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90화 (90/164)

< 바위산 - [3] >

롤랑은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난쟁이의 보물을 포기하고, 몸값을 내라.”

모르가나가 물었다.

“몸값?”

“용의 피.”

“피라니, 얼마나······”

“내 몸을 적실만큼.”

기분 탓인지 코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조류의 부리로 그럴 수는 없었겠지마는.

“아, 지크프리트 흉내를 내고 싶은 게로군. 그걸 주면 되는 거야?”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모르가나는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았다. 그녀가 말했다.

“좋아, 줄게. 그놈의 몸값. 여자한테까지 일일이 몸값을 뜯어내다니? 요즘 기사도는 말이 아니네.”

“그러겠노라고 맹세하겠나?”

“그럴게. 궁니르에 걸고.”

롤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까마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단 이 까마귀는 지금까지 약속을 지켜왔다. 약속을 지켜온 기간이라 해봤자 한 달도 안 되지만 어쨌건.

만약 약속을 지킨다면, 풀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우선 까마귀의 모습인 채 죽여 피를 흘리게 한들 과연 그것이 용의 피일지 의심되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용의 피를 요구하는 쪽이 더 나을 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 죽이는 것은 롤랑다운 짓이 아니었다.

롤랑은 흘긋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저 위 천상에 신들이 있을 것이다.

멀리 보는 옥좌에 앉은 신들. 그들은 저 위에서 이곳 세계수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관객은 물론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저 위에는 있었다.

그렇다면 롤랑은 롤랑답게 굴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유저들끼리 있을 때마다 롤랑답지 않은 발언을 잔뜩 해왔지. 그 탓에 신들도 이미 우리 정체를 간파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오딘이 따로 추궁해오지 않았던 걸 봐서는 아직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추측하건대, 저택에 있을 때보다는 이곳 세계수에 있을 때 더욱 신들의 시선이 쏠릴 터였다. 곧 일대결전이 벌어질 만한 지금 이 상황이라면 특히.

롤랑은 손을 놓았다.

풀려난 까마귀는 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깍깍대며 언제 애원했느냐는 양 저주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 가짜 기사! 가짜 롤랑! 어미 없는 강도 기사 같으니, 네 정체가 뭐냐? 분신? 복제? 어느 쪽이건 실컷 부림 당하다가 죽어버려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욕설마저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날갯짓 소리와 함께 흐릿한 윤곽은 사라졌다. 롤랑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용의 피는? 주지 않고 가버리나?’

롤랑은 바지를 끌어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잘한 짓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으니 감에 맡겨 행동했을 뿐.

얼떨떨한 채 무리에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모지가 물어왔다.

“왜 그리 늦게 온 거야?”

롤랑은 속삭였다.

“용.”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추려서 설명했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불안해 죽겠다. 용이 언제든 덮쳐올지 모르니.”

모지 또한 작게 대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약속을 깰 것 같진 않거든.”

“어째서?”

“왠지 모르게.”

롤랑은 눈썹을 찡그렸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반쯤 그런 이유에서 그녀를 풀어주었으므로.

무리는 다시금 전진했다.

코앞이 목적지였으므로 금세 멈춰 설 수 있었다. 언덕 위 동굴 앞, 그러니까 난쟁이가 말한 소굴 앞에서 롤랑은 정지하도록 명령했다.

저 아래에 트롤들의 진영이 보였다.

롤랑은 언덕에 서서 트롤들을 살폈다.

우글우글한 거대 짐승들, 그리고 그 옆에 선 트롤들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얼마 전보다 훨씬 늘어난 것 같았다.

불길하기 그지없었지만 당장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롤랑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군대에게 지시했다.

“여기서 대기. 기사들만 따라오시오.”

그러고는 기사들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 소굴로 들어가며 난쟁이는 연신 투덜거렸다.

“대문이 있었는데, 그놈의 용이 날 납치하면서 다시 닫아놓질 않았군! 미련한 용 같으니! 분명히 이 안에 침입자가 또 있겠군그래!”

과연 걱정한 대로였다.

모지가 주문으로 제공한 조명에 의지하여 계속 걸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보였다.

놈들을 보자마자 난쟁이는 분노에 차 비명 질렀다.

“또 저놈의 거인들!”

거인들 또한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내 드러난 이쪽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롤랑이 돌격했다. 방패를 들고 발리사다를 뽑아든 채.

“지원하라!”

이번 거인 부대는 아까 중턱 위에서 맞닥뜨린 거인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지만, 상대하기는 훨씬 쉬웠다. 좁은 길목이었는지라 저들이 활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롤랑은 쉽게도 놈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거인들은 그에 맞서지 못했다.

롤랑의 작은 몸뚱이에서 나오는 괴력을, 그 손에 들린 룬검에 걸린 주문을 거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거인들은 작은 종족들을 상대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 힘에 의지하여 병기를 부딪쳤다.

그리고 룬검이 제 무기를 통과하고 지나간 순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 순간에는 이미 그 몸에 칼날이 꽂혀있었다.

불과 오 초 만에 세 거인이 죽었다. 이 초 뒤에는 두 거인이 더.

흑기사가, 발키리가 그 학살을 지원했다.

그르르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동굴 속에서 메아리쳐 울렸다.

거인 부대는 순식간에 전멸했다. 풀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몸을 동굴 바닥에 뉘였다.

롤랑은 무덤덤하게 앞으로 손짓했다.

“갑시다.”

거인들이 이 공간을 주둔지로 삼았는지 이후로도 놈들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롤랑은 그 모두를 시체로 만들며 전진했다.

“완전 살육병기로군.”

난쟁이가 중얼거렸는데, 어쩐지 우울한 목소리였다.

그리 계속 죽이고 또 죽여 가며 전진했다. 그 전투의 끝에 도달한 공동에서 마지막 거인을 쓰러뜨렸다.

비로소 난쟁이는 선언했다.

“드디어 내 집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쓰러진 거인의 머리통을 마구 걷어찼다. 그 머리통만 해도 난쟁이의 몸통보다 크고 무거워 흔들리지도 않았지만, 난쟁이는 신나게 차고 또 차다가 이내 말했다.

“보상을 원하겠지?”

롤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난쟁이는 씩 웃었다.

“좋아, 난 정직한 니벨룽 귀족이니 지금 바로 약속을 이행하겠다.”

롤랑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방패를 꽉 잡았다. 조심스럽게, 앞장 서 걷는 난쟁이의 뒤를 따라갔다.

함께 걸어가며 제이슨은 두 동료에게 속삭였다.

“대비해.”

무슨 경고인지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화살을 쏘는 비밀장치, 비밀 함정바닥, 비밀 독 안개······.

게임 메디아에서도 흔해빠졌던 함정들. 도움을 요청하는 NPC를 쫄랑쫄랑 따라가면 흔히 맞닥뜨리던 것들이었다.

난쟁이라면 능히 그런 도구를 써서라도 배신할 법했다. 그 상황에 대비해 롤랑과 흑기사가 다른 이들을 감싼 진형으로 걸어갔다.

어느 문 앞에서 난쟁이가 중얼거렸다.

“자, 여기가 내 보물창고다. 저 안에 모두가 바라는 황금이 있어.”

롤랑은 확인 차 물었다.

“성검과 황금사과도?”

“물론······.”

이곳만은 침입자들이 건드리지 못했는지 그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문에는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나가 그 문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읽으실 수 있나요?”

롤랑은 뜨끔했지만, 다행히 읽을 수 있었다. 바라는 대로 읽어주었다.

“사랑을 부정하는 자만이 금을 얻을 수 있으리.”

그 구절을 들어본 적 있는 기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니벨룽의 황금반지! 바로 그거군요!”

아말릭도 모두와 함께 감동했다. 그 또한 그 전설을 접해본 적 있었기에.

위대한 영웅 서사시, 니벨룽의 반지.

그 전설은 난쟁이 안드바리가 라인 강에 접근하면서 시작된다.

안드바리는 강에서 노니는 라인 처녀들에게 반했다. 열렬히 구애했지만, 그 모습이 워낙 추했기에 그녀들에게 희롱 당하고 업신여겨질 뿐이었다.

절망한 안드바리는 라인 처녀들이 지키던 반지를 빼앗기로 한다.

라인 처녀들은 그 반지에 수호의 주문을 걸어두었는데, 그 주문의 내용은 바로 예의 그것이었다.

‘사랑을 부정하는 자만이 반지를 얻을 수 있으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드바리는 그 주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요정들에게서 거절당해 상처 입은 안드바리는 이내 사랑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주문의 힘에서 벗어난 안드바리는 라인 강바닥에서 반지를 손에 넣는다.

안드바리는 반지를 제 소굴로 가져간다. 그리고 이미 여신의 힘이 깃들어 강력했던 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니벨룽의 기술을 동원하여.

안드바리는 반지에 마법의 룬을 새겨 넣고, 자기의 영혼마저 불어넣는다.

그로써 반지는 만물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보물이 된다. 위대한 오딘마저 탐낼 만큼.

그 반지가 바로 니벨룽의 반지다.

“자, 이제 금을 보여주지. 기대들 하라고.”

난쟁이가 그 문장에다 손을 댄 순간,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하여 드러난 황금의 산에 모두들 할 말을 잊었다.

난쟁이의 창고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 사이로 황금 무더기가 쌓여있었다.

능히 세상의 금 시세를 크게 바꿔놓을 만한 양이었다.

롤랑도 일순 놀랐지만, 그보다는 혹시 함정장치가 없는지 살피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든 방패를 들 준비를 했다.

난쟁이가 황금 사이로 들어갔다.

황금 무더기 맨 위에는 웬 투구가 올려 있었다. 황금 투구였다.

난쟁이는 그 투구에 다가갔다.

“투구야, 네 주인이 돌아왔다.”

그리 중얼거리더니, 양 손으로 황금 투구를 들어올렸다.

먼 옛날, 안드바리는 반지의 힘으로 난쟁이들을 지배했다.

안드바리는 난쟁이들을 시켜 온갖 보물을 자신에게 바치게 했는데, 그리 모은 보물 중 가장 훌륭한 것이 바로 이 황금 투구였다.

타른헬름. 주인을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주는 마법 투구.

반지가 그러했듯 이 황금 투구 또한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우선 신들이 안드바리에게서 두 보물을 강탈했다. 그러나 신들은 기껏 얻은 두 보물을 웬 거인에게 넘겨줘야 했다.

두 보물을 차지한 거인의 이름은 파프너였는데, 파프너는 건네받은 투구의 힘으로 용으로 변신하여 오랜 세월 반지를 지켰다.

이후로 파프너는 용으로서의 이름, 파프니르로 유명해졌다.

그 다음 투구는 악룡 파프니르를 죽인 영웅, 지크프리트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투구에 깃든 마법으로 말미암아 지크프리트 또한 파멸하고 말았다.

지크프리트마저 죽고 나서야 안드바리는 반지와 이 투구를 되찾았다. 그리고 파프니르가 그러했듯, 안드바리 또한 용으로 변해 보물들을 지켜왔다.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전, 마녀 모르가나가 이 투구를 노렸다.

모르가나는 그 소굴에 숨어들어 난쟁이였던 용을 감시했다. 용은 쉬지 않고 보물을 지키는 듯했지만, 그래도 빈틈은 있으리라 믿고서.

결국 빈틈이 발견되었다. 난쟁이는 성욕을 해결하고자 수음하고 싶어 했고, 용의 모습으로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안드바리가 난쟁이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작은 방에 틀어박힌 순간, 모르가나가 그를 납치했다.

모르가나는 이 난쟁이를 작은 석상으로 바꾸어 제 품에 고이 간직했다. 당장 그의 조력이 없으면 창고 문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잘 간직해두었다가 나중에 고문이라도 해서 강제로 열게 할 작정이었다······.

이후로 안드바리는 영웅 셋의 분투로 구출되었다. 그 영웅들의 도움을 빌어 안드바리는 제 소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잠시 손에서 떼어놓았던 그 투구를 손에 넣었다.

이제 다시 보물을 지켜야 할 시간이었다. 황금 위에 버티고 앉은 악룡으로서.

난쟁이, 안드바리는 그렇게 했다.

니벨룽의 옛 왕, 반지의 제왕이 황금 투구를 제 머리에 올려놓았다.

타른헬름의 마법이 그 머리를 타고 흘렀다.

안드바리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세 영웅들마저 막지 못할 속도로.

이내 난쟁이는 사라지고 악룡이 그 자리에 생겨났다.

악룡이 거대한 주둥이를 벌렸다.

그 목구멍이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순간, 롤랑은 즉시 방패를 들어 올려 동료들을 방어했다. 그러면서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고함질렀다.

“강으로 뛰어들어!”

기사들은 허겁지겁 시키는 대로 했다. 모두들 풍덩풍덩 보물 무더기 사이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내 용은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강째로 삶아버리기 위해서.

이내 용의 불길이 분출되었다.

롤랑은 방패를 든 채 그 앞을 가로막았다.

몇몇 기사들은 끝내 불타죽었고, 몇몇 기사는 강으로 떠내려갔으며, 나머지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뛰쳐나가 강 밖으로 도망쳤다.

롤랑은 하반신을 가리고자 허리를 숙여 방패 뒤에 몸을 숨겼지만, 방패조차 불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불길이 꺼져갈 즈음, 방패가 거의 다 불타 종이처럼 얇게 되어버렸다.

이내 악룡 안드바리는 주둥이를 다물었지만, 롤랑은 이를 악물었다. 저 용이 다시 불을 뿜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바가 없었다.

롤랑은 망가진 방패를 내던져버리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빠져나간 동료들과 합류하고자.

기사의 등을 노려보는 악룡의 눈이 불타올랐다.

*******

< 바위산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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