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층 - [1] >
수백 년 전, 카를의 부족은 거인들에게 통치되고 있었다.
거인들의 밑에서 카를의 부족민들은 광산 노동, 대장일, 피혁 관리 등 거인이 잘하지 못하거나 하고 싶어 하지 않아하는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잡아먹히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인간 하나를 먹음직하게 키우려면 식량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 인간은 식용 가축으로는 쓸모가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거인의 식인을 당시 시절을 더욱 암울하게 부풀리기 위한 묘사로 추측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늙어 노동력을 상실한 카를의 아버지가 거인에게 잡아먹혔다는 사실마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카를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으리란 점도.
바로 그 일 탓에 카를은 대장일하며 나름 먹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지배자들에 대한 원한을 늘 품고 살았으리라.
야사에 따르면 카를은 늘 부족민들에게 탈출해야 한다느니, 이곳을 벗어나면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느니 주장했다고 한다.
이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탈출을 선동하는 가축을 거인들이 용납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어쨌건 그 야사에서 추가로 언급되기를, 카를이 그리 말할 때마다 부족민들은 비웃곤 했다고 한다. 한 가지 질문과 함께.
‘탈출하면 어찌 먹고 살 건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으리라. 거인들의 울타리를 벗어난 바깥 세상에 도사리는 것은 괴물들, 크거나 흉포한 괴물들이었으므로.
당시 산맥에는 인간 무리와 마주치면 덮쳐 잡아먹으려 드는 트롤 부족이, 거인들도 함부로 대적하지 못하는 용이 도사렸고 바다에는 크라켄이 숨어있었다. 불을 뿜는 오나추스가 길목에 숨어 상단을 노렸으며, 언제 어디서든 코카트리스와 바실리스크가 석상 양산에 몰두했다.
그런 시절이었고, 당시 꽤 잘 나가던 인간 왕국이라 해봤자 성벽 너머에 숨어 거인들에게 조공하던 처지였다.
왕국 바깥의 인간 부족들은 언제나 보호에 굶주렸다. 안전을 보장해주기에 거인 지배자들은 오히려 칭송받는 판국이었다.
그렇기에 카를의 부족에 방랑자가 찾아왔을 때, 그가 솜씨 좋은 검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에 정착하고 싶어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거인들이 있는데 굳이 인간 검객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았으리라. 부족민들은 방랑자를 반기지 않았지만, 결국 방랑자가 부족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방랑자는 친척을 찾아왔다. 부족에서 가장 중요한 장인, 대장장이 카를을. 특혜를 인정하여 부족은 방랑자를 받아들였다.
방랑자의 이름은 롤랑이었다.
이 낯선 사촌을 카를은 동경했다. 위험한 바깥세상을 제 힘으로 누비며 살아왔다니? 그것이야말로 카를이 늘 꿈꿔온 삶 아니었던가.
반면 롤랑은 이 안전한 곳에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지위까지 공고한 이 친척을 동경했다. 방랑자로서 늘 안전한 생활을 꿈꿔온 터였으므로.
둘은 서로를 존경했고, 원하는 바가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의기투합했다.
카를은 이 사촌에게도 탈출해야 한다느니, 거인들 밑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지껄였다고 한다. 아마 롤랑이 듣기에도 저것은 헛소리였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끝내 누가 설복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추측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창문을 열어 지금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 수 있다.
누가 이겼는지. 그리하여 어느 종족이 이겼는지.
*******
김치 삼형제는 기세등등했다. 비단 카를은 혼자인데 지금 자기네는 세 명이라는 수적 우세뿐만 아니라 명분에도 자신이 있는 모양새였다.
“왜? 이것도 안 된다 하게?”
삼형제의 맏이, 소환사 유저는 비꼬는 듯이 물어왔다. 마치 이것을 막으려드는 것은 횡포요 억지인 것이 당연하다는 양.
그러나 카를은 단언했다.
“물론, 절대, 안 돼.”
“또 왜? 무시할 왕따 새끼들 사라지면 너희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 같아서? 우리 알아서 뒈지러 간다니까 왜 그러는데?”
“정말 뒈지거나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되어 그런다. 너희 셋만 보내는 건 불안감밖에 안 든다고. 척 보기에 너희 실제 연령대 어린 것 같은데, 원래 학생이냐? 갑자기 이고깽을 하고 싶어졌고?”
“이미 간 세 명은 잘하고 있잖아! 씹할, 신전 새끼들 요새 하는 말이 그 새끼들 칭찬뿐이던데! 왜, 용까지 잡았다며? 실제 셋이서 활약이 가능하다는 게 증명됐는데 뭐가 더 필요해?”
“준비. 더 많은 준비.”
“준비는 개뿔? 앞서 간 세 명이서만 싸우는 동안 넌 그냥 지휘봉 휘두르는 거나 즐기겠다 이거지?”
카를은 벌컥 성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실제 저 말은 심장에 꽂혀왔다. 친구를 싸움터에 내보내고 자신은 실내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심 속 쓰리게 생각해왔으므로.
카를은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말에 개인적인 감정이 실리면 설득력이 줄어드는 법이니까.
카를은 조용하게 말했다.
“너희 무시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닌데, 너희 셋은 이미 간 그 셋에 비하면 그저 하위호환밖에 안 된다. 제이슨 그 새끼 여기 소환되자마자 버럭버럭 소리 지른 거 기억나나? 미친놈처럼 간덩이 부은 놈이지만 이 정신 나간 상황에는 어울릴 놈이지. 롤랑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상황에도 행동할 수 있었던 진짜배기 영웅이야.”
“모지는? 그 아싸 새끼는?”
“그 마법사 양반?”
“그래, 그런 병신도 용까지 잡은 마당에······”
병신이라니?
카를은 모지를 떠올렸다. 용병들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던, 그리고 카를이 되살렸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입에서 흐르던 피를 기억한 순간 카를은 울컥했다. 이제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 사람보다 너희가 나은 것 같아? 미쳤냐? 주제 파악 못해?”
“주제는 뭔······”
“그 사람, 한 번 정말 죽었는데도 모두를 위해 나서겠노라 자원한 사람이야. 정신적으로 그 누구보다 초인이란 말이다. 그때 넌 어디 찔리지도 않았는데 질질 짜고 있었던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옆방 소환사는 소환물 불러서 활약이라도 했는데 같은 소환사인 넌······”
“넌 그때 뭐했는데 잘난 척이야, 새끼야!”
카를은 굳이 소생을 시켰다느니 어쩌느니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인정했다.
“아무것도 안 했지. 아무것도.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주제 파악하는 거다. 모르나 본데, 앞서 자원한 그 셋은 우리 중에서 특출 났어. 남겨진 우리 중에 세 명이 그들을 뒤따라? 숫자가 같다고 그 만한 활약이 쉬울 것 같나? 어이없는 실수로 모두를 망신시키고 뒈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서 다 이대로 처박혀 있기나 하자고? 주제 파악이나 한 채?”
“계속 있을 수는 없지. 물론 우리도 언젠가 나서야 해. 그때를 대비해서 필사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거다. 저쪽에서 부를 때까지는.”
“언제 부르는데!”
“곧 부르겠지. 그런데 넌 그날이 최대한 늦게 오길 바라야 할 텐데? 네가 나서지 못해 안달 낼 만큼 뭔가 이루었나? 요새 대련이나 연구도 설렁설렁 하는 새끼가. 스스로가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
“준비 됐다면 어쩔 건데? 지가 일리단인 줄 아나. 새끼가 준비, 준비······.”
카를은 허 하고 비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 유저들 캐릭터 시트에 적힌 출생지 열 개만 말해봐라. 네 출생연도 이후로 삼십 년 동안 벌어진 사건은 다섯 가지만 말해봐.”
맏이 소환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터였다. 셋이서만 다니느라 다른 유저들에게 관심을 보내지 않았으니.
소환사 유저는 조금 뜸을 들여 물었다.
“그딴 걸 왜 알아야 되는데, 새끼야?”
그 말에 카를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 살아생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영웅이 어디 있나? 왜? 그놈의 기억상실 설정을 확대하여 그냥 싹 다 잊었다 주장하려고? 롤랑이 일주일 동안 공부한 게 너희 지금껏 공부한 것보다 더 방대하겠다, 이 병신 새끼들아! 여기 있자니 몸이 쑤셔? 김치나 담그고 싶을 만치 심심해? 그럼 주어진 일이나 똑바로 해!”
삼형제는 입을 다물었고, 카를은 설전에서 승리했노라 느꼈다.
이후로 카를은 다른 유저들에게 분부했다.
“저 삼형제에게 관심 좀 줘라. 말도 좀 붙여주고, 같이 좀 놀자 제안도 해봐. 혹시 너희 그 셋 정말 따돌리나? 그러지 마. 셋은 어린놈들이니 관대하게 보고, 너희라도 어른스럽게 굴어라.”
성숙하게도 유저들은 그 말에 따랐다.
유저들은 삼형제에게 접근하여 말을 섞고자 시도했다. 그 모습을 카를은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이 잘 풀렸노라고.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못했다.
다가온 유저들을 상대로 삼형제가 떠벌렸던 것이다.
“왕궁에서 부르면, 우리 셋이서 출전한다!”
그로써 저들은 설전에 패했을 뿐, 설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웬 유저가 물었고 삼형제의 맏이가 자랑스럽게도 대답했다.
“그래, 모두를 대신해서!”
유저는 그 말을 썩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굳이 장하다든가, 응원한다든가 말해서 지지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분명했다. 굳이 정정하기는커녕 씩 웃어주는 것을 보니.
위험했다. 카를은 그리 느꼈다.
출전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출전을 일부의 몫으로 떠넘겨 모두의 출전을 늦춰서는 안 된다.
왕궁의 부름이 있는 그날, 유저들은 모두가 함께 나서야 했다. 그리하여 위험과 부담을 함께 나누어야 했다.
그러나 저 셋은 그 짐을 셋이서만 짊어지겠노라 주장하고 있었다.
‘나태를, 무책임을 감염시키고 있어.’
심지어 삼형제는 자기네 추종자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앞서 출전한 셋을 위해 유저 모두가 달라붙어 캐릭터 시트용 자료를 모아주었던 것처럼, 유저들은 이제 자기네를 위해 협조해야 한다며 주장했던 것이다.
이후로도 세 명은 떠벌리고 또 떠벌렸다. 다음 차례에는 셋이서 나서겠노라고.
심지어 신전 수도사에게도 그리 말하고 다녔다. 그토록 자기네 허세를 공언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카를은 직감했다.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
롤랑의 군대는 쉴 곳을 찾아 야영지 한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이 새로운 집단의 등장에 야영지에 있던 모두가 긴장했다. 병사며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이쪽을 굳은 얼굴로 주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세하러 온 아군을 경계하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이 몰려나왔다. 다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인 것을 보니 환영하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
“멈추시오!”
롤랑은 순순히 군대를 정지시키고는 저들 지휘관의 안색을 살폈다. 서로가 서로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지휘관 중 누군가가 외쳤다.
“이게 누굽니까! 롤랑 경! 와주셨군요!”
그 말에 그 옆에 있던 지휘관이 물었다.
“롤랑?”
“못 보셨나? 저 분이 바로 위명 자자하신 롤랑 경이외다!”
롤랑, 롤랑 하고 그 이름이 허공을 맴돌았다.
지휘관들의 낯빛은 확연히 변했다. 우선 한쪽은 롤랑이 나타났다는 말에 바로 만면의 미소를 머금었다.
반면 다른 쪽은 이미 굳어있던 그 표정이 더욱 얼어붙었다. 마치 적이 등장하기라도 한 듯이.
웃는 쪽 지휘관이 말했다.
“끝났군. 아이스피시.”
아이스피시가 오만상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받았다.
“벌써부터 좋아하시는군그래?”
“왜 아니 좋아하겠소? 지금 세계수 최고의 기사께서 등장한 거요. 우리가 이겼소.”
여기까지 들었을 때 롤랑은 저 지휘관이 트롤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노라 기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휘관은 아이스피시와 그 옆의 지휘관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러고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선언했다.
“이제 당신네는 우릴 이길 수 없어. 그렇잖소?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지금 패배를 인정하시오. 더 많이 다치고 죽기 전에.”
< 백 층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