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80화 (80/164)

< 강 - [3] >

군대는 계속 걸어 나갔다.

부랑자들은 짐 없이 걷기도 힘들어했지만, 낙오자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 사실, 그러니까 돈을 들여서라도 뭔가 나아졌음에 롤랑은 만족했다. 제이슨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마는.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못 따라올 거면 대체 뭔 생각으로 세계수에 뛰어들고 싶어 한 거야?”

어쨌건 당초 걱정한 것보다는 수월히 전진했다.

지나의 안내에 따라 군대는 지름길을 따라가 계단을 찾았다.

칠십이 층까지는 롤랑이 포함된 원정대가 착실하게 정리해둔 바였다. 눈에 띄는 괴물 따위 없이 수천 명은 그저 걷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칠십육 층부터는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칠십육 층의 생태계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바였다.

군대가 전진하는 동안 별별 괴물이 눈에 띄었다. 머리에 뾰족한 뿔이 자라난 일각 괴물이, 코모도왕도마뱀보다도 훨씬 거대한 도마뱀이 어슬렁거렸다.

이쪽에 혀를 날름거리는 괴물 도마뱀을 보며 롤랑은 속으로 신음했다.

‘원래 저런 건 다 치우고야 진격하는 건데.’

그놈의 거대한 도마뱀을 보며 알론소가 물어왔다.

“롤랑 경, 저거 작은 용 아니겠습니까?”

“아닐 거요.”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론소는 흥분한 채였다.

“해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호만 주신다면 제가 달려들지요!”

아직도 제 버릇 못 고쳤군. 롤랑은 내심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놈은 무리를 뒤쫓아 오면서 몰래 낙오자를 낚아챌지도 모르지. 저 송곳니만 봐도 분명 육식종일 테니까 말이오.”

알론소는 반색하며 즉시 창을 들어올렸다. 그것을 앞으로 쭉 뻗더니, 기괴한 고함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종말이다, 용이여! 이 창이 네 최후를 장식하리라아아!”

그 창을 놈의 목에다 찌른 순간, 도마뱀은 비명 지르며 꼬리를 휘둘렀다.

그에 맞고 알론소는 나가 떨어졌다.

그리 구르다 말고, 알론소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섰다.

그 늙은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발두르께서 날 가호하시니, 소용없으리라!”

알론소는 다시 도마뱀에게 달려가 기어이 놈을 끝장냈다.

저번 레벨 업으로 알론소는 롤랑과 같은 축복을 받았다. 이제 알론소의 피부는 돌처럼 단단해졌다. 자잘한 상처는 나지 않을 터였다.

단순 그 변화만으로도 알론소는 믿음직한 전력이 되었다. 용감하며, 쉬이 다치지 않는 기사라니. 이 정도면 꽤나 듬직하지 않은가.

널브러진 도마뱀 시체를 흘긋 보더니, 청소부 대표가 다가와 물었다.

“롤랑 경? 저 시체를 저희가 가져도······”

롤랑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런 계약이었으니까.”

대표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후로도 행군을 계속했다.

계속해서 수많은 괴물을 보았다. 몇몇 괴물은 초식성인 듯했지만, 그 사실이 위안을 주지 못하게도 괴물들 모두 끔찍하게 거대하여 자칫하면 위험할 듯 보였다.

육식괴물도 보였다. 저 언덕 위에서 날개호랑이가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방금 그 도마뱀의 동족들도 수두룩했다. 놈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기사들이 달려들어 놈들을 해치웠다. 그러나 그리 한바탕 살육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마뱀들은 점차로 모여들었다.

일일이 다 상대할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수천 명은 지친 와중에도 발걸음을 빨리 하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겨우 한 층 더 올랐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역시나 울창한 자연 속에 거대한 괴물들이 득실거렸다.

그래도 무리의 규모가 수천쯤 되다 보니 어지간한 괴물들은 그저 접근할 뿐, 아예 돌격해오지는 않았다.

간혹 날개호랑이가 하늘에서 덮쳐와 무리에서 살짝 벗어난 부랑자를 낚아채려 했지만, 그것은 롤랑이며 기사들이 어찌어찌 막아냈다.

그 고생 끝에 겨우겨우 칠십구 층에 이르렀다.

안내인으로서 지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언덕 사이가 길목인데요. 이상하네?”

롤랑은 지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언덕 사이를 가로막은, 엄청나게 거대한 바위가 보였다.

“혹시 산사태라도 나서 굴러 떨어졌나?”

지나가 중얼거렸지만 롤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요. 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계수니 상황을 최대한 의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혹시 다른 길목은 모릅니까?”

“죄송한데 모르겠네요. 이 길만 다녀봐서.”

롤랑은 그 언덕 사이를 흘긋 보았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길을 가로막은 바위라니. 아무리 봐도 수상하지 않은가.

“위험한 무언가일 수도 있으니 몇 명만 가보지요.”

그리 말하고는 롤랑은 자기 동료들, 그리고 기사들 중에서 특출 난 수십 명만을 데리고 언덕 사이를 향했다.

혹시 몰라 자신에게 축복까지 걸면서.

‘오딘께 내 영혼을.’

모지에게는 가속 주문까지 부탁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바위는 더욱 크게 보였다.

바위 겉에는 풀이 자라나있었는데, 잘 보면 풀 밑에는 뚜렷한 균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거북 등딱지와 같은 균열.

“괴물 같은데. 그것도 엄청나게 거대한.”

모지가 중얼거렸고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다가가지 마시오······”

일행은 더 접근하지 않고 멈춰 섰다.

그리 정지한 순간 바위가 꿈틀거렸다.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리려다 말았다는 사실에 분노한 사냥꾼처럼.

이내 바위가 일어섰다.

여섯 개의 다리가 바위, 아니 껍질 사이에서 뻗어 나왔다.

그리하여 일행은 거대한 거북 괴물과 마주했다. 거북이 아니라 악어에 가까운 흉포한 파충류 얼굴이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론소가 중얼거렸다.

“이제야말로 저거 용 아닙니까?”

이번에는 롤랑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저 괴물은 전통적인 용, 그러니까 날개 달린 도마뱀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디 용은 환상의 짐승이라 그 생김새가 정해져 있지 않은 법이다.

그런 관대한 기준에서 볼 때 저 거대한 거북은 실제 용이라 부를 만했다.

놈은 끔찍하게 거대한 악어거북처럼 생겼다. 거북 특유의 느긋한 인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생물.

그 주둥이는 살점을 찢어발길 집게발과 같았으며, 등딱지는 자칫 충돌한 무언가를 뚫어버릴 듯 뾰족하게 두드러졌다.

저 괴물이 불을 뿜은들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생각하던 차였다······.

괴물이 입을 벌렸다.

그 주둥이 안속이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그 열기를 보자마자 제이슨이 고함질렀다.

“피해!”

그와 동시에 롤랑은 방패를 앞세우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시뻘건 불길이 덮쳐오던 차, 고개 숙인 롤랑의 앞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불길을 막고자 제이슨이 푸른 야수를 불러낸 것이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야수의 포효는 오래가지 못했다.

푸른 야수가 달려들기도 전에 괴물의 두꺼운 목이 쭉 뻗어왔다. 마치 그 근육이 고무로 된 것처럼.

순식간에 덮쳐온 거대한 주둥이가 야수를 물어뜯었다. 온몸을 비틀더니 푸른 야수는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리 한 마리 죽인 후에야 괴물은 다시금 목의 길이를 줄였다.

롤랑은 방패 너머로 상황을 확인하며 굳은 침을 삼켰다.

‘불을 뿜으며, 공격 사정거리도 엄청나게 긴 괴물.’

롤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고함질렀다.

“뒤로 빠져!”

그 순간 괴물이 그 두꺼운 다리를 움직여 전진해왔다. 비틀린 코끼리 다리가 여섯.

그 거대한 여섯 기둥이 지면을 두들김에 따라 언덕 사이에서 돌들이 떨어져 내렸다. 지진 속에서 마치 지형이 돌진해오는 것 같았다.

다시금 괴물의 목이 늘어나 쭉 뻗었다. 내빼려던 기사들을 향해서. 그 목구멍에서는 불까지 달아올랐다.

롤랑은 일순 판단해야 했다. 저 늘어난 목을 벨까?

아니, 당장은 저 공격을 빗겨내는 것이 우선이다.

롤랑은 바로 달려 나가 그 늘어난 목을 방패로 들이받았다.

그 목에 가해진 충격은 괴물의 주둥이 방향을 바꿔놓았다. 이내 괴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은 기사들의 옆을 불살랐다.

자칫하면 수십 명이 불타 죽을 뻔했다.

롤랑은 이제 그 목을 베려 했지만, 괴물은 신음하며 다시 목의 길이를 줄였다. 그 수축되는 속도는 지나치게 빨랐다.

괴물은 계속해서 돌격해왔다.

롤랑이 옆에서 달려들어 발리사다를 휘둘렀다. 발리사다의 칼날이 빛나며 그 주둥이를 내리쳤다.

충돌의 순간, 불꽃이 튀겼다.

‘젠장.’

그러나 마치 바위를 친 듯 팅 하고 울릴 뿐, 박히지 않았다. 괴물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이 거슬리는 사냥감을 물어뜯고자 괴물이 주둥이를 벌렸다.

롤랑은 방패를 들어 그 앞을 가로막고는 외쳤다.

“내가 막을 테니 불러내, 제이슨!”

제이슨은 순간 뭘 막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 괴물은 불을 뿜지 않나? 그것을 맨몸으로 막겠다는 말인가?

미쳤나?

괴물의 벌린 주둥이 사이로 롤랑이 방패를 쑤셔 넣었다.

괴물이 주둥이를 닫았다. 그 턱 사이에 방패가 끼었다. 그 악력을 이기고 방패를 빼낼 수는 없을 듯했다.

과연 롤랑은 그러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괴물이 고개를 돌려 다시금 기사들을 향해 불을 뿜으려 했다. 그리고 롤랑은 방패를 억지로 당겨, 괴물의 주둥이 방향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내 뿜어져 나온 불길은 롤랑을 삼켰다.

제이슨이 비명 질렀다.

“야 씹할!”

그러나 불길이 걷힌 후 드러난 롤랑은 살아있었다. 열기로 인해 숨쉬기가 힘든 듯 그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어떻게든 호흡을 이어나갔다.

롤랑은 저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트롤 부락에 홀로 쳐들어갔을 때 그 온몸이 불타올랐지만 그래도 죽지 않은 바였다. 축복받은 피부와 재생력에 힘입어.

그렇다면 이번에도 죽지 않을 터였다. 그리 판단하고, 행동했다.

괴물이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머리를 후려쳤다. 롤랑은 허리 숙여 그 공격을 피해냈다.

괴물은 다시금 롤랑에게 주둥이를 덮쳐왔다. 롤랑은 방패로 막았지만 어쩔 수 없이 튕겨져 나갔다.

괴물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노렸다. 롤랑은 즉시 일어나 달려들어 늘어난 괴물의 목을 베었다.

그 목 근육이 얼마나 질기고 두꺼운지 깊숙이 베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괴성을 내지르며 괴물이 다시금 목을 수축시켰다.

이제 괴물은 분노에 롤랑을 노려보았다. 그 다리로 지면을 박차더니, 본격적으로 롤랑에게 몸을 부딪치려 했다.

괴물이 달려오며 또 다시 불을 뿜었다. 롤랑은 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 불이 다른 이들을 덮치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고자.

또 다시 괴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은 롤랑만을 집어삼켰다.

그런 식으로, 롤랑은 소위 말하는 탱커(tanker)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불을 맞아가면서.

직접 보면서도 제이슨은 제 눈을 의심했다.

게임도 아니고 저게 대체 뭔가?

‘미친.’

그리 당황하면서도 입술을 달싹인 바, 허공에 차원문이 열렸다.

“우트가르—트!”

괴물의 주둥이 옆에 뛰쳐나온 서리거인이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도끼날이 괴물의 머리에 부딪친 순간, 괴물은 그 거대한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러나 금세 그 충격에서 회복하고는 이내 서리거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거인에게도 불을 뿜으려던 바, 롤랑이 괴물의 주둥이 사이에 칼을 찍어넣고는 그 고개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롤랑은 불꽃에 휘감겼다.

“괜—찮—냐—!”

그 틈에 거인이 괴물의 목을 내리찍었다.

한편 다른 동료들도 놀고 있지 않았다. 모지는 유령 군마를 불러냈고, 가속 주문을 걸었다.

실바람이 휘감긴 군마 위에 알론소가 올라탔다. 그리고 돌격.

“발두르여!”

어느새 흑기사 소환물도 나타나 합세한 와중이었다.

거인, 롤랑, 그리고 흑기사에게 둘러싸여 괴물은 머리를 가누지 못하던 마당이었다.

이내 괴물은 방어를 선택했다. 그 머리를 등딱지 안으로 넣으려던 차, 알론소가 돌격해왔다.

그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창은 발두르의 빛으로 빛났다. 신 내린 창이 괴물의 귓가를 들이받았다.

창은 그 귓가에 박혔다.

피를 흘리며 괴물이 비명 질렀고 알론소는 환희했다.

“발두르 만세!”

< 강 - [3]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