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 [2] >
롤랑은 십의 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제발 그렇기를 바라며 물었다.
“구십육 층이라 하셨습니까?”
“예, 그리 들었어요.”
롤랑은 속으로 신음했다. 제발, 오딘이여.
“그게 가능할 리가? 칠십이 층까지도 제법 빠르게 올라왔지만 그런 속도는 낼 수 없었습니다. 주둔지를 주요 길목마다 세워 트롤 부족들을 갈라놓고는 하나하나 공략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역시 속도를 중시했지만 한 지역 공략하는 데만······”
“지금 원정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일단 여기저기에 정찰을 보내 계단이 발견되면 우르르 몰려가요. 그 길목에 트롤 부족이 있으면 한바탕 싸우고 다시 진격하는 식이죠.”
“그 길목에 없던 괴물들은 남겨두고서? 지금 후방에는 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단 겁니까?”
지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을까요? 나름 후환을 막겠답시고 트롤 부대는 최대한 쳐부수고 지나가나 보지만 그래도 숲속에 숨은 트롤 부대를 모두 발견할 수는 없으니.”
롤랑은 다시금 속으로 신음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트롤들만 치운답니까?”
“트롤 부락에 보물이 있었으니까요. 혹시 그 부대도 갖고 다니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죠.”
“세계수를 정벌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난쟁이의 보물이 목적인가 보군요. 그렇다면 이곳저곳 다 뒤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더 깊이 수색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데만 집착하죠?”
“트롤 부락이 칠십이 층 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트롤이 없는 층에는 보물도 없을 거다 이거죠. 게다가 저 위에 진정한 보물이 있다나요?”
“진정한 보물이라니, 그건 또 뭡니까?”
“옛 난쟁이 왕의 보물이, 신들도 탐낼 만한 난쟁이 유물들이 백 층에 잠들어 있대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롤랑은 숨이 막혀왔다.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런 불확실한 정보 때문에 막무가내로 위험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다들 이성이 마비된 거죠. 이미 성과가 있었거든요. 칠십이 층에서 보물을 얻어도 너무 많이 얻어버려서·····”
이어진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칠십이 층. 트롤들의 본거지에서 인간 군대는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난쟁이의 보물이 몇몇 트롤 부락에서 발견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공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원정대는 개의치 않았다. 직접 몸 바쳐 싸워야 할 병사들마저 전리품에 눈이 돌아가 몸 사리지 않고 뛰쳐나가는 마당이었기에.
트롤들은 이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위층으로, 계속 위층으로.
원정대 또한 트롤들을 쫓아 부리나케 위층을 향했다.
트롤들은 위층에 간 후로도 다음 층으로 올라 도망쳤는데, 이로써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트롤들이 무작정 도망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다 도망칠 만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또 다른 트롤의 본거지가 위층에 있을 터였다.
아마도 백 층에.
바로 그곳에 진정한 보물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어찌 됐든 롤랑이 듣기에는 불길했다. 백 층의 보물이 모두에게 인지되다니. 경쟁자들이 늘어난 셈 아닌가.
‘게다가 달아나는 적들을 무작정 쫓다니? 딱 군담 소설에서 패배하는 진영의 행동 아닌가? 물론 나보다야 저들이 군사 전문가일 테니 나름 올바른 판단이겠지마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지금 원정대의 공세는 비정상적이었다.
지난 원정대의 행적과 비교해 봐도 확연히 다르지 않나.
세계수 오십 층에서 인간 군대는 어찌 행동했나? 겨우 거인 부대 하나를 건드리기 껄끄러워 했다.
당시 원정대는 수만 군대가 있으면서도 미지의 보복을 두려워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당장 피해를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결국 롤랑이 그 부대를 물리친 후, 원정대는 한 층 한 층을 확실하게 정리한 다음에야 다음 층으로 전진해왔다.
지금 원정대의 행동은 그 정반대였다.
‘안 좋아, 안 좋아······.’
롤랑은 굳어지려는 표정을 애써 담담하게 유지했다.
지나가 물어왔다.
“그런데 롤랑 경, 군대를 이끄시나요?”
“그리 되었군요.”
“목적은 최전선이고요?”
“예.”
“그렇다면 혹시 길잡이 필요 없으세요? 아직 지도도 없을 텐데요.”
“길잡이?”
지나는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롤랑은 흘긋 모지와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듣고 있던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이 이내 대답했다.
“그래주신다면야 영광일 겁니다.”
보수 협상은 수월했다. 실랑이 할 것도 없이 지나 쪽에서 꽤 비싼, 그러나 지불하지 못할 것 없는 액수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롤랑은 지나와 그 동료 대머리 남자를 고용하기로 했다.
협상을 마치고서 롤랑은 두 동료와 함께 한 천막에 앉았다.
가장 먼저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이거 곧장 백 층까지 가야 할 느낌이지?”
“아마도.”
“씹할, 가능해?”
롤랑은 입을 다물었다. 불가능해보였으니까.
모든 괴물이 소탕되었고, 지도까지 있으며, 나름대로 길까지 닦아둔 오십 층까지 오는 데만 이 고생을 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괴물이 남아있는, 미개척 된 층을 오십 층 더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문득 모지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성검, 포기하는 게 어때?”
“음.”
“저쪽에서 무리한다고 우리까지 그래야 할 필요가 있어? 몸을 사려야지. 그냥 적당히 괴물과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내려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롤랑은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제이슨이 반대했다.
“안 돼. 가야 해.”
“너도 백 층까지 가는 게 가능할지 회의적이면서?”
“그렇다고 여기 처박혀 있다간 뒤처져, 마! 위에서 싸우는 현지인 새끼들, 최전선에서 괴물들이랑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레벨 업을 거듭하고 마법적인 유물까지 얻어서 대폭 강해질 거 아냐?”
“우리 지금 경쟁하는 거 아니잖아. 유저마다 랭킹 매겨주는 온라인 게임도 아니고.”
모지는 어떻게든 타이르고자 애썼지만, 제이슨을 상대로는 소용없는시도였다.
“경쟁이 아니긴? 우린 달랑 세 명이야. 현지인 둘 포함하면 다섯이고. 그런데 저들보다 우월하게 강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뭔데? 명성? 후발주자에게 따라잡힌 명성이 뭔 소용이라고? 딴 새끼들보다 약해지거나 동등해지는 순간 우리는 그냥 좀 잘 싸우는 병졸로 전락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 여기 있으면 황금사과는 어쩔 건데? 저 새끼들이 알아서 따먹든가 말든가 냅두자고?”
모지는 입을 다물었다.
이내 롤랑이 말했다.
“그래, 나도 제이슨 말에 찬성해. 느낌이 안 좋긴 한데 그렇다고 여기 남아있을 순 없지.”
그리 말한 순간 제이슨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저 구더기 새끼들은 여기 남겨두고 가자.”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잘 나가다 싶더라니 저 또 무슨 소리인가?
“뭐?”
“구더기들은 앞으로의 전투에 따라올 수 없어.”
“기껏 데려와 놓고 남겨두자고?”
“남겨두기 뭐하면 돌려보내든가? 병력이 필요하니 마니 해도 저것들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저것들 대체 뭔 쓸모야? 싸우긴커녕 걷지도 못하는 것들이.”
“보물 쟁탈전에서······”
“아군병력이 필요할 거다?”
제이슨은 코웃음 쳤다. 롤랑이 뭐라 반박하려던 차, 모지가 말했다.
“위에 갈 거라면 필요할걸. 대강 듣자하니 최전선은 지금 거의 탐욕의 진창 아닌가? 아군을 버리고 갈 이유가 없어.”
“그 아군이 제대로 된 아군이냐가 문제지!”
“설령 그네들이 다 허수아비라도 데려가야 해. 겉보기 몸집이라도 부풀려야 할 판이잖아?”
그 말에도 제이슨은 탐탁찮은 기색이었으나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결정되었다.
제이슨이 말했다.
“결국 데려간다 이거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저놈들 거기 갈 수 있기나 한 거야?”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롤랑이었다.
“가능할 것도 같은데.”
제이슨이 비꼬았다.
“어떻게? 업어서?”
“비슷해. 수레에 실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제이슨은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모지는 단번에 알아듣고는 중얼거렸다.
“돈 좀 들겠네.”
“그렇지. 너희 동의가 필요해.”
제이슨은 여전히 저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돈은 왜 드나?
그러나 물어보기는 창피했으므로 이내 대답했다.
“둘 뜻이 맞는 거 같으니 굳이 반대하기 피곤하겠다. 알아서 해.”
그리하여 롤랑은 모두가 쉬는 가운데 야영지를 벗어났다.
저편에서 거래를 마치고 쉬고 있던 청소부 무리에 다가갔다.
롤랑의 얼굴을 알아본 자들이 즉시 고개를 숙여왔다.
“아, 경?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청소부들 사이에서 롤랑은 유명인사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이익에도 관련된 인사였다. 그 뒤를 졸졸 따라붙기만 해도 주워 먹을 것이 많기로 소문났기에.
그랬으므로 롤랑이 무언가 제안한 순간, 청소부들이 보인 흥미는 그저 높으신 분에게 잘 보이고자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거래를 제안하고 싶소.”
롤랑의 말에 청소부들의 대표자가 웃어보였다.
“넘길 시체가 있으십니까?”
“아니, 운반할 짐은 시체가 아니오. 물자, 혹은 사람을 옮겨야 해. 그 수레에 실어서. 백 층까지.”
롤랑은 부랑자들이 힘겹게 운반하는 물자를 청소부들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그들의 걸음을 가볍게 하고자.
썩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는지 청소부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청소부 대표는 말했다.
“물론 전선에 함께하자니 분에 넘치는 영광을 주시어 감격스럽습니다마는, 말씀드리기 죄송스럽게도 저희는 당장 입에 풀칠하기 힘든 형편이라 쉬이 답변드릴 수가······.”
“인건비는 물론 드리겠소.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값을 쳐드리지.”
그 제안에도 청소부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이내 청소부 대표가 물었다.
“잠시 동료들과 의논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청소부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세계수에서 약자 중의 약자, 시체청소부 주제에 명망 높은 기사의 제안에 고심하다니 건방진 노릇이었으므로.
다행히도 대답은 경쾌했다.
“물론.”
한숨 돌린 대표는 자기 동료들에게 돌아가 이 제안을 말했다.
잠시 간의 의논 끝에 돌아온 청소부가 말했다.
“다시금 그런 기회를 주신 데 진심으로 감격을 표합니다, 경! 하지만 말씀드리기 죄송스럽게도, 정말 위험한 길이 될 터인즉 꺼려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 건방진 조건을 내걸어도 되겠습니까?”
“뭐요?”
“최전선에 이르기까지, 가면서 경의 군대가 해치울 괴물들의 유해는 저희가 차지해도 되겠습니까?”
괴물의 시체를?
롤랑이 듣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어차피 부수입 신경 쓰며 행군할 처지는 못 되었으므로.
그러나 롤랑이 물었다.
“괜찮겠소? 우리는 지금 빠르게 최전선까지 가야하고 그 과정에서 괴물 토벌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인데? 변변찮은 사냥은 못 될 거요. 당신들 몫으로 얼마나 떨어질지 장담할 수 없소.”
“괜찮습니다. 다름 아닌 롤랑 경의 군대 아닙니까? 롤랑 경 보시기에야 변변찮은 사냥이어도 우리 천것들 보기에는 어마어마할 테지요.”
롤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청소부는 지금 굉장히 기대하는 기색이었다. 롤랑으로서는 어쩐지 저자를 속이는 기분이었다.
인건비 협상이 오갔다. 청소부들이 제시한 가격은 꽤 비쌌지만, 롤랑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결국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생겼다. 뼈아팠지만, 롤랑은 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새삼 결심했다. 기필코 그놈의 보물을 손에 넣겠노라고.
******
낙오자 분대도 곧 합류하여 야영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세계수 내부도 낮에 밝고 밤에 어둡다. 날이 밝기 무섭게 롤랑의 군대는 행군을 시작했다.
그 뒤를 천 명의 청소부들이 뒤따랐다. 부랑자들이 짊어진 짐을 그 수레에 싣고서.
롤랑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수천 명의 물자를 옮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부들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문득 수레에 실린 짐에 이상한 물건이 보여 롤랑이 물었다.
“그 널빤지들은 뭐요?”
“아, 수레가 통과하지 못하는 곳에다 대기 위한 겁니다. 짐 실린 수레가 지나가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죠.”
롤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곳 세계수에서 저 일꾼들은 전문화되고, 발전하고 있었다. 당연히 직접 싸우는 전사들 또한 그러할 터였다. 아예 눈에 띄게 그 능력이 오르는 방식으로, 세계수의 전사들은 시시각각 성장해 나가리라.
결국 롤랑은 다시금 제이슨의 주장에 공감했다.
영웅이든 플레이어 캐릭터든 간에, 결코 정체해서는 안 되노라고.
< 강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