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92화 (92/164)

< 전장 - [1] >

부랑자 군대는 악룡과의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들만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야 했다.

다행히 언덕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다. 맨몸으로 떨어져 내리면 다리가 부러질지 몰라도 죽지는 않을 듯했다.

제이슨은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고함질렀다.

“빨리 내려가!”

롤랑은 동굴 입구 앞에 굳건히 섰다. 악룡이 동굴 밖으로 나올 것에 대비하고자.

그 뒤로 병사들이 비명 지르며 달려 나갔다.

언덕 앞에서는 다들 멈춰섰다. 죽지는 않을지 몰라도 충분히 높은 위치에서 떨어져 내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벌벌 떨면서 머뭇거리는 자들은 기사들이 직접 떠밀어서 내려 보내야 했다. 그리 떠밀려 낙하한 자들은 더욱 크게 다쳤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기사들은 그저 필사적으로 고함질렀다.

“빨리 가라! 용이 온단 말이다!”

한편 모지는 투명화 주문을, 제이슨은 아직 불러내지 않았던 두 소환물을 불러내느라 여념 없었다.

소환물들에게 가속까지 걸린 후에야 제이슨은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다행히 피신은 거의 완료되었다. 언덕 아래로 병사와 기사들이 대부분 내려가 있었다. 낙하의 충격으로 다쳤는지 일부나마 끙끙거리는 자들도 보였다.

그러나 당장 부상자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제이슨은 지금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게 되었다. 그 입이 무심결에 벌려졌다.

원정대의 야영지로, 거인 궁수들이 폭격하는 가운데 트롤들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이미 트롤들은 거의 모두 강 건너편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강을 넘어갈 수단이 없느니 어쩌느니 했던 것은 다 개소리였나?’

심지어 원정대는 포위당해 있었다. 분명 강변을 따라 넓게 막사를 세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은 한데 뭉쳐있었고, 그렇기에 그보다 수가 적은 트롤들에게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했다.

제이슨은 그저 말문이 막혀 중얼거렸다.

“뭐야, 씹할······”

잠깐 사이에 대체 무엇이 벌어졌단 말인가? 제이슨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도 할 말을 잊은 채 저 참극을 바라보았다.

한편 롤랑은 이를 악문 채 동굴 속을 바라보았다.

용은 대체 언제 나올 것인가?

당장은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그 고요가 더욱 두려웠다.

롤랑은 입술을 깨문 채 무기를 꼬나 쥐었다.

언제 용이 나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 롤랑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나마 든든했던 뼈 방패는 사라졌고, 갑옷마저 너덜거렸다. 거인들의 사격을 몸으로 받아낸 충격도 남아있었다.

‘이 와중에 보스전이라니. 그것도 용을 상대로.’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롤랑은 양손으로 발리사다를 쥐고 동굴 속 어둠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동굴 속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롤랑의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있지 마! 너도 와, 롤랑!”

제이슨의 목소리. 롤랑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지금 용보다 중요한 게 뭔가!”

“아군! 지금 죄다 작살날 판이라고!”

그제야 뒤돌아보고서 롤랑은 흠칫했다.

그 말대로 박살나고 있는 원정대가 보였다.

대체 어떻게? 트롤들이 강은 어떻게 넘어간 것인가?

언뜻 보니 바위산 구석에 웬 통로가 나있었다. 난쟁이가 안내한 것과는 다른 비밀통로.

바위산 아래에 뚫린 굴이었다.

‘미친.’

이제 롤랑과 그 군대만이 뒤편에 남은 판이었다. 원래 이쪽에 있던 트롤들은 죄 강 너머로 넘어갔으니.

이대로라면 원정대는 전멸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남겨진 롤랑과 그 군대는 트롤들 사이에 고립되어 발악하다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멍하니 용이나 기다릴 수는 없었다.

반쯤 미쳐버릴 것 같지만, 뭔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롤랑은 뒤돌아섰다.

언제라도 등 뒤 동굴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건 달려 나갔다.

결국 롤랑도 언덕 아래로 착지했다.

아말릭이 바위산의 한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굴의 입구인 모양입니다. 강 너머로 통하는······.”

그렇다면 저 굴 너머에는 전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포탄 같은 거인의 화살이 떨어져 내리고 트롤 기병들이 날뛰는 전장이.

저 지옥에 부랑자 군대를 이끌고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승산이 없어보였다. 애초에 이들 군대는 그저 롤랑 무리의 몸집을 부풀려 보이기 위한 장식에 불과했지 실제 전투에 쓸모 있으리라 여겨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저들을 저기로 이끄는 것은 사지로 끌고 가는 것에 불과했다.

끔찍하게 고민스러웠지만, 고민할 틈 따위는 없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롤랑은 칼을 들어 저 너머를 가리켰다. 그리고 외쳤다.

“오딘 만세, 그 분의 전장이 저기에 있다!”

“오딘 만세!”

모두가 따라 외치는 가운데 롤랑은 목이 터져라 포효했다.

“오딘이여, 우리를 맞아주소서!”

그러고는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다리가 부러진 부상자들이 절벽 아래에 남아있었다. 용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저들을 내버려두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롤랑은 뒤돌아보지 않고 돌격했다. 그 뒤를 수천 명이 따라 달려 나갔다. 두려움을 잊고자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롤랑을 위하여!”

이내 모두들 통로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뒤에서 모지는 남겨진 부상자들에게 투명화 주문을 걸어주고 있었다. 연신 주문을 읊으며 절벽 위를 바라보고는 생각했다.

‘용은 대체 왜 안 나오는 건가?’

*******

지나는 투명화 주문을 쓸 수 있었고, 그 주문을 동료에게도 걸어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나와 그 동료인 대머리 전사는 투명해진 채 보물고의 벽에 붙어있었다.

악룡이 도망친 기사들을 쫓아 보물고에서 나가기를 기다리고자.

지나는 악룡 너머에 놓인 반지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장식대 위에 걸린 반지.

‘니벨룽의 반지······.’

옛 주신 오딘조차 탐내던 유물이 저기 있었다.

꽤 멀리 있었지만, 뛰어가면 어떻게든 닿을 만한 거리였다.

지나와 동료가 벽에 등을 딱 붙인 가운데, 악룡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걸어 나갔다.

지나는 대머리 전사를 잡아끌고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반지를 향해서. 그리 살금살금 나아가던 와중, 대머리 전사가 웬 금화 무더기를 밟았다.

찰랑거리는 금속 소리를 악룡은 놓치지 않았다.

“누구 있나!”

악룡이 급히 뒤돌아섰다.

이내 악룡은 나갈 생각을 접은 채, 미지의 침입자를 찾아 창고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

롤랑과 그 군대는 통로를 빠져나왔다.

저 앞에 야영지가 보였다. 그리고 거대한 화살 하나가 떨어져 내릴 때마다 사람들이 자갈처럼 휘날리는 광경도.

저곳에 군대를 돌격시켜봤자 저 정신 나간 화살의 목표물만 늘려주는 꼴이었다.

“모두, 멈춰서라!”

롤랑은 일단 군대를 정지시켰다.

물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틈. 뛰쳐나갈 틈을 잡아야 했다. 예를 들자면 거인들이 사격을 멈출 때, 그때 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거인들은 언제야 사격을 멈출 것인가?

짐작되는 순간이 있었다.

‘용이 나올 때······.’

그 거대한 악룡의 등장은 모두의 눈길을 끌 것이다. 그때 돌격할 예정이었다.

이제 롤랑은 방금 전까지는 제발 나오지 않길 바라던 용을 애타게 기다렸다.

*******

악룡은 보물고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다. 적의 제거보다는 창고에 숨어있을 침입자의 제거가 우선이라는 듯이.

악룡은 불길을 뿜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외쳐댔다.

“어디냐! 쥐새끼, 어디냐!”

그러면서 군데군데 불을 뿜어댔다. 황금이 녹지 않도록 그 화력을 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불길에 닿으면 사람의 몸은 견디지 못할 터였다.

점차 용의 불길이 좁혀오고 있었다.

지나는 죽음을 예감했다. 하기야 난쟁이의 보물을 노린 자들은 으레 이렇게 된다던가.

문득 지나는 방금 본 구절을 떠올렸다.

‘사랑을 부정하는 자만이 황금을 얻을 수 있으리.’

지금 이 순간, 지나는 그 문장의 반대로 행하기로 했다.

지나는 작게 주문을 외웠다. 주문의 대상은 바로 옆에서 떨고 있는 대머리 전사였다.

주문에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전사는 온몸이 굳었다. 굳은 자세 그대로 전사는 옆으로 쓰러졌다.

마비 주문이었다.

전사가 황금 위로 쓰러지면서 소리가 났다. 악룡이 이쪽에 눈길을 돌린 순간, 지나는 달려 나갔다.

보물고 입구를 향해 달리면서 자신에게 걸린 주문의 힘을 제거했다. 그리하여 투명화가 풀렸다. 지나의 몸이 드러났다.

지나는 애써 요란스럽게 비명 질렀다.

“으아, 으아아아아아!”

그런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침입자를 발견한 악룡이 웃었다. 그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그 입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온 순간, 지나는 당장 모습이 보이지 않는 동료를 향해 기도했다.

‘그대만은 살아남기를.’

한때 저 전사는 대머리 전사가 아니었다. 그 머리칼을 제거한 이유는 머리에 박힌 화살촉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수술을 감행한 이후 저 전사는 백치가 되었다.

백치가 되기 이전, 저 전사는 나름 근사한 편력 기사였다. 그리고 지나는 그의 아가씨였다.

둘은 연인이었다. 당시에는 경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강인하던 기사가 지나를 보살폈다.

그 듬직하던 기사가 백치가 되어 대머리 전사가 됨으로써 둘의 입장이 바뀌었다. 이후로는 지나가 전사를 보살폈다.

물론 지금도 그래야 했다.

불길이 지나를 집어삼켰다. 지나는 그저 나풀거리며 불타올랐다.

악룡 안드바리는 그 자리에 사람 형체의 숯이 생겨난 것을 보고서야 만족했다.

비로소 안드바리는 창고를 나섰다. 자신이 배신한 자들이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도록, 모조리 제거해야 했다.

그 모든 상황을 대머리 전사는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악룡 안드바리는 통로를 따라 걸어 마침내 동굴 밖을 나섰다. 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불을 뿜어 보았다.

그러고서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파충류의 안면근육이나마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저 멀리에 적들이 보였다.

그리고 거인 궁수들도.

놈들을 본 순간 악룡은 분노했다. 먼 옛날, 거인 파프너가 안드바리의 두 보물을 차지했더랬다.

복수를 해야 했다.

안드바리는 타른헬름에 대고 빌었다.

‘투구야, 내 몸을 키워라!’

투구의 마법은 금세 그 몸 전체에 가 닿았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거대했던 악룡의 몸은 이제 산만큼이나 거대해졌다.

눈높이마저 높아지니 그 눈에 이 층의 모든 것이 들어왔다. 물론 저기 보이는 모든 잡것들을 치워야 했지만, 그 무엇보다 먼저 거인을 제거하기로 했다.

용의 불길이 바위산 곳곳을 휩쓸었다.

그 불길 앞에서 철 방어구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순식간에 거의 모든 거인 부대가 제거되었다.

바위산마저 녹아내려 용암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현상이 이토록 대단했지만 악룡은 기뻐하지 않았다. 불을 뿜어내려면 태워야 할, 체내의 연료가 상당히 줄어들었음을 느꼈기에.

한두 번 더 불을 뿜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마저도 빠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연료를 아껴야했다.

아까 본 그놈의 기사, 거인들을 마치 추풍낙엽처럼 베어버리던 기사를 상대하려면.

이내 악룡은 절벽 끄트머리로 걸었다.

*******

예상했듯 악룡이 소굴에서 빠져나왔다. 심지어 악룡은 그 두렵던 거인 궁수들마저 제거해주었다.

바란 그대로의 상황이었지만 롤랑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다.

주변의 모두가 악룡의 등장에 신음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악룡은 커졌다. 커져도 너무 커졌다.

아까 놈의 소굴에서 맞닥뜨렸을 때도 거대했지만, 당시에는 분투하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도 있겠다 싶은 크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봐도 저 괴물을 상대하기는 불가능했다.

롤랑은 저 악룡이 절벽에 걸친 그 앞발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의 것처럼, 다섯 발가락이 뻗어 나온 앞발.

그놈의 다섯 발가락이 지금 바위산의 봉우리를 붙들고 있었다. 분명 거인 부대가 자리 잡고도 넉넉했던 그 봉우리가 지금은 그 앞발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많은 강적들과 맞서왔지만 저 괴물은 차원이 달랐다.

저 말도 안 되는 질량에 어찌 맞설 것인가?

절망에 차 악룡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 비늘이 우둘투둘 커지며 기괴한 형상으로 변했다.

용의 전신은 웬 암석 같은 각질로 뒤덮였다.

이내 그 머리의 두 뿔에도 각질이 뒤덮였다. 전신이 빈틈없이 그리 방어된 가운데, 오로지 눈만이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 순간 모두들 느꼈다.

글렀다. 다 끝이다.

롤랑마저 다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악룡을 올려다 보았다.

어째서인지 악룡은 당장 이쪽에 불을 뿜어오지 않았다. 마치 싸움을 구경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문득 롤랑은 미약한 희망을 품어보았다.

이제 저 악룡은 이쪽을 굳이 죽이지 않으려는 것인가? 사실 굳이 죽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물론 그것은 그저 헛된 바람일 뿐이리라. 하지만 달리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그 희망에라도 매달려야 했다.

롤랑은 울먹이지 않고자 애쓰며, 최선을 다해 근엄하게 포효했다.

“사격이 멈췄다! 돌격!”

이 정신 나간 상황에서도 그를 추종하는 기사들은 영웅의 뜻을 따라주었다.

다시금 롤랑이 달려 나갔고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롤랑을 위하여!”

부랑자 군대는 그 뒤를 따르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한 기사들이 저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보잘것없는 그들끼리만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다. 울며 겨자 먹기로 부랑자 군대 또한 달려 나갔다.

“롤랑을 위하여!”

누군가는 영웅의 이름을, 다른 누군가는 그보다 강력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딘을 위하여!”

< 전장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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