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86화 (86/164)

< 백 층 - [4] >

라인 처녀들의 등장은 순식간에 종전을 이끌어냈다.

모두가 인정하건대, 그녀들은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 존재였다.

사람들이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강물에서 그녀들은 자유로이 헤엄쳐 다녔다. 물갈퀴도, 인어다운 물고기의 하반신도 없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들은 물의 요정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보증한다면, 롤랑은 롤랑이었다. 모두들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물론 물의 요정임과 그 발언의 진위여부에 있는 상관관계는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들마저 사기꾼이라 외치지 않았다.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라인 처녀들은 아름다웠고, 신비로웠다. 그녀들의 탐스런 입술에서 거짓말이 나오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내 롤랑의 정체를 의심하던 지휘관이 사과했다.

“제가 잠시 미쳤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롤랑 경.”

전혀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위기상황이 해결되었다. 떨떠름했지만 롤랑은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물론 용서하오.”

그리 말하면서 롤랑은 흘긋 아이스피시를 보았다. 예전부터 가장 열심히도 롤랑의 정체를 의심하던 사람 아닌가.

지금은 어찌 반응할 것인가?

사실 그리 열렬한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롤랑의 정체 따위가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그놈의 강물과 거기 잠든 황금이 아닌가.

그러나 아이스피시의 표정을 보고서 롤랑은 당황했다.

지금 아이스피시는 눈을 크게 떴고, 그 동공은 흔들렸으며, 입을 살짝 벌린 채 온몸이 굳어있었다.

심히도 동요한 모양새였다. 대체 왜?

롤랑으로서는 이게 그리 충격 받을 일인가 싶었지만,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당장 중요한 일은 저자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유리해진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인 처녀들은 강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다시 시선을 받게 된 롤랑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내 자격을 인정하오? 내가 바로 전쟁신의 대전사이며, 그분의 창 궁니르를 대변한다는 것을?”

힘없으나마 대답들이 돌아왔다.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자격으로, 세계수의 창 궁니르에 대고 여러분이 서약하길 권하오. 성전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사람을 상대로 창칼을 휘두르지 않아야 하오. 맹세하겠나?”

화제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서 잊을 뻔했지만 맨 처음 목적은 저것이었다. 트롤 군대 앞에서 사람들끼리 싸우게 하지 않는 것.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내 한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보어조아가 말했다.

“서약합니다. 궁니르에 맹세컨대, 이 신성한 싸움이 끝날 때까지, 저와 제 기사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병사들은 인간 그 누구의 피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무리의 수장 보어조아가 그리 말했으니 그 추종자들도 덩달아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서약합······”

그리하여 좌중의 거의 모두가 서약했다.

마지막까지 한 명은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예상하기 쉽게도 그 인물은 아이스피시였다.

“사령관, 결정하시지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서야 아이스피시는 모두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스피시는 그저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서약하오.”

그로써 롤랑은 당초 목적하던 일을 이루어냈다. 당장 저들은 싸우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아예 철군하게 만들고 싶었다. 역시 저 트롤 군대와 지금 이 자리에서 일대결전을 벌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흘긋 보니 다들 자기들이 한 서약에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즉 그 이상의 요구를 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으므로, 롤랑은 이내 이 현장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만 해산합시다. 막사 안에서도 저기 강 너머에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임을 명심하시오. 대체 어찌할 것인가는 각자 생각해보기로 하고. 모두들 현명한 선택을 바라오.”

그러고서야 롤랑은 겨우 자기 야영지로 돌아왔다.

천막 안에 유저들끼리 둘러앉았다. 제이슨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겠냐?”

“뭐가?”

“설마 너 진짜 롤랑이냐, 하고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건 기정사실 아니었나······”

모지가 말을 받았다.

“원래 의심을 사고 있었다기보다는 저들이 좀 맛이 간 거 같던데? 당장 목적이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거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직접 거인을 쓰러뜨리는 걸 몸소 보인 기사를 상대로 그 정체를 추궁하는 건······ 비이성적 아니야?”

롤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대처해야한다 이거네.”

“아마도.”

제이슨이 말했다.

“비이성적이란 말이지. 그런 놈들한테 이제 원한까지 샀고? 그럼······ 괜찮을까?”

“무슨 소리?”

“양 진영에서 우릴 곱게 보지 않던데? 우리 좆된 거 아냐? 지금 원정대를 이끄는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모인 거잖아. 영웅으로서의 명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도 실상 저런 권력자들에게 잘 보여야하기 때문이고. 아무리 영웅으로 칭송받은들 저 새끼들과 사이 나빠지면 뭔 소용이야?”

어울리지 않게도 약한 소리가 제이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만큼 아까 상황이 위태로웠던 탓인가?

롤랑은 내심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굴 편들 수는 없었어. 눈치 보며 발언하다니 영웅답지도 않고······ 위대한 롤랑 경의 주장대로 어리석은 짓을 하다가 트롤들에게 패해 대거 죽어나가기라도 했다가는, 명성이고 뭐고 다 끝장이니까.”

“넌 지금 어리석은 짓만 안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상황 자체를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준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뭔 소리야?”

“라인 처녀? 그년들이 말했잖아. 너 수백 년 전에 이미 여기 왔던 적 있다고. 그렇담 저놈의 강 넘어갈 방법도 알아야 정상 아냐? 그저 잠자코 있다가는 또 정체 의심 받는 거 아냐?”

일리 있는 말이었다. 롤랑은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 무리에는 롤랑 외에도 이 층을 밟았던 적 있는 인물이 최소 한 명은 더 있었다.

롤랑은 난쟁이에게 가보았다.

난쟁이는 자신에게 배정된 천막 안에 드러누워 있었다. 롤랑이 들어가자 난쟁이는 누운 그대로 말했다.

“아, 롤랑. 여기까지 데려다주어 정말로 고맙군.”

“별 일 아니었소. 하지만 내 임무는 아직 끝이 아니지?”

“그렇지. 하지만 이제 내 집에만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저기 저리 추악한 트롤들이 많지만, 당신이라면 능히 가능하리라 믿어. 오면서 본 건데, 당신 정말 강하더군? 오나추스를 그리 쉽게 죽이는 것은 난생 처음 봤어. 놈을 죽이려면 룬 무구로 무장한 니벨룽 군대라도 크게 고생했을 것인데······.”

이후로도 아첨이 이어졌다. 그리고 롤랑이 물었다.

“물론 약속한 대로, 나는 그대를 집에 데려다줄 것이오.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소. 저 강을 건널 방법, 아오?”

난쟁이는 쉽게도 대답했다.

“알지. 저 바위산을 넘어가면 돼.”

“그것이 가능했다면 저기 있는 군대가 진작 시도해보지 않았겠소?”

“그냥은 못 넘어가지. 그런데 비밀통로가 있거든.”

롤랑은 눈을 크게 뜨고 이어진 설명을 들었다.

******

으슥한 밤, 세계수는 오히려 바깥보다 어두웠다. 하늘이 천정으로 가려져 있어 별빛도 달빛도 없었기에.

어둠을 헤치며 아이스피시는 홀로 강변을 걸었다.

강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끄트머리에 섰다. 아이스피시는 강을 향해 말했다.

“라인 처녀들, 물의 요정들이여. 부디 나와 주오.”

응답이 없었다. 아이스피시는 간절하게 한 번 더 불렀다.

“라인 처녀들.”

그 순간 물이 튀었다. 안면에 느껴진 물방울의 차가움에 아이스피시가 놀라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여성들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뭔가요?” “당신은 누구고?” “무엇을 원하나요?”

“그······ 묻고 싶은 게 있소.”

“물어보세요.”

“그자는 정말 롤랑이 맞소?”

“맞아요.” “분명해요.” “그는 롤랑이에요.”

“수백 년 만에 보는 거라면서? 분명하오?”

“천 년이 흘러도 못 잊을 거 같네요.” “그 기사가 여기서 황금사과를 가져갔거든요.” “자기 황제가 너무 늙었으니 회춘 좀 시켜주겠다면서.”

아이스피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자가 내 조상이란 말이오?”

“당신이 롤랑의 후손인가요?” “닮지는 않았는데, 정말?”

“그리 전해지는데······”

아이스피시의 말이 흐렸다. 왜냐하면 내심 긴가민가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의 왕국이 다섯 섬으로 나뉘어 대오공국이 된 이래, 다섯 공작가문은 자기네 혈통을 근사하게 꾸밀 필요를 느꼈다.

각 가문은 유명한 영웅 한둘씩을 가져와 자기네 조상이라 우겼으며, 아이스피시의 가문이 선택한 영웅은 롤랑이었다.

가문은 그 주장에 힘을 보태고자 저택에 유물까지 하나 보관하고 있었다. 롤랑의 성검, 뒤랑달을.

아이스피시는 연신 중얼거렸다.

“롤랑······ 하기야 그런 것 같기는 했소. 거인도 용도 이겼다는데 범인일 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자가 롤랑인 게 그대에게는 중요한 일인가요?”

“중요하오. 가문의 명예에 관련된 일이오. 그리고 고백하건대 나는 명예에 굶주렸어.”

“황금에는?”

“그딴 건 됐소. 이미 많으니.”

계속 중얼거리다가 아이스피시는 흠칫 놀랐다. 어두운 와중에도 눈앞에 다가온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물 밖에 몸을 내밀고서 라인 처녀가 말했다.

“빈말이 아닐 테지요? 하기야 아까도 당신은 강에서 황금을 건져내려는 무뢰한들과 맞섰지요. 그래, 당신이야말로 진정 믿을 만한 분이에요. 명예로운 분.”

뒤따른 황홀.

아이스피시는 자신의 입술에서 요정의 싱그러운 입술을 느꼈다. 둘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달콤한 혀가 들어왔다.

거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 아이스피시는 입맞춤했다.

그대로 혀를 굴리며, 라인 처녀는 아이스피시와 눈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 요정의 눈은 요사하게 빛났다. 입 맞추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아이스피시는 그 눈동자에서 자기 눈을 뗄 수 없었다.

매료의 사안(邪眼). 물의 요정, 님프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

다음 날, 롤랑은 만반의 준비를 마쳐두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다시 지휘관들이 모여 의논할 터였다. 그 자리에서 롤랑은 자신만이 아는 샛길이 있다며 바위산을 넘어가자 주장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물줄기를 바꿔야한다는 주장은 명분을 잃을 것이요,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해결될 터였다······.

의논 중에 써먹을 대사도 충분히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다. 이제 지휘관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읊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야영지 중심은 이미 시끄러웠다.

뭔지 몰라도 불길했다. 롤랑은 급히 가보았다.

그 자리에는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지휘관들의 중심에 서있는 것은 원정대 제일의 거물, 아이스피시 사령관이었다.

아이스피시가 말했다.

“······하여 나는 그대들의 탐욕에 질렸소. 그대들은 본래의 목적을 잊고 그저 보화만을 탐하여 병사들을 무리하게 부려 여기까지 몰고 왔지. 그 탓에 불필요한 죽음이 넘쳐흘렀고, 그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후방은 극히 불안하여 보급도 후퇴도 원활하지 않을 터요.”

그 비난에 지휘관들은 안색이 굳었다. 아이스피시는 계속 말했다.

“과거의 위기에서 배우지 못한 게지. 우리는 저번에 정신 나간 기습, 코끼리 군대의 후방습격을 겪어야 했어. 한 영웅이 그 위기를 구해주었고 그 영웅은 지금도 여기 있으니 어쩌면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도 어찌 이겨낼 수 있을지는 몰라. 하지만 그 사실이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가려주지는 않는다!”

“갑자기 웬 비난과 찬양······”

“지금까지만 어리석었을 뿐인가? 그대들은 갈수록 미쳐가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바위산을 깎아 새로운 물길을 내자느니, 그토록 활약한 롤랑이 가짜라느니 개소리를 지껄일 수가 없지! 그래, 그대들은 미쳤다. 그놈의 황금에 미쳤다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보어조아의 물음에 아이스피시가 대답했다.

“이대로 좌시할 수 없다 이거다. 다들 미쳐서, 미친 짓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겠어. 쉽게도 예상되는 종말을 막기 위해 내 이 자리에서 선포하노니, 아무도 저 강에서 황금을 건져낼 수 없다!”

난데없는 선언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보어조아가 고함질렀다.

“이 어리석은 작자가! 또 결투 재판을 원하는가? 또 패하길 원해!”

아이스피시 또한 외쳤다.

“그놈의 기사 놀이는 이제 됐어! 여기가 마상시합장인 줄 아나? 모든 불화를 다 그놈의 기사 시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나? 기사 소설 작작 읽어라, 병신들아! 결투고 뭐고, 이쪽에서 씹으면 될 뿐이다!”

“싸움을 회피하겠단 말을 참 으스대듯 말하는군?”

보어조아가 비꼬았지만 아이스피시는 웃었다.

더없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그것을 본 지휘관들은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동안 원정대에 마지못해 끼어있었던, 거듭된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것이 분명했던 사령관은 이 자리에 없었다.

비프로스트 일만 원정군의 사령관. 본토에는 그 휘하 상비군만 이만 명이며 그 병력 모두를 나를 수 있는 함대를 거느린 군주.

모든 제후와 왕들이 부러워하는 영주이며, 뒤랑달의 주인인 자, 대오공국의 공작이 선언했다.

“그토록 결투를 원해? 좋다, 도전에 응해주지! 하지만 겨우 기사 몇 명끼리 하는 싸움이 아니라, 모든 병력이 맞붙어 싸우는 진정한 전쟁으로 맞서주마! 정 황금을 원하느냐? 피를 보길 원해? 그렇다면 덤벼라! 너희 모든 것을 걸고!”

어젯밤, 아이스피시는 황홀한 시간 속에서 라인 처녀들에게 맹세했다. 요정들을, 라인 강을 수호하겠노라고.

지금 그 맹세를, 저 강을 지켜야만 했다.

< 백 층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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