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층 - [3] >
예상 밖의 발언이었는지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예?”
롤랑이 말했다.
“싸우지들 말라 이거요. 결투 재판? 집어치우시오. 당장 적들이 눈앞에 있는데 칼을 어디다 휘두르는 거요? 티르의 이름을 팔아 헛짓거리 하다니, 창피한 줄 알아. 그러니 기사들이여, 이 자리에서 모두 서약하시오. 이 성전이 끝날 때까지 사람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르지 않겠노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웬 기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약합······”
그 즉시 고함이 뒤따랐다.
“닥쳐! 저자가 뭔데 그 말을 따르나? 넌 내게 충성했다, 아닌가!”
롤랑은 그리 외친 지휘관을 보고서 속으로 신음했다.
‘저놈은 아이스피시 쪽 지휘관이 아닌데?’
보어조아를 따르는 지휘관,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롤랑의 등장에 환호했던 지휘관이 그리 외쳤다.
그것을 알아본 롤랑은 내심 동요했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냐 물었는가? 이름은 롤랑이며,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전쟁신의 대전사이다. 나는 누구에게 서약하도록 권할 자격이 있다. 내가 모시는 주께서 바로 궁니르의 주인시기에.”
“개소리 마라! 네가 무슨 롤랑이냐!”
롤랑은 또 다시 당황했다. 설마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어제 롤랑 경, 롤랑 경, 하면서 내일 있을 결투 재판이 기대 된답시고 아첨했던 주제에?’
“어제 그대는 나를 롤랑 경이라 불렀을 텐데? 나 아닌 누군가를 그리 불렀던가?”
롤랑의 말에 지휘관은 고함질렀다.
“그건 그저 네 장단에 맞춰줬을 뿐이다!”
“사실은 믿지 않았단 말이군. 모두들 그러하오?”
롤랑은 정말 그렇다면 어쩌나 싶어 속으로는 불안하게, 얼굴에는 미세한 분노를 띄우며 다른 지휘관들을 둘러보았다.
복잡한 표정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지휘관들은 당장 저자에게 무례하다며 호통 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저자에게 가세해서 다함께 롤랑의 정체를 지탄하지도 않았다.
당장 롤랑으로서는 그 정도로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어쨌건 내가 그동안 보여준 게 있긴 했으니까 자기네 편들어주지 않는다고 곧장 가짜라 우길 수 없는 모양이지.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보어조아와 그 옆 지휘관들은 떨떠름해 보였다. 롤랑이 말만 하면 뭐든 할 것 같았던 어제와는 명백히 다른 얼굴들.
저 중 몇몇은 롤랑과 함께 나무코끼리 군대와 싸우기도 했던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태도라니?
그렇다면 저들이 지금 느끼는 반감은 표정에서 읽히는 정도보다 더할 것이다.
롤랑은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험하다고.
흘긋 아이스피시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지휘관들의 표정은 보어조아 쪽과 정반대였다.
죽을상을 짓고 있었던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물론 체면이 있어 노골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들이 지금 결투를 하지 않게 된 이 상황을 반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사실에 롤랑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좋든 싫든 저들이 날 도울 리는 없다. 아이스피시가 날 싫어한다는 게 분명하니까.’
사방이 적이었다. 원래 적이었던 자들과 지금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롤랑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긴장했다.
그 대치 속에서 보어조아 쪽 지휘관이 물어왔다.
“결투 재판을 하지 아니한다면? 경께서는 저들을 어찌 설득하시겠습니까? 아이스피시와 저 머저리들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요! 강물 공사는 불가능하다, 뗏목도 못 만든다! 그럼 어쩔 거냐는 말에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아요. 말하기는 창피스러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더라도 사실 그냥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그 말에 롤랑은 짧게 대답했다.
“돌아가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뭐요?”
“억지로 나아가느니 보다는 후퇴가 나아.”
“도망치잔 말씀입니까?”
“후퇴가 어째서 도주인가? 승리를 뒤로 미룰 뿐이지.”
“물러난 곳에 무슨 승리가 있나!”
“억지로 나아간 곳에는 패배가 있다오. 패배의 형제인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까마귀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보다는 낫지 않은가?”
“겁쟁이! 겁쟁이의 변명이오!”
지휘관이 버럭 외치더니, 이내 더욱 크게 외쳤다.
“롤랑이 그런 겁쟁이란 말인가! 그게 말이 돼?”
롤랑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생각했다.
정체를 의심하는 놈이 하나 또 늘어버렸다. 이대로 계속 이럴 것인가?
다행히도 대신 나서주는 이가 있었다. 보어조아가 말했다.
“그만. 흥분하지 마시오. 누구 앞에서 그러는 거요? 저 분은 의심할 바 없이 롤랑 경이오. 틀림없이.”
그 말에도 롤랑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리 말하는 보어조아의 낯빛 또한 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상황이 지독히도 불편해보였다.
실제 보어조아는 사실 저들과 함께 외치고 싶었다. 저놈은 가짜라고. 저 겁쟁이 같은 발언에 신경 쓸 필요 없노라 주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터였다.
보어조아는 이미 저 기사와 함께 싸워보았다. 그 괴물들이 날뛰는 전장에서 광전사의 전설적인 싸움을 두 눈으로 목격한 바였다.
저 기사는 분명 롤랑일 터였고, 그렇지 않다면 롤랑만한 괴물일 터였다.
어느 쪽이건 간에 그런 초인과 적대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보어조아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롤랑 경, 황금사과를 얻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습득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은 귀 영웅 분들을 불러낸 메디아 궁성에 대한 의무방기가 아닐까 감히 지적 드리고 싶습니다마는.”
“황금사과를 얻는다면, 저 강물을 멈춰서?”
“그게 힘들 것 같다면 저 강에서 건져낼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요. 어쨌건 물러나는 건 결코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저대로 황금이 강물에 떠내려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제가 이 자리에서 약속드리건대, 황금사과를 찾는다면 반드시 경에게 넘겨드리겠습니다. 궁니르에 맹세합니다. 그러니 제발.”
그 애원에 롤랑은 중얼거렸다.
“황금, 황금······. 지금 그걸 바라서 그러는 거요?”
보어조아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황금을, 보물을 원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다들 발할라 아니면 모험을 바라 여기 왔습니다! 그리고 모험에서 보물을 원하는 게 뭐 그리 이상합니까?”
모든 자들의 시선이 보어조아에게 쏠렸다. 몇몇 추종자들이 고함질렀다.
“옳소!” “옳다!”
보어조아는 더욱 열렬하게 외쳤다.
“광란의 아마디스에서도 그랬잖습니까? 생전에 롤랑 경께서는 천하의 명마와 갑주, 그리고 성검 뒤랑달의 주인이셨습니다. 그 보물들의 소유권을 놓고 다른 기사들과 다투셨어요. 그걸 탐욕에 미쳤다 해석합니까? 제 권리를 챙기는 것은 기사 된 도리입니다! 모험심 있는 기사라면 보물을 원해요! 그렇잖습니까?”
보어조아는 절절한 감정을 실어서 그리 외쳤다. 꽤 열변이었노라고 스스로도 느꼈다. 이 정도면 이 간절한 뜻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롤랑은 간단하게도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모험심, 훌륭한 덕목이오. 제 권리를 지키고자 다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적들 앞에서는 아니야.”
보어조아의 표정은 단번에 굳었다.
보어조아 옆에 선 지휘관이 다시금 고함질렀다.
“이 협잡꾼이! 아이스피시한테 얼마 받았나! 대체 얼마를 받으면 그 잘난 광전사가 그냥 싹 다 집어치우고 내빼잔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응? 말해보아라, 대체 뭔 수작질이냐!”
“수작질이라니?”
“지금 금들을 건져내기엔 그 몫을 나눌 인원이 너무 많다 이거 아닌가? 저 많은 금을 나눠 갖기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 다 물러나고 나면 당신네끼리 그때 건지기라도 하려나? 그런 속셈인가!”
아이스피시가 중얼거렸다.
“걸작이군!”
아이스피시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선지자가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저 롤랑의 신분이 사기꾼으로 격하되다니.
롤랑도 마주 외쳤다.
“그놈의 금은 이제 됐어! 그 너머의 적들을 바라보시오. 트롤들, 인간보다 근력이 세 배나 강한 괴물! 어찌어찌 상처를 입힌들 어지간한 부상은 나아 쉽게도 전선에 복귀하며, 무장하고 군대를 이루기까지 한 저 강대한 적들을 보란 말이오!”
“트롤을 왜 들먹여? 왜 속내를 숨기나! 네 눈에도 지금 금밖에 안 보이면서!”
“그놈의 금은 됐다니까! 내가 그걸 지금 도둑질하겠다고 선언했나? 언제부터 당신네 것이었다고 그리 집착하는 건가?”
롤랑과 자기 쪽 지휘관의 논쟁을 들으며 보어조아는 고심했다.
그냥 자기도 아예 저 논쟁에 끼어들까? 그리하여 저 기사는 롤랑이 아닌 것 같다고 우길까?
‘아니, 아냐.’
역시나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쪽의 뜻을 밀어붙여 결투 재판을 할 경우, 아이스피시 편에 저놈의 롤랑이 붙을 것 아닌가?
그리 되면 저 초인 기사를 상대로는 그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이쪽 지휘관은 저자가 롤랑이 아니라고 외쳐댔다. 롤랑이라면 그리 비겁하게 굴지 않을 거라며.
어째야 하나? 이내 보어조아가 결심한 그때였다.
조용하게 흐르던 강물에서 물보라가 튀었다.
수면 위로 찰랑이는 은발이 떠올랐다. 강바닥의 황금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들.
그 은발 아래 반짝이는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이 추잡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치 신비로운 세 명의 여자가 말했다.
“저분의 말씀을 따르세요, 모두.” “그는 훌륭한 지휘관이고 그 조언은 언제나 현명했어요. 위대한 카를 대제조차 그 조언에 여러 차례 덕을 보았죠.” “그 말대로 제발 물러나세요. 이 강은 내버려두고요.”
모두들 홀린 듯이 세 명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아름다웠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수컷들의 시선을 모으는 데는 충분했지만, 그 존재부터가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 세계수에 여자?”
여자들이 합창하듯 말했다.
“우리는.” “물의 요정들.” “라인 처녀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두가 그녀들의 존재를 들어보았다. 라인 처녀라니? 전설에도 나오는 요정들이 아닌가.
모두들 정신없이 그녀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라인 처녀가 상반신을 내밀었다.
가리지 않은 가슴이 드러났다. 더 열렬히 쏟아지는 시선을 봉긋한 가슴으로 받아내며 라인 처녀가 말했다.
“그리고 저분은.” “롤랑이에요.” “훌륭한 지휘관. 수백 년 전에 이미 이곳에서 승리한 분이죠.”
롤랑도 라인 처녀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등장에 할 말을 잊은 가운데 라인 처녀들이 인사했다.
“반가워요, 롤랑.” “오랜만이네요. 수백 년 만인가요?” “또 왔네요. 이번에는 무엇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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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층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