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층 - [2] >
롤랑은 지친 와중에도 기겁했다.
더 많이 죽고 다치다니? 그 말은 인간끼리의 싸움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롤랑의 말에 대답한 것은 염동장군 보어조아였다.
“아, 롤랑 경. 다름이 아니라 문제해결 방식에 관련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여기 지휘관들이 많잖습니까? 머리가 많으니 서로 다툴 뿐이었습니다. 어찌어찌 뜻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뭉치긴 했는데 결국 두 무리로 나뉘어서요. 저희들, 진격을 원하는 자들과······”
보어조아는 아이스피시와 그 옆 지휘관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냥 여기서 공기 좀 쐬다가 귀가하고픈 저 실없는 무리로 나갈렸습니다.”
아이스피시가 이죽거렸다.
“진격은 개뿔. 사금 채취 하고 싶어 돌아버린 주제에? 이 천해빠진 자식아. 여기까지 와 강에서 금이나 줍고 싶어 하는 게 말이 되나?”
강에서 금을 줍는다는 말에 롤랑은 저쪽을 바라보았다.
오십 층에서도 그랬듯, 백 층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은 기괴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 빛을 본 순간 롤랑은 왠지 모르게 불길해졌다.
그 속내를 감추고 태연하게 물었다.
“당장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군.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고 싶은데, 그 다음에 대화를 계속해도 되겠소?”
“그러시지요. 롤랑 경.”
보어조아는 더없이 살가운 미소로 대답했는데, 영락없이 든든한 동맹군을 대하는 태도였다.
보어조아의 안내에 따라 롤랑의 군대는 야영지 한 귀퉁이를 배정받았다. 거기에 병사들을 쉬게 한 뒤 롤랑은 다시 지휘관들을 따라 나섰다.
지휘관들은 롤랑을 데리고 강변 끄트머리를 향했다.
보어조아가 입을 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강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저 광경이 경께는 익숙하실 테지요? 전설의······ 라인 강.”
롤랑으로서는 갑자기 웬 유럽의 강 이름이 나오나 싶었다. 그래서 흘긋 보았더니, 그 현실적인 이름과 달리 당장 눈에 들어온 것은 비현실적이기 그지없었다.
강에는 진흙이나 자갈 따위가 퇴적되는 법이다. 그러나 라인 강의 퇴적물들은 노란빛으로 번쩍였다.
롤랑은 강 아래 깔린 황금들을 바라보았다.
안내하러 온 지휘관들 또한. 그들은 아예 홀린 듯이 강바닥의 황금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롤랑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장관이군. 그런데 사금 채취를 하고 싶다던데, 당신들은 저것들을 얻겠다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트롤들 앞에서?”
롤랑은 강 너머를, 거기 있는 적들을 가리켰다.
강 너머에 적들이 있었다. 이쪽을 경계하고 있는 야만 종족들, 트롤들이 빼곡했다.
트롤들 또한 군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쪽 원정대보다 수는 적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병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 괴물들 앞에서 강바닥 보물들을 수확하겠다고?’
롤랑이 어이없어 하는 것을 느낀 것일까. 보어조아의 표정이 굳었다. 마치 이쪽이 꺼려할 줄 몰랐다는 듯이.
롤랑은 역으로 의아해졌다.
이쪽은 발할라에서 강림한 고대 영웅이라고 소개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그런 고귀한 존재가 황금을 탐내어 자기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롤랑이 그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보어조아가 말했다.
“물론 위험한 짓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순 황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앞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들의 음해와 달리 저희 당면 목적은 황금 채취가 아닙니다.”
“그럼 뭐요?”
보어조아는 비장한 투로 대답했다.
“저희는 강의 물줄기를 바꾸려고 합니다. 저 바위산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에 따라 롤랑은 저기 보이는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그 바위산 꼭대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바위산을 깎아내겠다고?”
“예. 시험 삼아 병사들을 보내 조사해보았더니 저 산을 이루는 암석은 어찌어찌 깎아낼 수 있겠더군요. 조금 고생하면 물줄기를 바꿔, 저 강의 밑바닥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원정대는 굳이 도하(渡河)하고자 뗏목 따위를 준비할 필요도 없이 바로 저 트롤들에게 돌격할 수 있는 것이죠.”
롤랑이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하다고 느꼈다. 어쨌건 물었다.
“그러나 아이스피시 사령관과 그 무리는 여러분의 주장에 반대한다고?”
“터무니없는 개소리라 치부하더군요. 그런데 뭔가 시도하지 말자는 게 더 헛소리 아닌가요? 저 강의 유속은 생각보다 빠릅니다. 황금은 그저 무거운 덕에 떠내려가지 않을 뿐이에요. 뗏목을 만들 나무가 충분하지도 않은 마당에, 어설프게 도하를 시도하다가는 저기 저 트롤들이 화살 좀 쏘면 다 죽을 겁니다. 저 강을 끼우고서는 일대결전을 벌일 수 없어요.”
물론 롤랑은 그 말에 동의하거나 반박할 수 없었다. 관련 지식이 없었으므로. 그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래서 강 물줄기를 바꾸는 게 전술적으로 좋은 선택이라면, 저들이 그걸 반대하는 이유는 뭐고?”
“현실성도 없는데 그저 황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우겨댄다고 폄하하는 게지요. 웃기는 놈들. 해보지도 않고서 어찌 그리 극구 반대하나 모르겠습니다. 안 된다, 불가능하다······ 아이스피시 그놈은 그다지 늙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부터 머리가 굳었어요. 지금껏 놈과 여러 차례 부딪쳤지만 이번에는 특히 많이 싸웠습니다.”
“전투라도 했단 말이오?”
“아뇨, 귀족다운 방식이었지요. 우리는 간소하게나마 기사 시합을 열었습니다. 양 진영에서 내보낸 기사들이 싸워 이긴 편 주장이 옳다는 식으로 의사소통을 해왔습니다. 여럿 다쳤고 몇 명은 아예 죽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전쟁을 하진 않았어요. 그 정도 분별은 있다 자부합니다.”
‘기사 시합이라.’
롤랑은 그제야 저들이 왜 이쪽의 등장에 그리도 반가워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저들은 결투 재판을 통해 누가 옳은가 가려왔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지금 설령 결투 상대가 거인일지라도 이겨버릴 수 있는 초인이 등장한 것이다.
의문은 아직 전부 풀리지 않았지마는.
‘내가 왜 무조건적으로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군. 아이스피시가 날 싫어하니 나 또한 놈을 싫어하리라 짐작해서?’
롤랑이 속으로 골몰하는 가운데, 보어조아가 말했다.
“황금사과가 필요하시지요?”
영웅들의 목적은 이미 비프로스트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스론이 실컷 떠벌리고 다녔기에.
롤랑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소.”
보어조아는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저 강바닥에는 황금사과 또한 가라앉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 말 또한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롤랑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보어조아가 물어왔다.
“그래서······ 저희 편을 들어주시겠지요?”
롤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오.”
“예?”
“즉답은 못하겠소.”
“아니, 롤랑 경? 지금은 모험을 해야 할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귀공은 내게 그 결투 재판에 나서주길 바라는 거 아니오? 칼을 휘둘러 이쪽 주장이 옳다 증명해주길 바라는 모양인데, 무작정 칼을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저쪽 말부터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하오.”
보어조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거절당할 줄 몰랐다는 표정.
롤랑은 역시나 지금 저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자신이 저 주장에 얼른 합세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시겠소?”
롤랑의 말에 보어조아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옳은 결정을 내려주시리라 믿으며.”
이후 롤랑은 아이스피시의 막사에 가보았다. 자길 적대하는 자들의 눈길을 받으며 그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아이스피시는 롤랑의 존재에 큰 불쾌감을 드러내면서도 이내 말했다.
“바위산을 깎아서 물줄기를 바꿔? 미친 소리. 바위를 깎을 곡괭이도 없거니와 그딴 걸 뭔 방법으로 시도해보단 말인가? 지금 이 무리에 관련 공사를 벌일 만한 지식을 가진 놈이 대체 어디 있어? 대충 산 좀 깎아서 수문을 틀면 그저 다 잘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강의 방향을 바꾸는 게 전술적으로 이득이라는 의견엔 어찌 반박하시려오?”
“전술적 이득이고 뭐고 그러는 걸 트롤들이 멍하니 보기만 하겠느냐 답해주지! 공사 벌이다 잔뜩 지친 마당에 덮쳐오면 어쩔 건데? 다들 돌았다. 금 쪼가리에 미쳤어.”
그리 말하며 아이스피시는 신음했다.
모든 상황이 그를 괴롭히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대오공국의 다섯 공작가문 중 하나로서 아이스피시의 저택에는 이미 충분한 황금이 쌓여있었다.
아마도 그 덕분이겠지만, 아이스피시는 난쟁이의 보물이니 뭐니 하는 것에 영 관심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은 현실적인 돈벌이 방법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그저 최전선에서 빠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러섰다가는 겁쟁이로 보일까봐.
그리 따라오려니 모두들 무작정 백 층을 향했다. 그 무모한 전진이 내심 싫으면서도 어찌어찌 따라왔더니 저놈의 황금 강이 나타났다.
이후로는 쭉 의견불일치가 일어난 바, 저쪽에서 결투 재판을 제의해왔다. 아이스피시로서는 일대 결전을 벌이느니 보다야 낫겠다 싶어 그 제안에 응했다.
그리 벌어진 결투에서는 이쪽이 거의 모두 패했다. 저쪽 진영에는 신들의 선물을 받아 고강해진 자들이 널려있었던 것이다.
그리 패배하여 이쪽 기사들이 잔뜩 다치거나 죽은 마당이었다. 이제는 아예 비프로스트,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르는 괴물이 나타나버렸다.
아이스피시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앞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 증오 어린 시선을 받으며 롤랑은 고개를 숙였다.
“말은 잘 들었소. 감사하오. 공작.”
그리 예를 표했지만, 아이스피시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롤랑은 그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쪽을 잠재적인 적이라 보는 모양이군.’
아이스피시뿐만 아니라 막사 내의 온 기사들이 이쪽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롤랑은 그들의 표정에서 적대감뿐만 아니라 두려움마저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저쪽 편에서 서서 결투에 참여하리라 여기는 모양새로군. 그리고 다 이겨버리리라 걱정하는 거고.’
그 모습을 보며 롤랑은 안심했다.
저 지고의 권력자를 상대로도 자신은 영향력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의 소신을 내세워도······.’
자기 야영지로 돌아간 롤랑은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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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지 한 가운데에 양 진영의 기사들이 나열했다.
기사들은 언제든 싸움에 나설 듯, 갑옷과 무기로 중무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 상대는 저기 강 너머의 트롤들이 아니라 상대편 인간 기사들이었다.
그 사실이 롤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
귀족다운, 기사다운 방법이요 병사들끼리 부딪쳐 다수의 피가 흐르니 보다 낫다지만 알 게 뭔가? 적들 앞에서 왜 아군끼리 싸운단 말인가.
기사들 앞에서 군종사제가 엄숙히 선언했다.
“공정한 티르께서 지켜보시매, 신성한 전투는 옳고 그름을 가리노라.”
이어진 기사들의 합창.
“티르께서 지켜보신다!”
이로써 결투 재판의 막이 열렸다. 양 기사들의 우두머리, 보어조아와 아이스피시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문득 보어조아가 롤랑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롤랑의 무리를 보았다.
지금 롤랑은 동료들을 대동했다. 아말릭과 알론소, 그리고 모지와 제이슨. 제이슨이 있으니 그 발키리도 불러두었다. 그 맹금류를 닮은 천사는 지금 모두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보어조아는 발키리를 보며 웃더니, 이내 아이스피시를 바라보았다. 아이스피시 또한 관심 없는 척하면서 흘긋흘긋 발키리를 바라보는 마당이었다.
그렇다, 천사가. 신들이 이쪽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쪽이 옳았다······.
보어조아는 이내 모두를 향해 히죽 웃더니 롤랑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음을 정리하셨지요?”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선언했다.
“발할라의 전사로서 이 자리에 계신 용사들께 한 말씀 올리겠소.”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멎길 기다린 다음 롤랑이 말을 이었다.
“지금 천상의 신들께서 이 자리를 지켜보고 계실 줄로 아오. 공정하신 티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신들께서 말이외다. 그 고귀한 신들께 추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는 법. 다들 동의하오?”
다들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보어조아 또한 동의하노라 외쳤는데, 당장 그는 롤랑이 결투를 공정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줄 알았다.
이내 롤랑이 말했다.
“그러니 이 짓거리 관두시오.”
< 백 층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