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88화 (88/164)

< 바위산 - [1] >

롤랑은 부랑자 군대와 기사들까지 모조리 데려갔는데, 바위산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병력을 대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혹시 강변에서 난리가 벌어질까 두려워 자기 무리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게 해야했고, 난쟁이가 나눠주기로 한 보물을 그 자리에서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난쟁이가 열어준 비밀통로를 따라 올라간 산 중턱에서 무리는 적들을 발견했다.

적들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그적들의 손에 거대한 철궁이 들려있었기에.

롤랑이 무어라 지시하기도 전에 알론소가 고함질렀다.

“거인!”

정확히 말하자면 거인들이었다.

거인들은 육중한 철갑옷을 걸치고 공성병기 같은 활을 들었다.

롤랑은 방패를 들어 올리며 침을 삼켰다.

‘오십 층에서 봤던 거인 부대?’

아니, 구성원 수가 달랐다. 아마 다른 부대일 터였다.

알론소가 소리치기 전에 거인들은 이미 이쪽을 발견한 바였다. 거인들이 겨눈 화살촉이 롤랑의 눈에 들어왔다.

웬 거인이 어깨를 움직인 순간, 롤랑은 즉시 외쳤다.

“물러나!”

바위산의 절벽이 놈들과의 차단벽 역할을 해주었다. 모두들 절벽 뒤로 숨었고 곧이어 거인들이 시위를 놓았다.

줄 튕기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려왔다. 그 거대한 활에서 화살, 아니 투창보다 더한 투사체가 발사되었다.

공기가 찢어지더니,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의 모두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지 않은 소수로서 롤랑은 바위산에 작은 구덩이가 파이는 과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방금 그 짧은 순간, 불꽃이 튀기더니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흩날렸더랬다.

바위산 한복판에 그 거대한 화살이 깊숙 박혀버렸다. 충돌로 발생한 열로 화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롤랑은 저 모든 것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숫제 미사일이군.’

저기 맞기라도 했다가는 갑옷을 입었더라도 허리가 동강날 것이다.

롤랑은 절벽 뒤에 숨은 채 머리만 빼곡 내밀어, 거인 부대가 위치한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쪽에 활을 겨누고 있는 거인들이 보였다.

거인의 수가 겨우 열 명이요, 화살통에 화살이 그리 넉넉하게 들어있지는 않은즉 방금 그런 투사체가 비처럼 쏟아질 염려는 없을 듯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롤랑이 얼핏 보기에도 저 거인들은 그저 높은 곳이 좋아 저기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롤랑은 제이슨에게 속삭였다.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내빼든가, 아니면 공격을 하거나 해야 해.”

제이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그리 급히?”

“저 봉우리는 바위산 곳곳으로 옮겨갈 수 있는 거점 같으니까. 애당초 계획적으로 저기 자리 잡았다면 아마 저놈들은 이곳 지형에 자세할 테고, 절벽 뒤에 숨은 이쪽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위치도 알 거다. 심지어 부대원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어. 여기 있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제이슨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 입이 열리기를 롤랑은 기다렸지만, 그 입은 굳게 닫힌 채 도로 열리지 않았다.

제이슨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들었던 기사들 또한 아무런 방도를 내놓지 않았다.

모두 잠자코 이 위대한 롤랑 경께서 지시 내려주기를 얌전히 기다릴 뿐. 이 상황이 롤랑으로서는 그저 답답했다.

이쪽이 결정해야 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어째야 하나?

물론 롤랑도 알지 못했다. 평범한 한국의 대학생이 전술적 판단 따윌 어찌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도 이 전설적인 전직 변경백을 대신하여 지시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롤랑이 지시해야 했고, 이 수천 명은 그 말 한 마디에 목숨을 던질 터였다.

‘젠장.’

롤랑은 순간 후퇴하자고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거인 하나가 급히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부대에 연락을 취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격 위치에 자리 잡으려고?

어느 쪽이든 위험했다.

생각할 틈이 조금도 없었다. 롤랑은 반쯤 본능적으로 고함질렀다.

“모지, 간다!”

그리 외친 후 롤랑은 자신을 축복했다. 모지 또한 기민하게 반응했다. 즉시 입술을 달싹여 롤랑에게 가속 주문을 걸어주었다.

준비가 끝난 즉시 둘은 뛰쳐나갔다. 땅을 박차며 롤랑이 외쳤다.

“제이슨, 상황 보다가 지원해라!”

그 뒤에서 제이슨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지만, 롤랑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달려 나갔다. 달리는 도중에 알론소에게서 창 하나를 건네받은 채.

롤랑이 절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공격이 가해졌다.

거인이 활을 쏘았다. 또 다시 공기 찢어발기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롤랑이 방패를 들어 올리는 동시에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둘은 앞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 사실에 거인 부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거인은 또 다시 시위를 놓았고, 순간이동 한 그 위치에 곧바로 사격이 가해졌다.

한 줄기 굵직한 선이 다가왔다. 허공에서 빛나는 화살촉을 보며 롤랑은 각오했다.

그리고 각오한 그대로의 충돌.

방패 위로 화살이 적중했다.

굉음과 불꽃에 이어 끔찍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 충격을 분산하려면 차라리 튕겨나가는 것이 낫겠지만, 롤랑은 뒤로 밀려나면서도 자세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바로 옆에 모지가 있었기 때문에. 갑옷이라도 걸친 롤랑과 달리 모지는 저 공격에 맞았다가는 형체도 남기지 못할 터였다.

방패를 든 자세 그대로 롤랑은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났다. 강철장화가 바위산을 그으며 끼이익, 하고 기괴한 소리를 냈다.

롤랑은 혀를 깨물지 않고자 입술을 깨물었다.

거인들이 다시금 활을 들어올렸다. 또 다시 화살 하나가 쏘아진 순간, 모지가 순간이동 했다.

그 위치로도 사격이 가해지리라는 것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롤랑은 위치가 변하자마자 모지를 붙들고 달렸다.

예상했듯 화살이 쏘아졌다. 굉음이 등 뒤에서 들리더니 둘이 방금 있던 자리에 구덩이를 파놓았다.

그리고 화살은 연사되었다.

롤랑은 완벽히 방어할 자신 없이 방패를 들어올렸다. 이내 화살이 닿기 직전, 모지가 순간이동 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들으며 롤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기쁘기까지는 않았지만.

‘미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고 저들과의 위치 또한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대로 편히 저들에게 가 닿을 수는 없을 터였다.

롤랑도 주문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세 번 순간이동 했으니까, 앞으로 한두 번 더 이동 가능하겠지.’

거인들 또한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자리를 옮기든가 어쩌든가 할 터였고, 무엇보다 지금 저기 한 거인이 부대에서 벗어나 달려 나가고 있었다.

놈부터 어찌 처리해야 했다. 다행히 롤랑에게는 그럴 수단이 있었다.

둘은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거인들의 거대한 화살 두 발이 연달아 쏘아졌다.

화살이 닿을락말락했던 순간 모지가 순간이동 했다.

그것으로 이 편리한 이동방법은 잠시간 끝이었다. 룬의 빛이 꺼진 것을 느끼고서 모지가 선언했다.

“쿨타임.”

롤랑은 이를 악물며 모지를 잡고 달려 나갔다. 그러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투창에 힘을 주었다.

거기에 대고 기도했다.

‘오딘이여, 힘을 주소서.’

신이 내린 창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 달리는 와중에도 거인들은 이쪽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또 다시 미사일 같은 화살이 쏘아졌다. 하나는 빗겨나갔지만, 하나는 정확히 방패 위에 명중했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롤랑은 다시금 지면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그 미끄러짐이 겨우 멈춘 순간, 롤랑은 입에서 비릿한 철분을 느꼈다. 물론 고통도.

그러나 지체하지 않았다. 롤랑은 손에 든 창에 염동력까지 휘감고서는 목표를 향해 던져버렸다.

“궁니르여!”

새빨간 선이 허공을 갈랐다. 창은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저 멀리 달려 나가던 거인의 등을 관통했다.

그리 급한 불은 껐지만 화살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롤랑 혼자라면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장 모지를 보호해야 했다.

롤랑은 모지를 감싸며 방패를 들어올렸다. 또 다시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몸 전체로 퍼졌지만 롤랑은 모지의 손목을 붙들고 계속 달렸다.

롤랑이 이제 슬슬 한계라 느끼던 차, 모지가 다시금 순간이동 했다.

그리 조금 더 적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거인들도 슬슬 자리를 옮길 태세였다······.

바로 그때였다. 거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으아, 아아으아아악!”

거인들이 위치한 봉우리에 웬 번개가 내리쳤다.

구름도 아니고 그저 허공에서 생겨난 번개였다. 그 노란 줄기가 철로 무장한 거인을 감전시켰다.

그 옆에 있던 거인들은 기겁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롤랑 또한 놀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발키리의 번개?’

그러나 정작 발키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롤랑이 고함질렀다.

“모지! 지금!”

단순 그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모지는 즉시 순간이동 했다. 연달아, 주문의 한계가 허용하는 만큼 반복해서.

순식간에 둘은 허공에서 점멸하듯 위치를 옮기고 또 옮겼다. 그리하여 꽤 거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거인들과는 거리가 남아있었다.

롤랑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큰 바위 하나를 발견했다. 그 뒤에서라면 화살을 피할 수 있겠다 판단한 즉시 모지를 거기 내던졌다.

“숨어!”

살며시 던져줄 수는 없었다. 거의 날아가다시피 한 모지는 지면에 거세게 부딪쳐 땅을 굴렀지만,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바위 뒤로 숨었다.

딱 롤랑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모지는 그대로 투명화 주문을 읊어나갔다······.

그리고 롤랑이 온 힘을 다해 돌격했다. 이제는 옆에 지켜야 할 동료도 없었으므로 그 질주는 말보다도 빨랐다.

그 순간 번개 하나가 또 다시 거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분명 방금 전까지 없었던 맹금류의 날개 윤곽이 드러났다.

“아, 음.”

투명화가 풀렸음을 알아챈 발키리는 저 멀리 날아가 내뺐다. 노한 거인이 그녀에게 활을 겨누었지만, 옆에 있던 동료가 주의를 주었다.

“저기, 달려오는 놈부터다!”

거인들은 가까이 다가온 롤랑을 노려보았다.

두 명은 여전히 활을 들고 경계를 취하는 가운데 나머지는 무기를 빼들었다. 한 명은 아예 거대한 철제 방패까지 들고 롤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침내 롤랑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거—인—놈들—!”

포효하며 롤랑이 룬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것이 휘둘러지리라는 것이 분명했기에 거인은 방패를 단단히 쥐었다.

다음 순간, 거인은 심장에 닿은 칼날의 감촉을 느꼈다.

거인은 뭐가 어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호흡이 어려워져 딸꾹거렸다.

그 흔들리는 몸을 롤랑이 걷어찼다.

육중한 몸이 그 거인 동료들에게 나가떨어졌다. 거인들이 급히 받아내는 동시에 롤랑이 돌격했다.

거인들의 무기는 도끼, 철추, 곤봉, 대검 등 다양했다. 그러나 어쨌건 모두 철제였고, 금속 무기로는 발리사다를 막을 수 없다.

롤랑은 이 룬검의 효능을 알아챌 시간을 주지 않기로 했다. 가속에 힘입어 달려나가, 적들 한 가운데 파고들어 미친 듯이 찌르고 베었다.

순식간에 거인 하나의 심장을 찌르고 손목 둘을 베었다.

“막아, 아아!”

비명 지르는 거인의 목에다 칼을 꽂아 넣었다. 그리 단말마를 그치게 한 순간, 거인 하나가 도끼를 내리찍었다.

“큰난쟁이—가—!”

롤랑은 침착하게 그 일격을 지켜보았다.

도끼날을 막아서는 안 되었다. 발리사다의 공격을 금속 무기로 막을 수는 없지만, 그 반대 또한 불가능하므로.

롤랑은 발리사다를 슬며시 내뻗었다. 덮쳐오던 도끼 자루와 발리사다의 칼자루를 겹치게 하고자.

그 의도는 성공했다. 도끼날은 롤랑의 머리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도끼를 쥔 거인의 목은 옆으로 회전한 발리사다의 칼날에 잘려 버렸다.

그리 롤랑이 날뛰는 와중에 발키리가 다시금 날아와 룬창을 겨누었다.

그 끝에서 방출된 번개가 롤랑을 합공하려던 거인을 감전시켰다. 결국 혼자서 롤랑을 감당하게 된 바람에 또 한 명의 거인은 무기를 한 번 휘두르려다 말고 맥없이 죽었다.

남은 거인은 겨우 셋이었다. 손목이 너덜거리는 거인이 숨을 몰아쉬더니, 땅을 박찼다.

그렇게 롤랑에게 돌격해오며 고함질렀다.

“달아나라! 옆 부대에 소식을 전—해!”

그 지시대로 거인 둘이 내빼려 했지만, 사지에 남아 동료들을 탈출시키려는 뻔한 역할을 맡은 거인이 너무 빨리 죽었다.

그 거인 역시 발리사다의 마법을 깨닫지 못했다. 놈은 롤랑의 검격을 칼날로 막으려다 그 목이 베여 순식간에 죽었다.

그리 가로막은 놈을 처리하자마자 롤랑이 달려 나가 도약했다.

“죽, 어!”

착지하는 힘으로, 달아나던 거인의 등에다 칼을 꽂아 넣었다.

나머지 거인 하나는 좀 멀리 달아나나 싶었지만, 이내 놈은 발키리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번개에 관통되어 마지막 거인이 정지한 가운데 롤랑이 그 숨통마저 끊어주었다. 그로써 거인 부대가 정리되었다.

롤랑은 그 자리에 서서 미친 듯이 숨을 헐떡였다. 그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애써 삼켰다.

이쪽이 승리한 것을 본 기사들이 절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롤랑 경이 이겼다! 만세······”

이내 시작된 환호와 만세합창을 롤랑은 봉우리 위에서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저리 시끄럽게 굴면 다른 적들을 불러올 텐데, 입 다물라 외쳐야 하나?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괜히 닥치라 소리 질렀다가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소리가 될 테니.

대신 롤랑은 주변에 있던 거인에게 다가갔다. 발리사다에 베여 반쯤 잘린 그 목에다 발리사다를 가져갔다.

발리사다의 예리한 칼날에 목 근육은 너덜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잘렸다.

롤랑은 그 잘린 머리를 저 아래에 있는 자신의 군대에게 과시하듯 내보였다. 그러고는 모두를 향해 고함질렀다.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롤랑, 롤랑······”

시작된 환호를 파묻는 소리로 롤랑이 외쳤다.

“바로 전쟁신께서 지켜보고 계시기에—!”

< 바위산 - [1]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