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속 - [2] >
방금 전까지는 이 통로 전체가 그 전진을 방해해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저 온통 미친 듯이 흔들릴 뿐, 나아가기는 문제가 없었다.
광전사는 달렸다.
계속 달리다 보니 금세 벽이 가로막았다. 고기로 된 벽. 당연히 저 너머는 살로 꽉 차있을 것이다.
그 모두를 다 찢어가며 나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으니.
그러나 광전사는 살보다 피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코와 귀가 저 벽 너머에서 흐르는 피의 강을 감지했다.
광전사는 언제나 적의 피를 탐했다.
“아아아, 아으으으아아아아아!”
광전사는 양 손에 든 칼을 마구 휘저었다. 얼핏 보면 그저 온힘을 다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도 지금 그 동작은 기술적이었다. 발리사다로는 그 살을 도려내고, 성검으로는 그리 잘라낸 부위를 찢어서 밖으로 빼냈다.
팔이 저릿해질 만치 필사적으로 칼을 움직였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산소가 그 팔에서 거의 다 빠져나갈 때가지.
끝내 저 앞에 보랏빛 무언가가 드러났다.
그것이 혈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힘들었다. 언뜻 드러난 부분만 봐서는 그저 좀 다른 살로만 보였으니.
그러나 광전사는 이내 거기에도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폭포.
구멍이 뚫린 혈관에서 대포와 같은 피분수가 분출되었다.
그 피 분수에 얻어맞은 광전사의 어깨가 욱신거렸다. 어마어마한 압력이었다.
당연히 저 혈관 속 피의 강은 더 강한 압력 속에 흐를 터였다. 그 안에 갇히고서 몸뚱이가 무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급박한 와중에도 광전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트랜스 상태에 빠진 지 너무 오래되었다. 슬슬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모지의 죽음도 다시금 떠올랐다. 광전사는 문득 그가 발할라에 돌아갈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았다.
가능성은 희박했다. 지금 죽은 모지는 발할라에 갈 수 없었으리라. 이유는 설명할 수 없어도 왠지 그러리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내가 죽으면?’
이성이 동반해온 고통과 공포가 그 몸을 굳게 하려던 찰나였다. 공포 위로 슬픔이, 슬픔 위로 분노가 떠올랐다.
함께해온 동료가 죽었다.
롤랑은 성검을 꽉 쥐었다. 방금까지는 조명조차 제공해주지 못하던 그 태양빛이 일순 강렬하게 발산되어 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거기서 뿜어진 열기는 단순히 온도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깃든 마법적인 힘이 주변 공간을 잠식했다. 치유를 방해하는 힘.
피를 뿜어내던 혈관의 상처는 점차 그 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벌어져갔다.
이내 혈관의 구멍은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치 확장되었다.
피범벅이 된 채 롤랑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피의 강이 롤랑의 몸을 집어삼켰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압박되었다.
그 강렬한 혈류(血流)에 몸을 맡기면서 롤랑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일단 그쪽으로 몸이 옮겨지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 전에 곧 죽을 것 같기는 했지만.
이 핏속에서 질식하지 않는 것은 성검이 가호하는 덕일까?
애초에 숨 막혀 죽기 전에 온몸이 찌그러져 죽을 것 같았다. 온몸으로 가해지는 압박에 그 눈이 반쯤 빠져나왔다.
체내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롤랑은 입을 벌렸다.
이내 그 입안으로 피가 들이닥쳤다. 온몸이 그 피에 절여지는 가운데 그 코와 입 주변에서 기포만 피어올랐다.
롤랑은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여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빠져나오려던 안구를 어떻게든 다시 쑤셔 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눈이 감긴 순간,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
“용의 피. 바로 그것이다. 강력한 용의 피가 네 원래 몸을 돌려줄 것이다, 롤랑.”
오딘의 말씀에 롤랑은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몸에 묻은 피가 저 분께 닿지 않도록.
오딘이 말했다.
“내 너에게 축복을 내려 주리라.”
그 선언과 함께 롤랑의 몸에 묻어있던 피가 그 피부로 스며들었다. 이내 롤랑의 몸은 원래 색상을 되찾았다. 이제 그 갑옷만이 피로 젖어 붉었다.
롤랑은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원래의 힘이 돌아왔습니다!”
롤랑이 감격을 표하는 가운데 오딘은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영구적이진 않으리라. 제대로 축복을 내리려면 그 피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함께 빚어야 하는 법이다. 방금 내린 축복이 영원하도록 하려면 용을 죽여야 해. 그럴 수 있겠느냐?”
“물론 기꺼이 그리하겠나이다. 주여.”
“그럼 용을 죽이는 일이 끝나면 제대로 된 선물을 주리라. 그때가 되면, 선물의 대가로는 아니겠다만······ 그 반지.”
오딘은 지금 롤랑이 낀 황금 반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을 내게 줄 수 있겠느냐?”
그 말은 위대한 주신답지 않게도 조심스러웠다. 오래 전 오딘은 자기 혈육이었던 영웅에게 같은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에는 복수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처지였고 말이다.
그러나 롤랑은 쉽게도 대답했다.
“물론 기꺼이 드리겠나이다! 제가 가진 것이라면 뭐든!”
그리고 오딘은 웃었다. 삐죽 내민 혀를 흔들며 말했다.
“그 대신 내가 주어야 할 대가는?”
“필요하지 않나이다!”
그 대답에 오딘은 이제 소리를 내어 웃었다.
목이 메여 큰 소리를 내기만 해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지만 이 순간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체통 따윈 집어던진 광소. 그 웃음소리는 이 텅 빈 하늘을 꽉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잦아들었다.
이내 오딘이 말했다.
“대가! 만물에는 대가가 따라야 해! 네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가 줄 것이다!”
“아, 주여······.”
“그래, 롤랑! 내 대전사여! 지금은 떠나라! 그리고 다시 만나자, 네가 저 머저리 난쟁이를 해치운 뒤에!”
오딘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도 광소였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든 오딘이 광기의 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우칠 만한 광소.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며 롤랑은 오딘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
눈을 뜬 롤랑은 온몸에 전해지는 압박이 확연히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여전히 공기는 부족했고 부자유스러웠지만 그래도 당장 온몸이 찌그러질 것 같지는 않게 되었다.
당장에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리 떠내려가며 롤랑이 추측하기로, 지금 용의 피는 역류 중이었다. 역류의 이유는 아마 과도한 흥분 때문이거나 다른 이해 못할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쨌건 계속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하여 롤랑은 피의 흐름이 늦춰졌을 때 주저 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리 혈관에다 구멍을 내고는 다시금 살덩어리에 몸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살에다 굴을 파냈다.
이제 그 작업속도는 아까보다 확연히 느려졌다. 지금 롤랑은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와 온몸의 고통에 절었고, 이미 지칠 대로 너무 지쳤다.
하지만 입 다물고 아까 했던 작업을 반복했다. 살을 자르고, 파내고.
칼질 한 번마다 헛구역질 하며 롤랑은 다시 광폭화를 할까 생각했다. 다시 광기에 몸을 맡기면 낫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러나 본능에 몸을 맡기기 전, 겨우 돌아온 이성을 써먹고자 노력해보았다.
롤랑은 성검을 조명처럼 비춰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용의 심장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물론 보더라도 알 수 없었다. 설령 수의사인들 용의 체내를 알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래도 최소한 실마리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필사적으로 살폈다.
그 수색 끝에 그나마 한쪽 살의 빛깔이 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눈의 착각일 수도, 심장과는 아무 상관없을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롤랑은 이내 그쪽으로 돌격했다. 물론 가로막은 살을 마구 파내는 작업을 통해서.
그리 또 지겨운 시간이 흘렀다.
롤랑이 거의 기진맥진하여 이제야말로 오딘의 이름을 부르짖으려던 즈음이었다.
파낸 굴에서 거대한 혈관이 드러났다.
‘동맥?’
이제는 뭐든 상관없었다. 롤랑은 그것을 추적 하여 굴을 파냈다.
그리하여 웬 공동을 발견했다.
‘몸속에 빈 공간이라니?’
대체 뭔지 싶었지만 롤랑은 한 발짝 내딛었다.
그 발밑이 텅 비어있었다.
순간 미끄러져 떨어져 내릴 뻔했다. 롤랑은 가쁜 숨을 삼키며 성검을 밑으로 내려 미약한 빛이나마 비추어 보았다.
앞뿐만 아니라 아래도 비어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롤랑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그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낙하한 롤랑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발밑은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이제 정말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롤랑은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
악룡 안드바리는 이제 반쯤 미쳐버렸다. 도저히 몸속의 이물감을 견딜 수 없었다.
몸 안으로 침입해온 기생충이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그 기생충은 악의를 가지고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악룡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 기생충의 정체가 짐작되었기에.
마침내 주변의 광전사들은 전멸했다. 눈을 공격하던 놈들은 죄다 불타 죽어버렸고, 나머지는 그저 용이 몸만 꿈틀거려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죄 죽어나갔다.
그러나 정작 그 시체 중에서 롤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물감은 커지다 못해 몸속 한구석에서 춤추고 있었다.
악룡은 숨을 헐떡이며 타른헬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 정신 나간 기생충이 대체 어디까지 침입해왔나 그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
찾아내기 어렵지 않았다. 타른헬름 주변으로 시선을 뻗치니 바로 발견되었다. 그 사실에 악룡은 비명 질렀다.
기생충이, 그놈의 기사가 보였다.
타른헬름 바로 앞에서. 타른헬름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안 돼!”
놈을 막으려면 어째야 하는가?
몸속에 거대한 살덩이 괴물이라도 만들어내? 아니면 거인이라도 만들어내어 놈을 막게 할까?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별 재미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저놈은 거인을 마치 어린애처럼 죽이던 놈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어느 적을 내놓아야 놈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악룡은 불안감에 미쳐 그 거대한 뇌를 회전시켜 보았다. 오나추스, 날개호랑이 등등 온갖 강력한 적들이 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영 믿음직하지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아.’
문득 악룡은 그 광전사가 결코 해치지 못할 적을 생각해냈다.
비단 놈뿐만 아니라, 오딘의 광전사라면 절대 해치우지 못할 적을.
이내 악룡은 타른헬름에 대고 빌었다. 자신이 상상해낸 적을 구현해내라고.
이내 살덩어리가 변해가며 그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
갑자기 저 너머에서 황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롤랑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가 치웠다. 그리하여 눈에 들어온 장면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롤랑은 눈앞에 나타난 노인을 바라보았다. 저 뒤에서 뿜어져나오는 빛 덕분에 그 노인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챙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말했다.
“롤랑, 기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로소 네가 내게 당도했구나.”
롤랑은 중얼거렸다.
“오딘?”
오딘의 모습을 한 노인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바로 네 주인이다. 롤랑.”
물론 이 오딘은 악룡의 작품이었다. 악룡의 기억에 힘입어 타른헬름은 거의 완벽하게 오딘의 말투와 모습을 재현해내었다.
비록 방금 전까지는 살덩어리였던 조각상이나마, 이 조각상은 완벽한 오딘의 신상이었다. 그 사실에 악룡은 자신감을 가졌다.
물론 뜬금없이 실종된 신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충분히 의심스럽겠지만 그런들 저놈이 뭘 어쩌랴?
지금 악룡이 제 몸에 만들어낸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오딘의 신상이었다. 그것을 오딘의 광신자가 어찌 감히 부수랴?
악룡이 오딘의 얼굴로나마 빙긋 웃는 차, 롤랑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다른데.”
그 말에 악룡과 오딘은 그 표정이 굳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린가? 분명 목소리도 완벽하게 구현했는데?
사실 그 목소리는 완벽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오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롤랑이 듣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롤랑이 기억하는 오딘의 목소리는 잔뜩 쉰, 목이 졸린 노인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목 매인 그 목소리만을 들어왔기에.
반면 악룡이 기억하는 오딘의 목소리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쟁신의 목소리였다.
두 목소리는 흡사하면서도 분명하게 달랐다.
악룡은 혹시 무슨 실수가 있었나 싶어 불안해졌지만 이내 그 불안을 덮으려는 듯 호통 쳤다.
“왜, 오랜만에 듣는 네 주인의 목소리가 듣기 싫더냐? 입 닥쳤으면 좋겠다고? 나, 시를 읊는 자 오딘의 목소리가 그리도 역겹단 말인가? 이 불경한 놈이! 용서받고 싶다면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 죄를 청해야 할 것이다!”
그 오만하고 만물이 자신에게 복종해 마땅하리라는 태도 또한 완벽히 오딘의 것이었다. 난쟁이가 기억하던 전쟁신은 늘 그러했다.
그러나 롤랑이 기억하는 오딘은 그렇지 않았다. 그 가엾은 노인은 목 매인 와중에도 품위 있었으나, 저따위로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 노인은 롤랑에게 언제나 은근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해왔더랬다.
도저히 착오할 수 없었다.
이내 롤랑은 성검을 뽑아들었다. 그람을. 노퉁이라고도, 발뭉이라고도 하는 그 성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눈앞의 오딘은 공포와 분노로 고함질렀다.
“어느 안전이라고 칼을 뽑느냐, 주인을 무는 개가 될 셈이냐!”
물론 롤랑은 저것이 제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을 겨누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오딘이 등에서 웬 창을 뽑았다. 형상만은 완벽한 궁니르였다.
“네가 감히 이 약속의 창에 맞서겠느냐?”
롤랑은 맞섰다. 롤랑이 성검을 휘두르자 오딘이 내민 궁니르에 부딪쳤다.
써걱 하는 소리. 난쟁이들이 세계수의 가장 단단한 가지를 꺾어 만들어주었다는 그 룬창은 힘없이 동강났다.
말문이 막혀 오딘은 뒷걸음질 쳤다.
롤랑이 계속 나아가는 가운데 오딘은 이제 거의 비명 질렀다.
“난 오딘이다! 넌 결코 날 해치지 못한다!”
그리고 롤랑은 성검을 휘둘러 그 목을 베었다.
< 안속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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