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문 앞 - [2] >
롤랑은 이 상황을 어찌 정의해야 하나 고민했다. 폭동? 어감이 좋지 않다. 그렇다면 반란? 혁명?
그런 과격한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이 무리의 목적은 그저 도시에 들어가는 것뿐이므로.
그러나 그에 대응하는 용병들의 자세는 가히 반란 진압에 준했다.
성벽 위에는 쇠뇌와 장궁으로 무장한 용병 사수들이 늘어섰다. 용병들의 지휘관이 고함질렀다.
“문을 만지면 사살한다!”
용병들이 협박을 실행에 옮기리라는 점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므로.
그러나 지금 난민들이 문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화살은 발사되지 않고 있었다.
용병들이 인내한 덕분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두려운 탓이었다.
성벽 위에는 용병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경꾼들도 있었다. 용과 영웅들의 싸움을 구경하러 온 자들. 그들 중에는 용병들이 감히 내쫓지 못할 귀족들도 상당수였다.
웬 귀족이 중얼거렸다.
“세기의 전투를 관람하러 왔더니 용은 내빼버렸군. 또 다른 긴박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줄은 예상 못했지마는.”
용병 지휘관은 이를 갈았다. 이쪽은 죽을 맛인데 저쪽은 저리도 태평하다니.
웬 늙은 집사가 물어왔다.
“정말 쏠 건가?”
지휘관은 말을 흐렸다.
“상황에 따라서······”
“쏘겠단 말이군. 너무 잔인하게 구는 거 아닌가? 당신에겐 저 참상이 보이지도 않나?”
“제겐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럼 결정권 있는 자는 누군가?”
“물론 백작님이죠. 영주이자 용병대장으로서 지금 우리의 행동을 바꾸도록 지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뿐입니다.”
지휘관으로서는 감히 집사 따위가 말 섞지 못할 상대를 내세우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휘관은 귀족사회를 잘 알지 못했다. 이 집사는 아이스피시 공작 밑에서 수십 년 봉사해온 가신이었다. 그 강력한 군주 밑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인맥은 곧 집사의 권위였다.
설령 황제 앞에서도 하고픈 말을 아낄 노인이 아니었다.
늙은 집사가 요구했다.
“불러오게, 어서. 내 말을 나눠볼 테니.”
“안 됩······”
그 순간 성벽 밑에서 호응이 일었다.
“불러와, 불러와!”
“돈놀이꾼 불러와!”
그리 난민들이 외치는 가운데 롤랑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관문 앞에서 롤랑이 포효했다.
“백작—!”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성벽 위 구경꾼들마저 이쪽을 바라보는 가운데 롤랑이 마저 포효했다.
“불—러—와—!”
영웅의 가세에 난민들이 기뻐 날뛰었다.
“백작! 불러와! 백작!”
모두들 자신감을 얻어 백작을 연호하는 와중이었다. 롤랑은 근엄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제길.’
이게 잘하는 짓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비카파 백작과 오스론 추기경, 두 거물의 씨름판에 끼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그 씨름에 끼어 이긴들 세계수 공략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요 졌다가는 아예 사달이 날 테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끼고 말았다. 지금 발을 빼기에는 저 용병들의 행태가 심히 악했기에.
저토록 노골적인 핍박 앞에서 물러나기에는 영웅답지 않을 터였고, 롤랑 본인부터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땅주인과 적대하는 건 껄끄러워. 비카파 이 새끼, 얼른 와서 잘 대처해라, 제발.’
결국 지휘관은 사람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그 분, 모셔와!”
백작을 부르러 웬 용병이 뛰쳐나갔다.
잠시간의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사십 분 뒤, 모두 기다리기 지쳐 다시금 폭발하기 직전에야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위에 올라온 비카파가 말했다.
“도시 안에 들어오고 싶다고?”
그 목소리는 주교가 걸어준 주문에 힘입어 쩌렁쩌렁 울렸다.
비카파는 계속 말했다.
“그러고는 세계수에도 들어가고 싶다? 발할라를 원하니?”
“그런 말은 안 했······”
옆에 선 집사가 중얼거렸지만 비카파는 무시하고 고함질렀다.
“니미, 씹헐 새끼들!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개좆만도 못한 구더기 새끼들아! 내 땅에서 꺼져! 아니면 뒈지라고, 버러지들아!”
도저히 백작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늙은 집사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비카파는 거의 저주를 퍼붓듯 외쳤다.
“너희 따윈 어디에도 필요 없다! 식인에, 매춘에, 강도질하는 구더기들! 갈보 년들! 제 마누라 팔아 빵 쪼가리 타먹는 포주 새끼들! 어느 곳에서 너희 쓰레길 받아주겠나? 그 정신 나간 곳이 비프로스트는 아니다! 물론 발할라도 아닐 테고! 그러니 세계수에서 뒈지면 그 병신 같은 삶 좀 나아지리란 꿈꾸지 말고, 썩 꺼지든가 얌전히 뒈지기라도 하란 말이다!”
“이런 미······”
“뭔 영화를 누리려고 제 자식새끼까지 잡아먹어가면서 안 뒈지는 거냐? 혹시 못 뒈지는 거냐? 편히 죽게 교수대라도 설치해주랴? 아니면 밧줄이라도 좀 내줘? 제발 좀, 헬로 꺼져!”
모두들 그 말을 듣고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롤랑도.
‘저 미친놈이?’
나름 계산적인 작자인 줄 알았는데.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은커녕 천한 욕이나 퍼부어대다니.
애써 진정했던 난민들은 다시금 끓어올랐다. 모두 울분에 차 고함지르기 시작했다.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라, 돈놀이꾼!”
비카파는 그 모두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성벽 위로 또 다른 구경꾼이 올라왔다.
그자를 본 순간 비카파는 오만상을 구겼다.
오스론이 말했다.
“자비를 베풀라, 비카파. 신들께서 지켜보고 계시니.”
꼴에 추기경 행세라니. 비카파는 더욱 분노하여 고함질렀다.
“저들을 도시에 들여보내주면 신들께서 기뻐할 거란 말인가? 헛소리! 신들께서는 전사들을 원하시오! 갈보, 포주, 거지 따위가 아니라! 저들을 세계수에 들이면 그 고기를 먹어 괴물들이 살찔 뿐이니 신들에 대한 이적행위나 다름없소!”
오스론은 도움을 청하고자 주변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집사 놈 외에는 다 쭉정이뿐이군.’
주변에 마땅히 백작을 제압할 만한 권위자가 없었다. 그야 군대를 이끌 만한 쟁쟁한 귀족들은 죄다 트롤들의 보물을 빼앗으러 세계수에 오른 뒤였으니까.
그 와중, 성벽 아래에서 쩌렁거리는 포효가 울렸다.
“백작!”
오스론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서는 환하게 웃었다.
비카파 또한 포효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고는 기겁했다.
그 눈에 롤랑이 보였다. 그 옆에 선 모지와 제이슨도.
‘저놈들은 또 왜 저기에?’
그 노여웠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비카파는 저 영웅들이 두려웠다.
롤랑이 외쳤다.
“자비를 베푸시오! 귀족적이지 않은 욕설과 저주 따윈 그만두고!”
비카파는 내심 불안한 와중에도 말했다.
“또 그놈의 자비 타령이군. 뭘 어쩌란 말이오, 위대하신 롤랑 경?”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행하시오!”
“의무? 뭔 놈의 의무? 내 의무는 영주로서 도시를 지키는 거요! 저 야만인들을 시내에 들여? 차라리 우물에 독을 푸는 게 낫겠군! 식량을 베풀어 주린 배나 채우게 해줘? 주민들이 내준 세금으로 선심 쓰라고? 그럴 돈도 의무도 없어! 다시 말하지만 내가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목 매달 밧줄뿐이오!”
“쉴 장소라도 내주시오, 백작. 저들은 지금 습격을 받았고 피난처가 절실하오!”
“피난처가 왜 하필 시내요? 습격해온 괴물이 하늘을 나는 용 아니었나? 그 날개 앞에서 성벽이 뭔 소용이라고 피난을 운운하지? 애당초 그놈의 용이 왜 저 버러지들을 덮쳤는지도 모르겠소. 혹시 저 거지들이 어디 들쑤시고 다니다 용의 알이라도 건드린 거 아닌가?”
이 말에는 롤랑도 반박할 수 없었다. 용의 의도 따위는 당최 알 수 없었으니까.
롤랑이 입 다무는 차 비카파는 계속 외쳤다.
“혹시 저 야만인들 중 누군가가 용의 분노를 사서 습격을 받은 거라면, 결단코 이 도시에 들일 수 없소. 용의 분노가 도시로 향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저들을 세계수에 들이는 건?”
“지금 트롤들과 전쟁 중일 텐데? 트롤도 식인괴물이오. 저놈들을 세계수에 보내는 건 트롤들 양껏 먹으라고 고기 공급하는 꼴이지! 적군에게 보급하는 머저리가 어디 있소?”
오스론이 고함질렀다.
“또 그놈의 고기타령! 세계수의 괴물들이 무슨 닭이라도 된단 말이냐? 뭘 먹는 족족 살이 되게?”
그 말을 비카파는 무시했지만, 롤랑은 일리 있다고 여겼다. 그 주장을 들어 말했다.
“확실히 그렇소! 트롤들로서는 인육 좀 얻을 이익보다 이 수와 맞서 싸우느라 받을 피해가 더 클 것인데?”
비카파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반박했다.
“저 버러지들이 일인분씩이나마 싸운다는 전제 하에 그렇겠지! 하지만 꼴을 봐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요! 죄다 빼빼 말라서는 어디 세계수에서 행군이나 할 수 있겠나? 설령 어찌어찌 저 병신들이 전선까지 간들 도움이 안 돼! 저놈들 소굴을 보았소, 롤랑?”
“물론 보았소! 온통 비참하게 불타버렸더군.”
“그 불탄 것 중에 연병장 비슷한 건 있었소? 체력단련을 할 만한! 어설픈 창질 연습이라도 할 만한 그런 장소가 있었나? 없었어! 왜냐하면 저 새끼들은 노력을 않거든! 내 절대 들여보내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용병 한 놈 이기면 들여보내주겠다는데 그러려는 노력을 안 해! 용병 하나 못 이기는 놈이 괴물과 어찌 싸운다는 거지? 말이 되나 그게?”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든 간에 싸우려면 다 싸울 수 있소. 백작.”
“아니, 전 용병대장으로서 말하건대 결코 그렇지 않소! 애초에 시체청소부들이 왜 생겨나는 줄 아시오? 제 분수를 알고 직종을 전환한 거요! 아무나 괴물과 싸울 수는 없으니까! 입으로는 발할라를 부르짖는 놈들조차 공포에 질리면 죄 도망쳐!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용이든 거인이든 죄 썰어버릴 수는 없는 거요, 롤랑!”
그 외침에 깃든 단호함에 롤랑은 당황했다. 비카파는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실제 비카파는 저 부랑자들을 도시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세계수에 인육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이유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 바카파는 반란 위험을 걱정했다,
저들은 오스론에게서 곡식을 얻어먹었고, 원래부터 관문을 가로막은 비카파보다 전 영주인 오스론을 더 좋아했다.
비카파가 보기에 저 빈민들은 오스론의 병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숫제 적군인 것이다.
그런 논리에서 비카파는 생각했다.
‘적군을 자기 도시에 들일 머저리가 어디 있나?’
저들을 도시에 들여 얻을 이익 따윈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반면 생겨날 손해는 그 밖에 쉬이도 예상되었다.
수천의 군입이 들어오는 순간 가뜩이나 비싼 식량가격은 껑충 뛰어오를 것이다. 매춘은 도시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며, 강도와 소매치기가 늘어 치안이 악화될 것이다.
비카파는 영주로서, 절대로 저들을 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새삼 다짐하는 가운데 롤랑이 말했다.
“아니, 비카파. 당신이 용병대장의 경력을 내세우겠다면 나는 기사이자 변경 사령관이었던 전적을 내세우겠소.”
비카파는 속으로 신음했다.
‘비프로스트 변경백, 롤랑.’
롤랑이 계속 말했다. 이 땅의 옛 군주로서.
“물론 용병대장은 제 군대에 아무나 넣지 않겠지. 하지만 변경을 지키려면, 저 청년은 성격상 문제가 있으니 돌려보내고 저 청년은 여드름이 많아 군대의 외관을 해칠 테니 돌려보내고, 이럴 수가 없소. 먼 옛날 나는 수레바퀴보다 큰 남자라면 예외 없이 병사로 삼았소. 결국에는 모두가 전사가 되었지.”
비카파는 불안을 숨기고자 반박했다.
“일체 훈련 따윈 않고, 비쩍 마른 저 머저리들도 남자라 할 수 있소? 전사가 될 수 있단 말이오?”
“병사에게 뭘 시키려 들든 군량보급은 필수요, 백작.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마당에 뭘 수련하고 어찌 살찔 수 있었겠나? 그런 이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사가 될 거요.”
“뭔 놈의 기회?”
“증명해보이겠소.”
롤랑은 비카파와 그 뒤의 오스론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싸움에 낄 수는 없다. 그러니 비카파를 정면으로 꺾어버리는 식으로 이 상황을 해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전제하에 롤랑은 방법을 몇 개 생각해보았다.
난민들은 용의 습격을 두려워한다. 일단 놈에게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어째야하나?
난민들에게 식량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는? 어림도 없었다. 저 빈민들은 모두 출신이 제각각이라 저마다 여행기간 동안 먹어치울 식량이 천차만별이요, 애당초 대규모 난민을 반길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영웅의 명성이라도 보존할 수 있도록 현상유지나 하는 것은? 당분간 성벽 바깥에 눌러앉아 빈민들을 용에게서 지키는 척 빈둥거리는 것은 어떤가?
‘안 돼.’
절대 해서는 안 될 시간낭비였다. 롤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른 시일 내에 세계수에 올라야 했다.
지금 위에서는 트롤들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층을 돌파하는 속도는 전에 비할 수 없이 빨랐다.
이대로 비프로스트에서 죽치고 있다가는 다른 자들이 모든 것을 정복해버릴 터였다. 백 층에 있을 난쟁이의 성검과 황금사과마저도.
현상유지조차 포기하고, 그저 이 사건과 관계없다 선언하고는 훌훌 세계수에 올라 싸움이나 계속하는 것은? 귀족들까지 보고 있는 와중에 그럴 수는 없었다······.
이내 롤랑이 말했다.
“백작 그대가 요구한 대로 따르겠소.”
비카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요?”
“저들을 전사로 만들어 보이겠소. 그리하여 그대가 내세운 전사들과 싸워 이기게 하겠소.”
< 관문 앞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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