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위산 - [2] >
그리하여 롤랑의 이름을 부르짖던 환호에 다른 이름이 섞였다. 분명 신앙과는 관계없이 살아왔을, 웬 부랑자가 광분한 듯 외쳐댔다.
“오디이이인!”
“오딘!”
“롤랑! 롤랑, 오딘!”
그리 부르짖는 부랑자들의 몸에서 회색의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롤랑이 기도를 욀 때면 늘 보던, 오딘의 빛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빛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롤랑은 저것이 눈의 착각인가, 아니면 그놈의 벌꿀술에 뭔가 있었던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물론 벌꿀술의 효과가 무엇이든 간에 당장 고려할 수는 없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신의 축복을 믿고 어찌 행동방침을 정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열띤 광경 속에서 롤랑은 그저 생각했다. 지금 이겼어도 상황은 결코 좋지 않다고.
대체 이곳에 왜 거인 부대가 있었나?
어째서인지는 뻔했다. 트롤들의 지원군이었으리라. 코끼리 괴물들과도 연합하는 트롤들이 거인과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롤랑은 추측했다.
‘거인 부대는 분명 더 있겠지.’
그렇다면 원정대는 방금 롤랑이 겪었던 포화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원정대가 트롤 군대와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 안전한 고지대에서 거인들은 예의 미사일 같은 투사체를 화살이랍시고 퍼부을 것이다.
원정대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고, 틀림없이 잔뜩 죽을 것이다.
어찌어찌 폭격 같은 사격을 버텨가며 거인 부대에게 가 닿은들, 그것으로 끝일 리도 없다.
롤랑은 오십 층에서 철갑옷으로 무장한 거인 하나가 얼마나 상대하기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이쪽이 일방적으로 농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힘겨웠지 않았나.
그러나 롤랑에 비할 수 없이 허약하며, 발리사다도 없는 범인들이 그놈의 무장 거인들을 상대하려면 그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인가?
범속한 그들을 내버리고 온 마당에 롤랑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원정대가 크게 패하면, 세계수 공략에 장애가 생긴다. 물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평상시라면 롤랑은 그 자리에 남아 화해를 주선해보고자 발악이라도 했을 터였다.
그놈의 성검과 황금사과만 아니었다면 아예 내팽개치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젠장.’
더 허세 부리고 있기도 피곤했다.
뒤돌아서려던 차, 롤랑은 군대의 뒤편에서 웬 흐릿한 윤곽을 발견했다.
얼핏 보면 그것은 그저 아지랑이였다.
그러나 방금 전, 투명해진 발키리의 기습을 보았던 롤랑은 그것을 그저 보아 넘길 수 없었다.
‘투명화?’
그 흐릿한 윤곽은 공중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얼핏 짐작되는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마 까마귀 정도일까······.’
롤랑은 저 투명한 무언가의 존재를 잘 기억해두기로 하고서 봉우리를 내려왔다.
*******
언제 적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 아르테미스 여신은 왠지 모르게 황금사과에 집착하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에서 아르테미스의 종, 님프 자매는 아스가르드에 팔려왔다. 황금사과 한 보따리와 교환되어.
건네받은 사과 보따리를 희희낙락 챙기며 아르테미스 여신은 선심 쓰듯 보따리에서 사과 몇 개를 꺼내 이 님프 자매에게 내주었더랬다. 교환의 당사자들이니 몫을 챙길 자격이 있다면서.
물론 노화하지 않는 님프들이 보기에 그저 풋사과만큼도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이 요정들을 애첩으로 삼고자 데려온 바였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님프들은 자기네가 처녀성의 상징임을 주장하며 몸 내주길 거부했기에.
팔려온 요정 따위가 신들에게 그리 주장하다니. 본디 그것은 요정 따위의 발악에 불과했겠으나 그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오딘의 아내 프리그가 요정들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끝내 신들은 님프들을 건드리지 못했고, 황금사과까지 주고서 데려온 여자들을 그저 관상용으로 모셔두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심지어 여신 프레이야마저 이 요정 처녀들을 고깝게 바라보았다. 헐벗은 년들 주제에 처녀 타령이라니, 하면서.
결국 프레이야가 사소한 트집을 잡아 물어뜯은바, 님프들은 이곳 세계수에 유배되었다.
님프 자매는 당시 깔깔거리던 프레이야를 기억했다.
‘헐벗었으니 괴물들이 뜯어먹기 참 좋겠구나!’
프레이야는 그리 비웃으며 님프들을 이 세계수 안에 던져놓고 물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건방진 요정들은 괴물들의 똥이 되리라 기대하며.
그러나 님프들은 여신의 생각만큼 가련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아르테미스의 사제였고, 그 말인즉 그녀들은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님프 자매는 가지를 꺾고 자기 머리칼을 시위 삼아 활을 만들어내서는 세계수를 활보했다. 마주친 괴물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사냥꾼답게 그 영역을 쉬이도 피해가며.
그러다 이 라인 강에 정착했다.
한동안은 목가적인 나날이었다. 자매는 못생긴 난쟁이들의 음침한 성희롱을 받으며 지긋지긋한 일상을 이어갔다.
처음 수백 년은 수호자 노릇에 열심이었다. 아르테미스가 작별 선물로 던져준 반지며 황금사과를 지키는 것만이 자기네 삶의 목적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요정 자매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자기네를 판 장본인임을 자각했다.
이제 와서는 황금사과니, 여신의 반지니 모두 다 지겨웠다. 자매의 역할은 좀 더 음침하게 변했다.
라인 처녀들은 트롤들에게 지시했다. 다름아닌 여신의 사제로서.
“형제들이여.” “의식을 치르라.” “여신께서 보기 좋도록.”
그 지시대로 트롤들은 난교 의식을 시작했다.
보면서 한 자매가 작게 속삭였다.
“우웩.”
라인 처녀들이 보기에도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었다. 트롤들은 추했고, 난교하는 트롤들은 더욱 추했으므로.
그 추잡한 짓거리를 하면서 트롤들은 처녀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아르테, 미스, 여!”
당연히 아르테미스 보기에도 그 광경은 심히 보기 좋지 않았다. 이내 그 분노의 손길이 내렸다.
난교하던 트롤들은 하나둘씩 짐승으로 변해갔다. 곰으로, 사슴으로, 독수리로······.
라인 처녀들은 그 광경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자매는 천 년 넘게 달빛을 쬐지 못했다. 이제 님프 자매는 살짝 미쳤고 신성모독을 즐겼다.
여신에 대한 복수라기에는 지나치게 소소했지만, 상관없었다. 힘없는 자의 복수는 늘 이런 법 아니겠는가.
의식은 계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원은 방금 전까지 트롤이었던 거대한 짐승들로 가득 찼다.
트롤들은 저 야수화(野獸化)를 축복이라 믿었는데, 실제 이곳 세계수에서 살기에는 저 짐승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곰이 되면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셈이요 사슴이 되면 풀을 뜯어먹을 수 있어 부족의 식량부담이 줄어드는 셈이니.
물론 군사목적으로도 저 짐승들은 유용했다. 라인 처녀들은 지금 그 사실에 감사했다.
라그나뢰크의 그날, 트롤들은 천상 아스가르드로 진격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들의 몰락에 일조할 것이다.
트롤들은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라인 처녀들은 소리죽여 인간 군대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 층에 살던 트롤들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않고 도망쳐온 끝에 이곳 함정까지 낚아온 멍청한 놈들이었다.
놈들이 벌이는 소란의 여파가 이 강물 속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
발키리가 투명해지도록 주문을 걸어준 것은 지나였다. 롤랑은 그 훌륭한 협력자를 살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마녀는 예쁘고, 유능했다. 나중에 함께 다니자 권유해 봐도 좋지 않을까?
‘저 여자도 이 무리를 맘에 들어 하는 눈치던데······.’
이 기분 좋은 상황에 난쟁이는 롤랑 옆에서 투덜거렸다.
“무도한 거인 놈들! 놈들이 내 집과 앞마당을 더럽히고 있어! 놈들이 발견되는 족족 죽여주면 보상을 더해주지!”
롤랑은 용병 취급하지 말라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가뜩이나 수상한 저 난쟁이가 수틀리면 뭔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화내지 않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집은 어디에? 아직도 멀었나?”
“저기, 저기.”
난쟁이가 가리킨 곳은 초원 가까이 붙어있는 언덕이었다. 사다리 하나 걸쳐놓으면 바로 트롤들의 야영지로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사격지점이었다. 저곳에도 거인 부대가 잠복하고 있을 법했다.
전투 준비를 갖춰야 했다. 롤랑은 제이슨에게 손짓했고, 미리 정해둔 신호였기에 제이슨은 겨우 알아들었다.
제이슨이 지팡이를 움켜쥐고 입술을 달싹였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흑기사 소환물이 나타났다.
이어서 발키리까지 불러내고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알론소가 물어왔다.
“서리거인은 불러내지 않나요?”
제이슨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거인 보고 거인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
알론소는 허 하고 혀를 찼다.
푸른 야수 또한 아직 불러내지 않았다. 언제든 소환할 수 있을뿐더러 쓸데없이 눈에 띌 테니까.
그래서 제이슨은 자기가 불러낼 수 있는 소환물 넷 중 둘만 데리고 다녔다. 결국 전력 중 절반뿐이라니? 방금 전투에서 그랬듯 제이슨은 이번에도 썩 활약하지 못할 듯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이슨은 표정을 찌푸렸지만, 굳이 불만을 표하지는 않고 계속 걸었다.
롤랑은 그 앞에서 걸으며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옆에서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롤랑은 확신했다.
‘분명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따라오고 있어.’
그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롤랑이 말했다.
“잠시 휴식.”
사실 얼마 걷지도 않았지만 부랑자 군대는 모두 그 결정에 감사했다.
모두들 주저앉는 가운데 롤랑은 동료들에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잠시 소피 좀 보고 오겠다.”
이내 롤랑은 방금 흐릿한 형체가 보였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 투명한 형체가 슬그머니 멀어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태연히 쫓아가자니 금세 일행이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가 닿았다.
롤랑은 바지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흐릿한 형체가 공중에서 멈춰 섰다.
롤랑은 바지를 반쯤 벗다 말고 높이 도약했다.
켁 하는 소리.
착지한 롤랑의 손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잡혀있었다. 깃털 같은 감촉이 느껴졌기에 롤랑은 확신했다.
용이다.
손에 힘을 주기 전, 손에 잡힌 그것이 고함질렀다. 깍깍거리는 새소리.
“그만! 넌 날 알아, 롤랑!”
롤랑은 흠칫했다.
“뭐냐? 용?”
“모르가나, 모르가나야!”
롤랑은 눈을 찡그렸다.
모르가나라면 익숙한 이름이었다. 광란의 아마디스를 비롯한 롤랑 관련 전설에 자주 등장했던 마녀이므로.
전설에서 모르가나는 성기사들에게 시련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다.
물론 당장 롤랑에게 상관없는 사실이긴 했다. 그런 설화 속 인간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롤랑이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변명이 되는가? 너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나타나 동료를 해쳤고, 이후로는 아예 습격까지 했다. 용.”
“가짜인 줄 알고 없애려 한 거야. 가짜인 줄 알고. 물론 이제는 안 그럴 거야. 난 궁니르에 서약을 했단 말이야. 그리고 이후로 덮치거나 하지 않았잖아?”
모르가나는 그리 주장했는데, 까마귀가 새된 목소리로 깍깍거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조는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롤랑은 저번에 봤던 이 용의 행각을 기억했다. 용은 순식간에 날아와 수천 명의 난민들을 불태워 죽였다. 그 모습이 실로 초월적인지라 당시 롤랑은 이 용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정도였다.
당장 손에 잡혀 무력해졌을지 몰라도, 이 까마귀는 흉악했으며 소름끼치게 강력한 존재였다. 그 사실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덮치려던 게 아니라면? 왜 따라오고 있었나?”
롤랑의 물음에 모르가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난쟁이의 보물. 난쟁이의 보물을 노리고 있었을 뿐이야.”
“우리가 거기 닿은 순간, 낚아채려 했다고?”
“사실, 그래. 하지만 겨우 그런 이유로 날 해치진 않을 테지? 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었어. 네 동료인 오지에를 누가 발할라에 데려다줬나 생각해 봐.”
전설에 의하면 카를의 성기사 중 하나, 이방인 오지에는 발할라에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전 이교도였고 다른 대륙의 신이 그 몸에 자기네 축복을 새겨놨기에.
그리고 모르가나는 옛날 발키리였던 존재였다. 사자를 인도하는 천사. 그 과거에 주목한 성기사들이 부탁한 바, 모르가나는 천상까지 날아올라 죽은 오지에를 발할라에 데려다주었다······.
물론 옛 전설이었고, 게임에서조차 언급된 적 없는 일이었다.
롤랑이 그 일화를 아는 것은 그저 롤랑 역할을 하고자 관련 책을 달달 읽은 덕분이었다. 그 일화를 읽고서 딱히 감흥을 느끼지도 않았다.
결국 은혜니 뭐니 하는 것은 롤랑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반면 음흉하게도 투명해진 채 뒤따라오던 저 용을 죽이는 것은 미지의 위기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이로웠다.
롤랑은 생각했다.
아무리 영웅 행세를 해야 한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마저 그래야하는가? 무얼 하는지 지켜보고서는 영웅다운 처신이었다며 환호해줄 관객도 없는 이곳에서?
머뭇거리는 것마저 멍청하게 느껴질 상황이었지만, 롤랑은 머뭇거렸다.
물론 손에 잡힌 까마귀 한 마리 비틀어 죽이는 것쯤 간단했다.
하지만······.
< 바위산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