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87화 (87/164)

< 백 층 - [5] >

롤랑이 그들에게 다가간 즈음에는 이미 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미친 소리!”

“정말 피를 보자는 건가!”

쏟아지는 욕설 속에서 아이스피시는 그저 여유롭게 대답했다.

“원한다면, 그래야지. 그런데 왜들 짖기만 하는 건가? 피와 황금을 원한다면 내 기꺼이 상대해주겠다는데?”

롤랑이 끼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만!”

아이스피시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어보인 살가운 미소에 롤랑은 놀랐다. 또한 그가 자신을 어찌 불렀는지 관해서도.

“아, 롤랑 경.”

롤랑은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에 분노를 띄우며 물었다.

“피를 보자니 그게 무슨 소리요? 서로에게 창칼을 휘두르지 않겠노라 맹세했지 않나? 벌써부터 맹세를 깨겠단 것인가?”

“제가 깨겠단 게 아닙니다. 저놈들에게 깰 테면 깨라 도발할 뿐이에요. 만약 저들이 달려든다면 맹세는 이미 깨진 것이니 저 또한 맹세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테지요. 제 병사들이 창칼을 휘두르는 것은 그 다음일 것입니다.”

갑자기 공손해진 어투에 롤랑은 적응하지 못했다.

어째서 저러나? 물의 요정들이 보증해준바,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인가? 아니면 지금 롤랑이 자기편이 되어주길 바라서 태도를 돌변한 것인가?

보어조아와 그 추종자들의 해석은 후자였다. 그들은 아이스피시가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마당이니 든든한 아군이 될 초인 기사에게 미리 아첨하는 것이라 해석하고는 격분했다.

“이 비겁한 작자가!”

아이스피시는 활짝 웃어보였다.

보어조아가 물었다.

“대체 뭔 속셈이냐? 혹시 황금을 독차지하려는 거냐?”

“내 말 못 들었나? 황금이고 뭐고, 저 강에 있는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니까?”

아이스피시가 말했지만 보어조아는 허 하고 코웃음 쳤다.

“그걸 믿으라고?”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다마는, 믿지 않으면 어쩔 거냐? 네 휘하 염동력자들을 믿고 까부나? 하찮은 염동력이 있으면 네 보잘것없는 군세가 좀 나아질 것 같아?”

그 말에 보어조아는 오만상을 일그러뜨렸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실제 격의 차이가 어마어마했기에.

보어조아는 본디 아이스피시가 고용한 해군 제독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보어조아가 부리는 병력은 휘하 염동력자들을 제외하면 그저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용병들에 불과했다.

그 신뢰할 수 없는 병력들마저도 여기까지 무리하게 끌고 오느라 잔뜩 죽어버렸다.

반면 아이스피시의 병력은 제 영토에서 직접 배를 태워 데려온 정예들이요, 지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이스피시는 실컷 욕을 먹으면서도 자기 병력을 아낀바, 지금 그 대군은 거의 소모되지 않고 온존해 있었다.

보어조아 쪽은 여러 지휘관이 뭉쳐 숫자만은 아이스피시의 병력보다 많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산은 장담할 수 없었다.

또한 어찌 이긴들 그것만으로 목적이 달성될 리는 없지 않은가. 저 황금을 얻으려면 인간 군대가 아니라 트롤들을 무찔러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대오공국 본토에 아이스피시 저놈의 상비군이 남아있지. 세계수에서 내려간 후에는 저놈의 보복을 감당해야 해······.’

보어조아는 비로소 이 상황이 만만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저 망쳐먹는 아이스피시를 업신여겨온 터였다. 그러나 새삼 적대하자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득 롤랑이 물었다.

“아무도 강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겠다 이거요? 그저 건너가려는 것도?”

아이스피시가 대답했다.

“만약 다리 좀 놓으려 한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강폭이 저리 넓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강물을 틀겠다든가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모양인데, 그걸 실행에 옮긴다면 저는 얼간이들이 얼간이짓 하는구나 하고 지켜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의 어리석은 행동은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것입니다. 설령 병력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 할 테지요.”

롤랑은 담담히 말했다.

“굳이 강물을 트는 대공사를 벌일 필요는 없을 거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숨겨진 길이 있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이내 롤랑은 난쟁이에게 들었던 설명을 들려주었다. 바위산, 비밀통로 등등을.

설명이 끝나자 아이스피시는 인자하게도 미소 지었다.

“잘됐군요. 그럼 다들 거기로 가면 될 테니. 다들 들었나? 롤랑 경께서 비책을 말씀하시길, 저 강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둬도 된다 하신다!”

그러나 아이스피시에 맞서는 지휘관들은 침묵했다.

막혀있던 와중 새로운 길을 알게 된, 이 경사로운 상황에 걸맞은 반응이 아니었다. 아무도 환호하기는커녕 좋아하는 시늉도 내지 않았다.

지휘관들의 음침한 표정을 보고서 롤랑은 파탄을 직감했다.

보어조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과연 놀라운 일입니다! 롤랑 경, 저로선 언제나 탄복할 뿐입니다. 숨겨진 길? 마치 마법과도 같은 지식입니다. 과연 수백 년 전 이곳을 먼저 개척했던 분이군요. 큰 걱정을 덜었습니다! 원정대는 언제나 귀공의 덕을 볼 뿐입니다.”

저토록 기나긴 칭송은 이어질 말이 부정적일 것임을 암시했다. 그리고 과연 그랬다.

보어조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이스피시가 방금 내뱉은 발언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우리가 나아가는 동안 아이스피시 저 작자가 여기 웅크려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우리 몰래 황금을 건져내든 우리 배후를 가로막든 뭘 못하겠습니까?”

롤랑은 아이스피시에게 물었다.

“그럴 거요? 아니, 수작을 부리기 이전에, 다른 이들이 바위산을 넘어가는 동안 귀공은 여기 남아있을 건가?”

“아니, 저들이 간다면 저도 가지요. 강을 건드리지 않겠노라 서약한다면.”

아이스피시는 쉽게도 대답했지만, 보어조아는 씹어 내뱉듯 말했다.

“결코 그따위 불공평한 서약은 하지 않겠다. 나와 내 병사들은 피를 흘려 싸워왔으며, 저기 강 너머에 적들이 있으니 아마도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모두들 그 피의 대가를 얻을 자격이 있다.”

“누가 그 대가를 주겠다던가? 너희 멋대로 정한 것 아닌가?”

“그게 뭐 중요한가! 모두들 보상만을 바라고 여기까지 혈투를 치르며 왔다! 그런데 무일푼으로 돌아가라고? 내 고생한 모든 병사들을 대변하여 말하건대, 결코 그러지 못한다!”

이쯤 되면 롤랑이 뭘 어쩔 수가 없었다. 롤랑은 판단했다.

‘더 끼어들어서는 안 돼. 둘의 주장이 완전히 어긋나서 어찌 중재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괜히 끼어들어 중재에 실패하면 작게는 체면을 상하겠고, 크게는 원망을 사겠어.’

그리하여 롤랑은 물었다.

“아무도 굽히지 않을 거고, 끝내 협상하지도 않을 테요?”

“저들이 탐욕을 그치지 않는다면, 그리 되겠지요.”

아이스피시가 말한 다음 보어조아가 외쳤다.

“저자가 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저희도 뭘 어쩔 수가 없습니다!”

롤랑은 보어조아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원래의 목적을 잊었소? 원정의 목적은 황금이 아니었을 텐데?”

“원래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겁니다! 황금이요! 예! 이 신성한 세계수까지 와서 우리는 금붙이를 원합니다!”

보어조아는 문득 흠칫했다. 롤랑의 노여운 시선을 느꼈기에.

보어조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계속 말했다.

“고귀한 롤랑 경께서 보시기에 지금 이 상황이 말도 안 되게 추잡하리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신들의 부름을 받아 성전을 벌이러 와서 황금이나 원하다니, 보기 좋지는 않지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대체 뭐가?”

“우린 지상을 기는 인간이기에! 발할라의 전사가 아니라!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병사들에게 밥 한 끼 먹일 때마다 제 허리는 휘청거립니다! 성전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제게는 금이 필요해요! 비단 저만 그런가요? 병사들도 전리품을 원합니다! 금 쪼가리 하나를 위해서라면, 우리 모두 목숨인들 못 내놓겠습니까”

열변이다 못해 집착까지 느껴졌다. 롤랑은 이제야말로 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좋소. 끝내 그대들이 다투겠다면, 이후로 나는 따로 행동하지. 오늘 오후 나는 바위산에 오를 거요. 여러분은 여기 남으려거든 그리 하시오.”

롤랑은 알기 쉽게도 실망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 다음에는 뒤돌아서서 자기 야영지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전하자 제이슨은 웃었다.

“잘됐는데? 이제 쟤네들은 맘대로 싸우라 내버려두고 그냥 우리끼리 난쟁이나 데려다주면 되는 거지?”

“아마도.”

“차라리 그게 낫다! 애당초 우리가 전쟁에 낄 필요가 뭐 있어? 그냥 황금사과 하나 구하고, 덤으로 성검 한 자루 얻으면 그걸로 우리 목적 달성 아냐?”

하기야 그러했다. 사천 병력까지 데리고 왔지만 여기까지 온 목적은 트롤과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저 보물 좀 얻으려는 것 아니었는가.

‘그리 생각하면 저들이랑 나랑 다를 게 뭔가 싶지만······’

롤랑은 머쓱한 한편 난쟁이가 제시한 보물을 생각했다.

성검, 그리고 황금사과를.

정말 그것만 얻으면 유저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하여튼 나머지 유저들은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롤랑은 새삼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그놈의 성검과 사과를 얻어 돌아가겠노라고.

롤랑은 막사를 나와 외쳤다.

“기사들은 병사들을 재촉하시오!”

롤랑은 자기 군대에게 움직일 준비를 하라 지시했다. 되도록 빨리 바위산에 오를 계획이었다.

난쟁이의 소굴이 그곳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분주하게 짐을 꾸리고 식사를 마쳤다. 롤랑도 이것저것 챙기는 와중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 물었다.

“롤랑 경? 지금 바로 바위산에 오르신다고요?”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나 양. 덕분에 편히 올 수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여기 머물러도······”

“아뇨, 같이 가고 싶어요.”

“같이?”

롤랑은 저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롤랑은 보물을 챙기러 가고 있는데, 저 보물 사냥꾼을 데려가도 되나? 괜히 몫만 더 나눠야 할 뿐 아닌가?

하지만 이내 롤랑은 말했다. 간소하게나마 예법까지 취해서.

“귀부인께서 동행해주신다면 이 미천한 기사에게는 그저 영광일 것입니다.”

보물을 좀 나누게 된들 어떠랴? 어차피 이쪽에 필요한 것은 성검과 황금사과 둘뿐인 것을.

지나는 히죽 웃으며 마주 예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

*******

롤랑은 지휘관들이 싸우느라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걱정했다.

두 진영이 맹세를 깨고 한 판 붙든, 대치하는 동안 트롤들이 기습을 걸어오든 분명 참사가 벌어질 터였다.

그 일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라도 해야 했다. 그리 생각했으므로 롤랑은 길을 서둘렀다.

자기 부랑자 군대를 향해 외쳤다.

“모두 출발!”

롤랑이 앞장섰고 사천 병력과 아직 남은 청소부 수백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롤랑의 옆에는 길안내를 위해 난쟁이가 찰싹 붙었다. 롤랑은 그를 흘긋 보며 속으로 빌었다.

‘배신하지 마라, 제발.’

그리하여 바위산을 향해 수천 명이 전진했다.

그 뒤에서 염탐하는 자들이 있었다.

강물 속에서 라인 처녀들은 수면 위로 머리를 빼곡 내밀었다. 그리고 수천 명과 그들을 이끄는 롤랑의 뒷모습을 엿보았다.

“잘됐어. 저 광전사가 사라지면 한결 낫겠지.” “분명히. 저 괴물이 있으면 어찌 될지 몰랐는데.”

셋이서 중얼거리는 와중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강을 향해서 다가오는 걸음.

원정대가 있는 방향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라인 처녀들은 트롤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트롤 하나가 다가와 있었다.

트롤은 물속에 잠긴 라인 처녀들을 발견했다. 이내 무릎 꿇고 말했다.

“아르테미스의 달빛 있으라.”

라인 처녀들도 마주 중얼거렸다.

“아르테미스의 달빛 있으라.”

라인 처녀들은 본디 세계수의 주민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본디 아틀란티스의 님프였고, 아르테미스 여신의 사제였다.

오랜 세월 여신을 섬겨온 끝에 이곳 세계수에 오게 되었다.

라인 처녀들이 이 강에 자리잡은 이래, 수백 년 동안 이 부근은 난쟁이들의 영토였다. 그러고도 세월이 지나 난쟁이들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트롤들이 자리 잡았다.

라인 처녀들은 그 추한 종족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트롤들에게 아르테미스 신앙이 퍼졌고, 이후로 라인 처녀들은 트롤들에게도 존귀한 여사제로서 존경받았다.

성직자의 자격으로, 라인 처녀들은 트롤들에게 가르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가르침에는 군사적인 조언 또한 포함되었다.

라인 처녀는 트롤에게 말했다.

“저들은 서로 싸우고 있노라.” “저들 사이에 에리스가 내려왔어.” “흉악한 광전사도 저들에게서 벗어났지. 그 틈을 노려야 한다.”

트롤들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사제, 들이여.”

******

< 백 층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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