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 [1] >
세계수 하층은 안전했지만 롤랑은 수천 명에게 그저 걷게만 시켜도 사망자가 속출하리라 예상했다.
부랑자들은 일주일 동안만 잘 챙겨먹었을 뿐 그 몸이 이미 피폐한 상태였으니까. 장기간 행군을 견딜 체력이 못 될 터였다.
최대한 이탈자를 줄이고자, 롤랑의 지시 하에 무리는 거의 달팽이 기듯 세계수를 걸어 나갔다.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가려는 계획이었는데 그마저 한계가 있었다. 그 느린 행군조차 모두 힘겨워하는 마당이었다.
롤랑은 금을 잔뜩 쏟아 부어 한 달 치 물자를 구입해두었다.
그 물자를 수천 명이서 짊어지게 했는데, 부랑자들은 그 짐을 나르기 굉장히 힘들어했다.
“롤랑, 저기 저 사람들 죽으려고 해.”
모지의 말에 선두에서 가던 롤랑이 뒤를 흘긋 바라보았다.
헉헉거리며 주저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실에 별 감흥은 없었다. 행군 낙오자들. 군 시절, 행군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지 않았던가.
롤랑은 한 손을 번쩍 들고 선언했다.
“잠깐 휴식.”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통로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두들 한숨 쉬며 멈춰선 가운데 모지가 롤랑에게 속삭였다.
“쉬게 하는 걸로 끝이 아닌 것 같아.”
“더 문제가 있나?”
“자세히 봐, 롤랑.”
롤랑은 그 말대로 했다. 롤랑과 그를 추종하는 기사들이 앞장선 가운데 부랑자들은 그 뒤를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저 뒤쪽의 부랑자들을 롤랑은 유심히 살폈다.
그리하여 기사로 임명된 부랑자들이 눈에 띄게 여유로운 모양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축성된 벌꿀술의 효력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체력 좋은 놈들만 용병들 상대로 이겼으니 당연한 건가?’
롤랑은 일순 그리 추측했지만, 아니었다.
더 자세히 보고서 롤랑은 저 급조된 기사들이 어찌 저리도 멀쩡한지 알 수 있었다.
삼백 기사들 모두 짐을 짊어지고 있지 않았다. 식량도, 침구도 전혀.
설마 내버리고 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기사가 되지 못한, 다른 부랑자들에게.
롤랑은 순간 울컥했다.
‘저 씹할 것들이.’
저 엉터리 기사들은 지금 지나치게 기사답게 굴고 있었다.
지주, 하급 지휘관으로서 주변 사람들을 자기 수행원으로 부려먹고 있었다. 불과 반나절 전까지는 자신과 아무 차이가 없던 사람들을 하인 취급하고 있었다.
제이슨도 뒤늦게 이 상황을 알아챘다.
“저 새끼들이 돌았나!”
쉬다 말고 제이슨이 벌떡 일어섰다. 그 노한 모습을 보며 롤랑은 역으로 냉정해졌다. 그 모습에 자신이 비춰보였기에.
‘화날 만하지만, 순수하게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되는 상황이지.’
부랑자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이슨을 롤랑이 붙잡았다.
“잠깐.”
“뭐야, 마!”
“내가 할게.”
롤랑의 말에 제이슨은 벌컥 성냈다.
“또? 네가! 뭔 상황이건 혼자 다 나서려고 그러냐!”
“아, 제발. 제이슨.”
제이슨이 롤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리 눈씨름 하려다 말고 이내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롤랑이 부랑자들에게 다가갔다. 풀썩 엎어져서는 세계수 천장만을 올려다보던 부랑자들에게 물었다.
“걷기들 힘든가?”
멍해 있던 부랑자들은 롤랑의 갑작스런 출현에 당황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외쳐댔다.
“아뇨, 아닙니다!”
“아니, 힘들어 보이는데. 짐이 무거우신가 보군.”
롤랑은 그리 말하면서 장검 하나 달랑 찬 기사를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얼핏 보니 비렁뱅이 기사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저 고명하신 분이 자기 앞에 있다는 사실에만 안절부절 못할 뿐, 제 잘못을 뉘우칠 모양새는 아니었다.
한 바탕 설교라도 해야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시간만 잡아먹고 괜히 사기만 꺾는 꼴이 될 테니.
어쩔 수 없이 롤랑은 행동에 나섰다.
롤랑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주워들었다.
“나눠듭시다.”
그리 말하며 부랑자들의 짐에서 일정량을 자기 어깨에 걸었다.
부랑자들이 어어 하고 당황하는 차, 롤랑은 뒤돌아섰다. 그 등에 맨 짐들이 덜렁거렸다.
부랑자들이 벌떡 일어나 제지에 나서고자 했다.
“잠깐, 롤랑 경?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희가 어찌 존귀한 영웅께······”
“영웅이건 존귀한건 무슨 상관인가? 짐은 다 같이 짊어져야 해. 그 짐이 문자 그대로의 짐이든, 고난과 역경 따위 좀 더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짐이든 말이오.”
누구 들으라는 듯 쏘아붙이고는 롤랑은 일행 옆으로 돌아왔다.
다시금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무심한 척 부랑자들이 어찌 구는가 바라보았다.
과연 의도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백 명의 기사들이 부랴부랴 짐을 나눠받는 모습을 롤랑은 안도하며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앤지가 중얼거렸다.
“기사도 짐을 들어야 하나요?”
“왜 아니겠냐. 나귀나 짐말도 없는데 그럼 기사 본인이 들어야지 달리 어쩌겠어, 앤지?”
“그런 허드렛일은 종자의 일 아닌가요?”
그 질문에 롤랑은 방금 자기가 일을 잘 처리했노라 느꼈다. 방금 막무가내로 화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저게 보통 인식일 테니까.
“종자한테 짐을 떠넘겨? 내가 네게 이 가방 들라 시키면 두 발짝이나 걸을 수 있겠냐, 앤지?”
“아뇨······.”
“사지가 멀쩡한데 왜 짐 좀 옮기길 거부한단 말이냐? 몸 편하게 굴고 싶으면 펜을 들어야 한다, 앤지. 칼이 아니라. 무릇 기사라면 매일 뛰고,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 내리고, 다시 뛰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 말하면서 롤랑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몰래 살폈다. 그리하여 롤랑이 무슨 말을 하면 언제나 그렇듯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론소를 보고서 내심 안심했다.
‘그럭저럭 먹혀들었나 보지.’
이 상황에 이래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롤랑은 본디 군을 지휘할 만한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부족을 들키지 않으려면 그럴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할 테니까.
그러나 결국 수천 명을 이끌게 되었다.
다행히 저들은 워낙에 덜 떨어진 병력이라 아무리 명장인들 지휘할 수 없다는 변명이 통할 터였다. 그래서 데려왔는데, 역시나 돌발 상황 하나에 롤랑의 가슴은 격하게도 벌렁거렸다.
한편 제이슨은 뚱한 표정으로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모지가 작게 물었다.
“나설 상황 뺏기는 게 그리도 불만이야?”
“아니, 그보다는 네가 상황 터지니까 롤랑에게만 속삭인 게 더 불만인데?”
모지가 찔끔하는 차 제이슨이 계속 말했다.
“뭐 이해는 한다. 저 새끼 뭔 상황에서든 좆나 잘하니까.”
제이슨은 어느새 주변 부랑자들보다도 더 많은 짐을 짊어진 삼백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이슨이 새삼 느끼건대 저 현대인 동료는 정말로 영웅적이었다. 알론소를 비롯한 현지인 동료들은 물론 제이슨에게마저 종종 감명을 줄 정도 아니던가.
‘그리고 모지 이 새끼도. 본인은 못 느끼나 보지만, 가끔은 이 새끼 뭔 일 터졌는데 침착한 거 보면 내가 다 주눅이 들어.’
그 와중에 다시금 롤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충분히 쉬었소?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그 말은 순식간에 수천 군대 전체에 전달되었다. 부랑자 수천 명은 힘겨워 하는 와중에도 모두들 일어섰다.
그 수천 명의 움직임은 가히 일사불란하다 평할 만할 정도였다.
‘빌어먹던 부랑자들 주제에?’
그 물결치는 움직임을 보며 제이슨은 소름이 끼쳤다.
*******
무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더없이 느릿하게, 휴식을 취해가며 걸어갔지만 끝내 이탈자가 생겨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울먹이는 낙오자들을 롤랑은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삼국지 같은 옛 군담 소설 보면 행군 낙오자는 탈영으로 간주하여 참수하고 뭐 그러던데. 본을 보여 병사들의 정신력을 끌어올리겠답시고 말이야.’
물론 여기서도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좀 더 엄하게 굴어야 하나? 군에서도 행군 낙오자들한테 간부들이 버럭버럭 소리 질렀던 것 같은데······.
행군 속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반나절 거리를 하루 종일 걷는 판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세계수 최전선에 합류하기까지 며칠이 걸릴 듯했다.
‘자칫하다가는 백 층의 난쟁이 보물에 손대기 전에 딴 놈들 차지가 될지도······.’
그리 생각했지만 이내 롤랑은 저들을 몰아붙이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최전선에 가면 저들은 거의 확실하게 죄다 죽을 터요, 빨리 가길 재촉하는 것은 저들의 살날을 줄이는 꼴이었다.
생겨난 이탈자들은 따로 믿을 만한 기사들에게 맡겨 분대를 이루게 했다. 천천히 뒤따라오도록.
일련의 지시를 마치고는 롤랑이 분부했다.
“오십 층에서 합류합시다.”
이후로 롤랑은 무리를 이끌고 계속 전진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시간이 흘러, 마침내 오십 층에 도달했다.
세계수 오십 층은 이미 거점화 되어 있었다. 수많은 청소부들과 그들에게서 괴물 시체를 매입하는 박제상들이 보였다.
당장 많이 보이는 것은 당연히 최전선에서 입수된 트롤 시체였다.
‘트롤 시체에 가치는 없지만, 시체가 온전한 가운데 빨리 손질하여 박제로 만든다면 꽤 비싼 상품이 된다던가. 뿔쥐 박제조차 비프로스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그저 구경값만 받아도 돈이 될 정도라고······.’
수두룩하게 죽은 인간 시체는 청소부들의 수레에 실려 짐짝처럼 실려 나가는 가운데, 트롤 시체들은 박제사들의 세심한 손길을 받고 있었다.
그 박제사들을 위한 공방이 강변에 늘어서 있었다.
시체를 박제하다 보면 대량의 잔해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오십 층 강물에는 지금 온갖 오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체에서 나온 내장, 뇌수, 배설물, 표백 용액······.
롤랑은 그 폐수에서 눈을 돌렸다. 다행히 보고 싶엇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롤랑은 애써 기운차게 지시했다.
“저기 쉴 곳이 보이는군. 다들 가서 쉽시다.”
거점이 된 만큼 숙박시설들도 있었다. 여관도 있었지만 그것을 이용하기에는 너무 비쌌고, 롤랑은 헛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여관 말고도 천막촌이 세워져 있었다. 군대를 쉴 수 있도록 준비된 장소였다. 그곳을 사용하려면 조합에 돈을 내야했지만 이 정도는 지불할 만했다.
그리하여 수천 군대는 잠시 멈춰서 짐을 풀었다. 이제 낙오자들을 기다린 다음 하룻밤 쉬고 다시 나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던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랑 경?”
여자 목소리. 이곳 세계수에 있을 법한 여자는 오직 하나였다.
“지나?”
“기억하시네요. 예! 반갑네요!”
지나, 그 여자 모험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롤랑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잠시 눈을 껌벅였다.
저번에 마주쳤을 때와 달리 지나는 깨끗이 씻었고, 얼굴은 꼬질꼬질한 때로 덮여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러난 지나의 맨얼굴은 매력적이었다. 현대인이 보기에도. 그리고 롤랑이 보기에도.
그러나 그 얼굴만 계속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사가 그러다니, 무례한 짓이었다.
애써 태연하게 롤랑이 물었다.
“정말로 반갑군요, 지나 양. 앞으로도 계속 모험하시려는 겁니까? 이번에 한몫 잡아 은퇴해도 될 줄 알았는데요.”
“마지막으로 한탕 하려고요. 가뜩이나 요새 난쟁이 보물 얘기가 성화잖아요?”
“그래서 이후로 소득이 더 있었습니까?”
지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군대가 미친 듯이 휩쓸고 지나가서 당최······.”
“그리 쓸려나갈 만큼 트롤들이 약하지 않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요. 트롤들이 숲에서 치고 빠지기만 반복해도 군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기 충분할 텐데요.”
“맞아요. 트롤들이 약하진 않죠. 트롤 하나 죽이려면 인간 병사 서너 명이 죽어나가는 판인데 지휘관들이 그 정도 손실쯤은 황금 좀 얻으면 다 보상할 수 있다 여기는 모양새더군요. 트롤들이 기습하여 치고 빠지는 식으로 이쪽에 피해를 주고자 하면, 그냥 수십 명 죽든 말든 무시하고 전진하는 마당이에요. 병사들이 벌써 만 명은 죽었을 걸요? 세계수 정벌이 시작된 이래 가장 빨리, 많이 죽고 죽이고 있어요.”
이 상황에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 해야 할지 롤랑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헛기침하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몇 층에나 도달했답니까?”
그리고 들려온 대답에 롤랑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지나가 말했다.
“아마 구십육 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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