에 내가 묶여있을 것이다. 빛을 따라와라. 그리고 구해다오. 그것으로 네가 내게 베풀 수 있는 은혜는 정점에 달할 것이라.”
빛 속에서 롤랑의 시야가 흔들렸다. 이내 롤랑은 이 세계에서 벗어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
“억······”
롤랑이 상반신을 일으킨 순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명예로우신 강도 기사 나리?”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니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 있었다. 검은 머리칼, 그리고 등 뒤 검은 날개가 인상적인 여인.
당연히도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롤랑은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여인은 자신을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온몸이 아픈 와중에도 롤랑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여인은 앞머리만 남아있고 그 뒤의 머리는 없었다. 두드러지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었는데, 그 특징은 무슨 책에서 본 것 같았다.
게다가 방금 뭐라 했나? 강도 기사? 자신을 그리 부를 여자라면······.
“모르가나?”
롤랑이 힘겹게 묻자 모르가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뭔데?”
“지금 뭔······ 당신이 왜 지금?”
“몸값 지불했노라 알리려고. 내 기꺼이 주었어. 여인네한테 몸값 받아서 이제 좀 만족스러우신가요, 강도 기사 나리?”
몸값? 용의 피?
모르가나가 단순 그것만 준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을 롤랑은 곧 눈치 챘다.
분명 자신은 무사하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분명 한 번 더 죽은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 뭔가 해줄 만한 사람은 근처에 저 여자뿐이엇다.
“그대가 날 구해준 게요?”
모르가나는 허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대답하지 않고 이내 까마귀의 모습으로 화하더니 투명해졌고,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주변에는 황금 투구의 잔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롤랑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악룡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너머에서는 난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뭔가가 잔뜩 떨어지고 사람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마치 종말의 현장 같은 광경을 보며 롤랑은 몸을 일으켰다.
< 안속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