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76화 (76/164)

< 관문 앞 - [4] >

롤랑도 술통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자신이 직접 주문하여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러나 본인으로서도 저 물건의 의의를 알지 못했다.

오딘이 지시한 대로, 롤랑은 저 벌꿀술에 며칠 동안 기도하며 오딘의 손길을 빌었다. 그러니 뭔가 축복이 깃들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축복이?

신들이 아무리 강력한들 그들이 지상에 끼칠 수 있는 힘은 제한되어 있다.

레벨 업, 그러니까 신의 선물 또한 사람들이 영혼을 바쳐서야 가능할 뿐이다.

아마 그것이 신들의 한계일 것이다. 만약 신들이 아무 대가없이 인간을 축복하여 그들을 강인하게 해줄 수 있었다면 진작 그리 했을 테니까.

‘그런데 교수당한 신세인 오딘이 뭘 할 수 있단 건가?’

대강 추측하기로도 근력 따위를 늘려주는 식의 직접적인 축복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대체?

‘그 축복이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길.’

그리 빌면서도 롤랑은 술통에 다가갔다. 그 내용물을 국자로 퍼서 잔에다 가득 채워 넣었다.

벌꿀술이 흘러넘치는 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자, 맨 먼저 나설 자는 누군가!”

그 외침에 응하여 첫 도전자가 앞으로 나섰다.

곧이어 도전자를 맞이할 용병도 나왔다.

“서로 다치지 않게 합시다.”

용병의 말에 도전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예······”

도전자는 먼저 나선 것치고 쭈뼛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탓이 아니라 저 용병과 자신의 체구 차이를 실감한 탓이었다.

롤랑도 둘을 보았다.

도전자는 이들 중에서 꽤 큰 편이었지만 저 용병보다는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 둘의 전투기술을 비교하자면 그보다 더 큰 차이가 있을 터였다.

물론 이후의 대결들 또한 모두 그럴 터였다.

그 차이를 뒤집기 위해 롤랑은 지난 며칠간 준비해왔다.

일주일간 롤랑은 부랑자들에게 성수를 부어 세례를 주었다. 그 빈약한 신성을 보강해 조금이라도 축복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자.

롤랑이 도전자를 축복했다. 단순 종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 신성 주문으로서의 축복을.

“오딘께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롤랑의 축복에 도전자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이마에 회색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빛은 희미했다.

그 빛의 세기만큼이나 주문의 효과 또한 미미할 터였다. 약간이나마 도움은 되겠지만, 게임처럼 극적인 효과는 없을 터였다.

이 둘을 용병은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눈앞에 소문이 자자한 영웅이 서있었다. 자기 대결 상대의 편으로서.

용병은 불안하게 물었다.

“그럼 준비?”

둘이 막 맞붙으려던 차, 구경꾼들 사이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천사여!”

대결하려는 두 명의 위로 발키리가 날아올랐다.

구경꾼들은 물론 시합의 당사자인 둘조차 그녀만을 바라보는 와중이었다. 두 명의 대결 당사자 사이에 발키리가 내려앉았다.

발키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까마귀가 이 시험의 증인이 되리라!”

사방에 기도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 열띤 분위기 속에서 비카파는 주눅 들었다.

‘씹할, 날잖아.’

대체 저 천사의 존재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저 영웅들이 진짜든 아니든 간에 신들은 저들의 편이라고?

그렇다면 신들 앞에서 은행가는 그저 굴복해야 한단 말인가?

함성이 더욱 커졌다. 영웅 중 하나, 모지가 발키리 옆에 선 것이다.

천사와 고대의 마법사. 이 쓸데없이 신비로운 입회인 앞에서 용병은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었다.

애초에 그런 연출을 위해 저 천사를 불러낸 것이었다.

이 신성한 분위기 속에서 두 남자는 대결을 시작했다.

대결 방법은 간단했다. 둘 다 끝을 붕대로 감싼 장대를 들었고, 그 수련용 무기를 창처럼 휘둘렀다.

의외로 먼저 공격한 것은 도전자였다. 용병이 방어하고자 장대를 허리 위로 들어 올린 가운데 도전자가 덮쳤다.

“아으, 아아악!”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며 장대는 뻗었다.

탁 하고, 용병은 수월히도 그 공격을 막아냈다. 그저 창을 휙 휘두르기만 했을 뿐인데 도전자의 장대는 그 공격 방향을 잃어버렸다.

큰 빈틈이 생겼지만 용병은 바로 반격에 나서지 못했다.

용병의 어깨가 움직인 순간 롤랑이 외쳤다. 거의 포효하듯이.

“지금이오!”

둘 모두 움찔했고, 용병은 공격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대결이 거의 초기상황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둘은 다시금 맞붙었다.

이번에도 도전자가 공세에 나섰다.

부랑자는 그저 마구잡이로 장대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이번에도 이해 못할 괴성을 내지르며.

그 어설픈 공격에 용병은 당황했지만, 뒤로 밀려났다.

그 공격의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반격할 수 없었다. 도전자의 저 이상한 연격이 기괴하게도 빨랐기에.

방금 전 모지가 입술을 달싹였고, 도전자의 몸에 실바람이 휘감긴 것을 구경꾼들은 포착하지 못했다.

도전자가 기괴한 곡선을 그릴 때마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쯤 되니 맹공이었다.

용병이 당황하여 어어 하는 사이 결착이 났다. 방어하는 측은 물론 공격하는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궤도로 뻗어나간 장대가 용병의 옆구리를 쳤다.

그로써 끝났다. 이겨버린 도전자마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롤랑이 재빨리 선언했다.

“승자가 나왔소!”

롤랑이 승리한 도전자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지켜보던 부랑자 무리에서 함성이 일었다.

롤랑이 벌꿀술이 든 술잔을 내밀었다.

“영광스러운 승리였소. 치하의 축배를 받으시오.”

도전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잠시 후에야 이 상황에 납득했는지 활짝 웃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경!”

그러고는 롤랑이 내민 술을 들이켰다.

롤랑은 이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속내는 불안과 초조로 요동쳤다.

축복에, 반칙 비슷한 것에, 마법사의 주문까지 동원해서 억지로 이겼다. 첫 시합인즉 승리로 기세를 북돋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결과였다.

매 시합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이 비정상적인 짓을 벌이다가는 지켜보던 누군가 눈치 챌지도 모르니까.

애초에 마법적인 주문은 그저 입술 달싹일 뿐인 행위가 아니다.

주문은 정신적 피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정신 능력치가 ‘9’에 달하여 사실상 플레이어 캐릭터로서 가장 높은 정신성을 지닌 모지조차 수천 명에게 주문의 혜택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보이는 자에게만 간혹 도움을 주어야 할 터였다.

‘그마저도 승리를 보장하지 못하겠지마는.’

다음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방식은 같아도 인원수는 달라졌다.

이제 한 명씩 대결할 수 없었다. 시험을 받아야 할 인원이 사천 명이나 되었으니까.

용병과 부랑자 측에서 각각 스무 명씩 나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부랑자들 앞을 롤랑이 지나가며 축복했다.

“오딘께서 그대들과 함께하길.”

그리 중얼거리며 덩치 좋거나 혈색 좋은, 그러니까 이길 수도 있을 법한 부랑자에게 주문의 힘을 부여했다.

도전자들의 낯에서 미약한 빛이나마 반짝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롤랑은 대결장에서 물러섰다.

그리하여 마흔 명이 대결하는 가운데, 가장 열심히 움직인 것은 모지였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모지는 주문을 읊어 어느 도전자를 가속시키거나, 간혹 눈이 마주친 용병에게 사안의 빛을 번뜩여 그 몸을 마비시켰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무 도전자들 중 승자는 겨우 네 명이었다.

“잔을 받드시오!”

롤랑은 그 네 명에게도 축배를 주었고, 다음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번 도전자들 가운데서 승자는 세 명 나왔다.

이후로도 대결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열 명 중에서 한 명만이 겨우 이길까 말까 했다. 스무 명씩 대결하는 가운데 용병 중에서 패배자는 두셋씩만 겨우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용한 결과였지만, 그 전적을 보며 비카파는 희망을 얻었다.

발키리를 본 순간 비카파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신들의 도움에 힘입어, 저 부랑자들에게 정체 모를 기적이 깃들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 기적에 말미암아 이쪽 용병들을 죄다 때려눕힐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막상 결과는 과연 이쪽 용병들의 선전이 아닌가. 비카파는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시험이 끝나면 부랑자들 중에 승리자는 약 이삼백 명쯤 나오겠군. 그것도 꽤 많은 수지만, 어쨌건 당초 걱정했던 만큼 많지는 않아.’

그 정도야 뭐 도시에 들일 수 있었다. 기꺼이 그리할 작정이었다······.

결국 모든 대결이 끝났을 때, 도전자들 중 승리자는 삼백 명을 겨우 넘겼다.

이 순간 비카파는 크나큰 안도와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괜찮아, 아주 괜찮아. 사실 저 병신들 중에서 삼백이나 이기다니 놀라운 결과지. 롤랑 저놈으로서도 체면이 섰겠군그래.’

여유를 되찾은 나머지 몸에도 활력이 돌아왔다. 비카파는 성벽을 성큼성큼 내려와 롤랑 앞에 섰다.

“훌륭하오, 정말로 훌륭하오!”

그리 외치며 비카파가 손을 내밀었다. 롤랑은 이쪽을 흘긋 바라보더니 이내 악수를 받아들였다.

힘 있게 손을 흔들며 비카파가 치하의 말을 건넸다.

“놀라운 선전이었소! 저 구더기들을 어찌 조련한 거요?”

롤랑이 정정했다.

“구더기라니? 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오.”

비카파는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아, 그렇군! 이제 전사지! 비프로스트에 삼백 명의 전사가 새로 생겼어! 참으로 경탄스러운 일이오! 거기, 승리한 자들! 전사들이여! 비프로스트는 그대들을 환영하오이다!”

그리 외치기 무섭게 성벽 위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비카파 또한 함께 환호하고픈 심정이었다. 걱정한 것보다 훨씬 일이 잘 풀렸지 않은가. 이제 비카파는 저 삼백 명에게 연회라도 베풀어주고픈 심정이었다.

문득 롤랑이 삼백 명의 승리자에게 다가갔다.

다시금 치하하려나 보지? 비카파가 그 광경을 흐뭇하게만 바라보는 가운데, 롤랑과 승리자들의 옆으로 웬 종자들이 수레를 끌고 왔다.

그 수레의 내용물은 장검들이었다. 딱히 못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장검들.

롤랑은 수레의 장검 한 자루를 들어올렸다. 그 칼끝을 맨 앞에 있던 승리자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모두 무릎 꿇으시오.”

삼백 명은 일제히 롤랑을 향해 무릎 꿇었다.

고개 숙인 승리자의 어깨에 롤랑이 장검을 얹었다. 칼의 옆면으로 그 어깨를 세 번 쳤다. 툭, 툭, 툭.

그러면서 롤랑이 선언했다.

“나 푸른 피의 권한으로 그대에게 이 칼과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노라. 이제 그대들은 기사라. 이후로 그대의 영혼은 누구의 것인가?”

승리자들의 대표가 부르짖었다.

“전쟁의 주인, 오딘의 것이나이다!”

계속해서 롤랑이 물었다.

“이후로 그대의 심장은 누구의 것인가?”

“이 기회를 주신 분, 바로 그대의 것이나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명예! 명예만이 오롯이 나의 것이나이다!”

“그 명예를 위해 그대는 적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들고, 전우의 곁을 지킬 것이며, 신명을 받들어 진리를 수호할 것이며, 과부와 성직자들을 대가없이 수호하리라 서약하는가?”

“기꺼이 서약하나이다!”

“이 서약의 증인이 될 입회인들은 앞으로 나서시오.”

그 말에 따라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발키리, 그리고 오스론이 다가왔다.

추기경 오스론의 존재는 이 기사 서임에 법적인 효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발키리의 존재는 이 서임에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

발키리가 입을 열었다.

“그 맹세를 궁니르에 달겠는가?”

“예, 궁니르에 맹세코!”

“이 맹세를 깬 자는 파멸할 것이요, 그 혼은 추락하여 헬에 들끓는 사냥개들의 노리개로 전락할 것이다.”

이 종교적인 광경에 지켜보던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침묵만이 깔린 가운데 롤랑이 말했다.

“일어서라, 기사.”

그리하여 삼백 명의 기사가 이 자리에 섰다.

영웅들이 다가왔다. 세 영웅은 저 삼백 기사들에게 몸소 수레에 실린 장검을 한 자루씩 내주었다.

이 상황을 비카파는 그저 아연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대체 뭐가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문득 비카파는 롤랑의 시선을 느꼈다. 흠칫하는 차, 롤랑이 말을 걸어왔다.

“저들은 이제 기사요. 인정하오?”

비카파는 겨우 대답했다.

“아, 음. 인정하오.”

“그리고 기사에게는 시내에 열 명의 수행원을 들일 권한이 있지. 그렇지 않소?”

비카파는 눈을 크게 떴다.

“뭐?”

“기사, 열 명. 준남작, 열다섯 명. 그 이상의 귀족이라면 최소 쉰 명의 수행원이 보장되잖소. 얼마 전에 직접 말했을 텐데?”

그제야 비카파는 저 위대하신 영웅의 수작을 알아챘다.

삼백 명의 기사가 새로이 생겼다. 그들에게 부랑자들 열 명씩 딸려간다면? 그리고 롤랑을 추종하는 기존의 기사들도 각기 부랑자들 열 명씩 데리고 간다면?

비카파는 분개하여 말했다.

“장난하오! 장난해? 즉석에서 기사로 만들고, 권한을 부여해? 누구 맘대로!”

롤랑은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메디아 후작으로서 기사단체를 거느릴 권한이 있소. 물론 그 자격을 부여할 권한도. 이 권한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메디아의 여왕이신 오스마 폐하인 것 같군.”

비카파는 억울함에 반쯤 미쳐버렸다.

“이건 사기요!”

“어째서?”

“애당초 이럴 거면 대결은 왜 한 거요? 애초에 승리자를 간추릴 필요가 없었군그래! 결과야 어떻든 기사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내려는 거 아니었소?”

“인정 못하겠다 이거요?”

“당연히 인정 못해! 기사의 권한으로 수행원을 들여? 미안하지만 그 특권을 인정하는 것은 영주인 내 재량이오! 당신 억지야 어떻든······”

“과연 이 상황이 억지로 보이는가?”

롤랑이 웃었다. 비카파는 울컥했지만,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롤랑은 비카파의 뒤, 그러니까 성벽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흘긋 뒤를 돌아본 비카파는 충격을 받았다.

발키리를 향해 기도하는 자, 롤랑을 향해 환호하는 자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이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비카파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연극이었다.

롤랑은 어차피 필요한 만큼 기사로 임명했을 것이다. 그에 앞선 대결은 그저 새로운 신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연출에 불과했다.

< 관문 앞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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