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77화 (77/164)

< 관문 앞 - [5] >

멍하니 뒤돌아선 비카파에게 롤랑은 작게 말했다.

“기만당했다 느끼나 본데, 미안하지만 이보다 더 그대를 배려할 방법은 생각해내지 못했소.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오. 하지만 달리 어쩔 수 있었겠소? 난 당신의 법을 따랐고, 존중하고자 노력했소.”

“저 구더기들을 내 도시로 처넣는 것부터가 존중이 아닌데.”

비카파는 으르렁거리다시피 했지만 롤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도시를 더럽히지는 않을 거요. 그럴 기회를 갖기도 전에 거의 다 세계수에서 죽고 말 테니. 당신이 걱정할 만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요. 오히려 도시 사정이 한결 나아지면 모를까.”

“나아져? 어떻게?”

“저 부랑자들 탓에 여러 곤란을 겪었다 들었소. 저들 탓에 비프로스트에 오려던 물자는 약탈당하고, 성벽 바깥을 개척하려는 시도는 하지도 못하는 마당이라고? 이제 나는 저 골칫덩이들을 전장으로 이끌 거요. 거기서 저들 대부분은 전사할 것이고, 그걸로 끝날 거요.”

비카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롤랑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시오. 세계수가, 괴물이 저들을 맞이하도록 내버려두시오. 이 험한 세상에서 뺏기고 뺏기다 못해 여기까지 몰린 자들이오. 저들에게서 죽음마저 빼앗지는 말아주시오. 그래주시겠소?”

비카파는 그저 입 다물었지만 롤랑은 그 눈빛에서 암묵적인 동의를 읽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비카파, 비프로스트의 영주로서 신생 기사들에게 축복의 말을 부탁하오!”

이내 비카파가 삼백 명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환호성에 묻혀, 방금까지 둘의 대화는 저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과연 저 엉터리 기사들에게서 비카파를 향한 적대심은 읽을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와 희망만이 넘쳐흘렀다.

결국 비카파가 말했다.

“서임된 기사들에게 축복이 있어라! 그리고 그 새로운 신분에 주어지는 특권을 말하자면······”

비카파가 저들에게 읊어준 특권 목록에는 수행원을 대동할 권리도 섞여있었다. 그것을 듣고서 롤랑은 정말로 안심했다.

비카파가 계속 읊어나가는 가운데 롤랑은 오스론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새끼가 문제군.’

오스론이 빈민들을 후원하는 의도를 롤랑 또한 의심해왔다. 언젠가 봉기할 때를 대비한 투자, 혹은 아예 공작활동을 위한 자금공세로 여겼다.

‘그 잠재적인 봉기군을 내가 사지로 데려가려는 판인데. 오스론 저놈은 나한테 무언가 아쉬운 말을 하지 않았단 말이지. 저들 대부분이 죽으리라 말해줬는데도 오스론은 그저 축복할 뿐이었다. 어째서?’

그 사실이 롤랑은 못내 불안했다.

대체 저 추기경의 꿍꿍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겉으로 봐서는 그 의도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오스론은 어쩌면 자신에게 더 유리하도록 이끌 수도 있을 법한 상황에 그저 말참견만 했을 뿐이었다.

오스론은 자기 옆에 선 꼬마, 지금 주변의 모든 것에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앤지에게 말했다.

“잘 봐두어라, 앤지. 보통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보지 못할 광경 아니냐. 이런 경험이야말로 삶의 보배요 진정한 재산이 되는 법이다.”

“네, 예하.”

여기까지는 성직자답게 인자했다. 그러나 다음 말은 그렇지 않았다.

오스론이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충고하마. 저 새로이 기사가 된 삼백 명······ 저놈들 다 편력기사만도 못한 강도 기사라 생각하려무나.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가까이 접근하지도 말거라. 롤랑 경 옆에 꼭 붙어있어. 알겠느냐, 앤지?”

유난히 청력이 좋은 롤랑만이 앤지 이외 유일하게 그 말을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고픈 것을 겨우 참았다.

‘나름 감동스러운 연출을 꾸며냈는데 과연 저 추기경을 감화시키기는 무리였나 보지? 하여간 저 성직자 인성하고는.’

속으로 혀를 차며 롤랑은 앤지와 비슷한 체구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오스론 말고도 성격파탄자가 저기 더.’

아말릭처럼 온몸을 가린 누군가가 일행 옆에 서있었다. 그 체구는 아이처럼 조그마했다.

얼핏 보면 아말릭이나 알론소의 종자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저 조그만 것은 말 그대로 난쟁이였다. 종족적 의미에서의 난쟁이, 니벨룽. 그 역시 이번 원정에 따라오기로 했다.

지상에서 무탈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계수 위에서는 토벌이 벌이지고 또 벌어져 어느덧 팔십오 층을 넘어섰다고 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정신 나간 속도였다. 소식이 전달되는 속도를 감안하면 이미 더 올라버렸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번 탐색으로 단번에 백 층까지 도달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 저 난쟁이를 대동했다.

어쩔 수 없으면서도 불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다들 난쟁이의 보물을 노리는 마당에 진짜배기 난쟁이의 존재가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저 난쟁이의 성격부터가 문제 아닌가.

롤랑은 난쟁이를 엿보며 빌었다.

‘뻔한 배신은 하지 않기를. 배신할 것 같은데 배신하지 않는 반전을 보여줘라, 제발.’

이후 일은 일사천리였다. 비프로스트 백작의 공인 하에 삼백 기사와 롤랑의 추종자들은 수천 부랑자들을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수천 명이 비프로스트 관문을 통과했다.

“드디어······.”

웬 부랑자가 감개무량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기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부랑자의 아내는 오스론 추기경의 지원 하에 시내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랑자 본인은 즉시 세계수에 올라야 했다.

이내 세계수 뿌리 앞에 도달했을 때 부랑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지체할 틈이 없었다.

롤랑은 바로 지시했다.

“자, 갑시다.”

세계수 뿌리에는 다시금 계단이 건설되어 있었다. 수천 명이 그 위를 밟고 오르는 가운데 배웅하러 온 비프로스트 백작이 축사를 건넸다.

“고생들 많았겠지만, 잘들 가시오. 전사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자기 궁성에 돌아오기 무섭게 비카파는 침대에 널브러졌다. 심신이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방문이 열렸다. 흘긋 보았더니 들어온 것은 맨발 여자였다.

“다 끝났어?”

“일단은. 모르가나.”

비카파는 모르가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며칠 전, 비카파는 다시 한 번 성벽 밖에 나가 살아남은 육천 명을 마저 소각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요청을 모르가나는 거부한 바였다. 꼬리를 너무 길게 뻗고 싶지는 않다던가.

모르가나가 물었다.

“어땠어?”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소. 영웅들이 입회한 가운데 천사가 심판을 보더군. 말이 되나, 그게? 한낱 용병과 거지들의 싸움에 왜 발키리가 끼는 거야?”

“그년들이 원래 낄 데 안 낄 데 못 가리지. 그래서 그놈의 영웅들은? 네 걱정대로 오스론과 손잡고 널 몰아내려 하던?”

모르가나의 물음에 비카파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뭐······ 그렇지는 않았소. 특히 그놈의 롤랑, 내 예상보다 상식적이더구려. 내가 뭘 걱정하는지도 대강 아는 눈치였소. 그 구더기들을 세계수에 데려가 소모시키겠노라 하더라고.”

모르가나는 히죽 웃었다.

“내 말대로지?”

“그래요, 롤랑 그자가 거인을 가지고 놀듯 족칠 땐 그저 불가해한 괴물로만 보였지만, 막상 보니 말이 통하긴 통할 것 같아. 모르가나 당신 말대로······. 덕분에 확신했소. 날 진정 위협하는 건 그놈의 영웅들이 아니라 오스론이오. 그리하여 다시금 부탁하건대, 놈을 죽여줄 수 없소?”

모르가나는 입가의 미소를 거뒀다.

“안 된다고 말했잖아?”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놈의 영웅들이 놈 곁을 벗어났잖소? 지금 오스론은 무방비하오.”

“그래도 안 돼. 난 내 거래상대를 죽이지 않아. 설령 옛 거래상대라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놈, 메디아 혈족이잖아? 프레이의 직계혈족을 손수 죽이는 건 좀.”

“후환이 두렵소?”

“그래. 당장 보복 당하지는 않을지라도, 혹시 또 모르니까.”

“당신이 궁니르의 맹세를 중시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요? 후환이 두려워서? 난 당신처럼 그 맹세를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을 처음 보았소. 깰 수 없는 맹세니 뭐니 해도 가장 잘 깨지는 맹세 아닌가?”

비카파는 은행가로서 많은 채무자들을 접했다.

돈 꾸러 온 자들은 기필코 변제하겠노라 약속하며 쉬이도 궁니르를 입에 담았다. 그 맹세를 어긴 자들은 비카파의 용병들이 손봐주었지만, 끝내 무사히 달아난 자들도 꽤 되었다.

그런 경험으로 볼 때 비카파에게 궁니르의 맹세 따위는 그저 바람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카파보다 더 오래 살아온 저 마녀는 그 맹세에 실질적인 효력이 있다는 듯 굴고 있었다.

모르가나가 말했다.

“오래 살고 싶으면, 거짓과 배신은 하지 말아야 해. 한 번 금이 간 신용은 어찌 회복하기 힘든 것이거든.”

“동감하오. 은행가로서. 그런데 은행가 아닌 마녀에게도 신용이 중요한가?”

“물론이지.”

“신들조차 배신하고 거짓말할 텐데? 오딘마저 그랬잖소. 왜, 오딘이 유명한 늑대 펜리르를 마법의 끈으로 속박했을 때, 펜리르에게는 그저 근력시험일 뿐이라 꾀서는 꽁꽁 묶어버렸다고······.”

모르가나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 배신의 대가는 언젠가 오딘에게 돌아올 거야.”

“실종된 것도 모자라?”

“그래. 설령 오딘이 복귀하더라도, 그 배신행위의 대가는 기필코 치러야 할 거야. 오딘의 속임수에 당해 묶여버린 이래 펜리르는 천 년 동안 송곳니를 갈아왔지. 그리고 그 아비인 로키가 풀려났어. 펜리르도 곧 풀려날걸. 어쩌면 그 늑대에게 복수의 기회가 돌아올지도 모르지. 배신자를 한입에 삼켜버릴······.”

비카파는 그런 말에 관심이 없었다. 신화적 괴물과 신들. 손에 닿지도 않는 존재들 아닌가. 그보다는 주변에 있는 것들에 더욱 흥미가 있었다.

“화제를 돌립시다, 모르가나. 그 외에도 당신과 상의하고픈 일이······”

비카파의 말에 모르가나는 난색을 표했다.

“상의? 나중에 하면 안 돼? 나 지금 어디 가야하는데?”

“간다니? 어디 말이오?”

“세계수.”

비카파는 눈을 크게 떴다.

“거긴 왜?”

“난쟁이의 보물을 얻으러. 탐나는 게 있거든. 타른헬름이라고 아나? 거의 모든 변신술사들을 능욕하는 고약한 물건인데······.”

“들어는 봤소. 그걸 얻으러 간다고?”

“응.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난쟁이 하나를 납치했거든? 지금 놈은 내 손아귀에 없지만 그래도 기회는 있으리라 믿어. 놈들을 따라잡으려면 서둘러야 할 거 같네. 그럼, 이만.”

그 말과 함께 여인은 작아지더니 까마귀의 형상으로 변했다.

까마귀는 홰를 치고는 이내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저기 보이는 세계수 뿌리를 향해서.

*******

사천 명이나 이동해야 하는 와중에 승강기는 이용할 수 없었다. 일 층부터 최전선까지 걸어가야 할 터였다.

모두 입구를 넘어왔다.

롤랑의 기사대는 세계수 하층을 걸어 나갔다.

모지가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왔더니 풍경이 상당히 달라졌네.”

더 이상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말라는 경고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 최하층에서 유해 무더기와 경고문은 사라졌다.

그 대신 양 옆으로 늘어선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서 호객 소리가 들려왔다.

“보물지도요! 보물지도!”

별 수상한 물건들은 물론 생필품이나 약제 따위도 여럿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기저기 널린 괴물 유해들이었다.

“박제! 박제가 헐값!”

제이슨은 비쩍 말라붙은 하피 박제를 보고서 거기 제시된 가격에 기겁했다.

“삼천 닢? 장난해? 농가 한 채 가격이네. 저걸 누가 사?”

박제상은 화내려다 말았다. 이쪽 무리의 규모와 그 선두에 선 기사들을 보았으므로. 이내 비굴한 미소를 내보였다.

“아이고, 나리. 사시려거든 더 싸게도 가능한데요.”

“아, 됐수!”

하피 말고도 수많은 괴물의 유해들, 모피와 박제들이 팔리고 있었다.

나무코끼리 상아, 날개호랑이 모피, 식인타조 알 껍질, 뿔쥐 박제, 산 채로 잡혀와 우리에 갇혀있는 말코원숭이 새끼 등등.

문득 웬 미라가 롤랑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 미라인 줄 알았으나 잘 보니 그것은 트롤의 미라였다.

참지 못하고 롤랑은 표정을 굳혔다.

아말릭이 물어왔다.

“왜 어두운 표정이십니까, 롤랑 경?”

자기가 죽인 트롤일지도 몰라 착잡해졌노라 고백할 수는 없었다. 용맹무쌍한 기사 롤랑답지 않을 테니까.

롤랑은 고아하신 기사답게 대답했다.

“이 광경이 맘에 들지 않아서 말이오. 점령지에서 얻은 사냥감들을 내다팔아? 정복자들의 행태군. 벌써부터 세계수에서 벌어지는 것이 전쟁이 아니라 정복인 것처럼 굴고들 있어.”

아말릭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들 활기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습니까? 세 영웅이 강림한 이래 세계수 하층은 완전히 안전해졌습니다. 다 영웅들 덕분입니다. 그저 세 명의 출현만으로 저 변화가 생긴 거예요. 자랑스러워 하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토록 많은 것을 베푸셨음에.”

갑작스러운 칭송에 롤랑은 멋쩍어졌다.

“참으로 긍정적인 시선이로군.”

“그리고 저 역시. 베풂 받은 한 명으로서 저들을 대신해 감사를 표합니다.”

롤랑은 아예 웃어버렸다.

“그만. 이러다가는 찬가라도 한 수 지어보이겠소? 되었소. 어차피 정작 베풀어야 할 것은 못 베푸는 마당에.”

“못 베풀다니요? 제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우리가 얻으려는 보물이 바로 황금사과라는 것, 기억하시오?”

“예, 물론.”

“그걸 원하지 않소, 아말릭? 황금사과는 모든 병독과 저주를 풀어버리고 심지어 회춘까지 가능한 묘약이오. 어쩌면 나병도 치유할 수 있을지 몰라.”

아말릭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원하지 않습니다. 오스마 여왕 폐하를 치유코자 얻으시려는 거 아닙니까? 결코 탐내지 않겠노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스마 여왕께서 붕어하시면 메디아 가문은 대가 끊깁니다. 국가적 위기죠. 피부병 하나 치유하자고 웬 문둥이가 그걸 먹는다면 그건 배신행위임은 물론 매국행위일 겁니다. 궁니르에 맹세컨대, 결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궁니르에 하나 맹세하겠소. 오스마 여왕 폐하께 황금사과를 진상하고도 하나 더 얻게 된다면, 그 사과는 당신 거요.”

아말릭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떨구었다.

*******

< 관문 앞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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