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73화 (73/164)

< 관문 앞 - [1] >

롤랑은 이틀 뒤 탐색에 대비해 식품을 준비했다.

세계수에 한 번 올라가면 적어도 일주일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장기보존이 가능한 식료품을 넉넉히 구비해야 하는데 그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버렸다.

다행히 오스론이 본국에다 주문한 식량이 도착했다. 그 중 일부를 나눠 받아 탐색 계획을 세웠다.

롤랑이 저택 창고에 쌓아둔 식료 목록을 점검하는 가운데 그 종자가 볼멘소리를 냈다.

“양파가 왜 이리 많아요?”

“잘 썩지도 않고, 몸에 좋아. 입이 심심할 때마다 한 개씩 깨물어먹기만 해도 잔병치레가 줄어들 거다, 앤지.”

“먹으면 속 쓰린데.”

투덜거리는 앤지를 롤랑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린애가 반찬 투정하는 것 같아 귀여우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수도사 생활하던 아이가 먹을 것을 가리다니. 처음 만났을 때, 나눠준 식사를 굶주린 듯 먹어치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내 생각보다 신전에서 잘 먹였던 건가? 아니면 요새 하도 잘 먹어서 입맛이 까다로워졌나?’

처음 만났을 때 봤던 모습과 다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그 나약했던 모습과는 달리 앤지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수도원 생활은 엄격한 위계질서 하에 이루어질 텐데. 그런 풍조에서 자라난 아이치고는 꽤 자유분방하지 않은가.

‘혹시 귀족의 숨겨진 자식, 뭐 그런 건가?’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이었다.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오스론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발두르여! 롤랑 경! 나와 보십시오, 롤랑 경!”

롤랑은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보게 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오스론의 저택은 비프로스트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니까 성벽과의 거리가 꽤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도저히 못 볼 수가 없었다.

불을 뿜으며 날아다니는 용이 보였다.

당장은 성벽에 가려져 그 윗부분만 겨우 보였다. 그러나 성벽 바깥에 빼곡한 구덩이와 그곳 거주민들에게 봉사하러 나간 동료가 곧바로 생각났다.

롤랑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질렀다.

“모지, 제이슨!”

곧이어 나타난 두 동료와 함께 달렸다. 두 동료는 유령군마에 타고, 롤랑은 그저 달려 나갔다.

관문과 가까워지는 동안 성벽 바깥의 불꽃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불꽃 속에서 재와 연기가 미친 듯이 휘날렸다.

‘젠장.’

있는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차 비프로스트 관문에 도착했다.

관문의 경비는 삼엄했다. 성벽 위로 쇠뇌를 든 용병들이 열을 지어 올라왔다. 관문 뒤에는 중무장한 용병들이 빼곡히 모였다.

‘사수들이면 모를까 중보병들이라니? 어째서?’

척 보기에도 이상했으나 당장의 의문은 접어두기로 했다.

용병들 앞에 당도하자마자 롤랑이 외쳤다.

“문을 열어라!”

중보병들 뒤에 서있던 용병 지휘관이 대답했다.

“지금 출입 통제 상황입니다.”

“뭔 개소리냐?”

“밖에 상황 보이시잖습니까? 용이 나타나······”

롤랑은 버럭 소리질렀다.

“놈을 우리가 죽이겠다! 그러니 당장 문을 열어!”

그 말에 지휘관은 반쯤 뜬 눈으로 물어왔다.

“뭔 수로요?”

세 명의 차림새는 그 귀족 신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 지휘관은 그저 황당하다는 듯이 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천지를 불태우는 용을 죽이겠다는 기사라니. 풍차를 향해 돌격하겠노라 선언하는 기사쯤으로 여겨질 것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롤랑은 자세한 설명 대신 자신을 소개했다.

“난 메디아 후작 롤랑이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전쟁신의 대전사이다! 당장 문을 열어!”

지휘관도 그 소개를 알아들었다.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롤랑 경? 정말? 하지만 지금은······”

우물쭈물하는 지휘관에게 롤랑이 윽박질렀다.

“닥치고 문 열라니까! 안 열면, 부수고 지나가겠다!”

맹수가 울부짖는 소리. 지휘관은 움츠러들다 못해 잠시 굳어버렸다. 그리 답답하게 구는 것을 롤랑은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이내 관문을 부수고자 롤랑이 발리사다를 뽑아들었다. 그제야 지휘관이 외쳤다.

“관문을 부수지 마십시오! 이 난리 중에 무슨 짓입니까!”

롤랑은 관문을 향해 걸어가며 고함쳤다.

“관문을 지금 왜 보존해 저 날개 달린 용이 이 도시를 침공할 때 문으로 들어오겠노라 선언했더냐?”

지휘관은 애써 말했다.

“지금의 관문 수호는 영주께서 직접 내린 엄명입니다!”

“비카파 백작? 그자에게 관문 수리비용은 이 롤랑에게 달아두라고 해라!”

마침내 롤랑이 발리사다를 들어 올린 순간, 뒤에서 제이슨이 외쳤다.

“비켜, 롤랑!”

그 제지에 지휘관은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쿵쿵거리는 소리에 이어 관문 쪽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보고 말았다.

그 미소는 사라지고 지휘관은 그저 공포에 질렸다.

서리거인이 달려오며 고함질렀다.

“내가 부순—다—!”

지금껏 제이슨이 미친 듯이 분노하지 않은 것은 롤랑에게 상황을 맡긴 탓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이슨은 소환물들을 불러내는 데 한창이었다.

저놈의 용에게서 받은 지팡이 덕분에 그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이미 세 소환물이 불려나온 뒤였다.

이제 제이슨이 마지막 소환물, 발키리를 불러내는 사이 서리거인이 롤랑을 밀치고 도끼를 들었다.

쩍 하고, 그것을 내리찍었다.

“그만!”

문을 어찌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거인의 도끼질에도 곧장 손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서리거인은 끈기 있게 계속해서 내리찍었다.

쩍, 쾅, 쩍, 챙. 나무속에 철근이라도 집어넣은 것인지 그 충돌은 공기 중에 울렸다. 고막을 파고드는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그러나 문은 아직도 부서지지 않았다.

롤랑도 가세해야겠노라 느꼈다. 그 역시 발리사다로 문을 내리치려는 차, 지휘관이 고함질렀다.

“열겠습니다! 살짝이나마 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그제야 둘은 관문파괴를 멈추었다. 롤랑이 미심쩍다는 듯 노려보는 가운데 지휘관은 용병들에게 외쳤다.

“관문을 열어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말이다!”

끼이익 거리는 마찰음이 들리더니 비로소 관문이 살짝 움직였다. 롤랑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정말로 조금만 열었군.”

맘 같아서는 그 목에 칼을 찔러 넣고 싶을 지경이었다. 롤랑의 손에 들린 룬검을 불안하게 쳐다보며 지휘관은 애써 외쳤다.

“나가시려거든 당장 나가십시오! 곧 다시 닫을 거니까!”

지휘관은 안절부절 못하며 살짝 열린 관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마치 바깥에서 누군가 들어올까 봐 불안한 것처럼.

롤랑은 저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막으려고? 당연히 용은 아닐 테고, 난민들? 혹은 난민들 구조하러 간 기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롤랑과 두 영웅, 그리고 네 소환물은 급히 관문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서리거인이 나오기 무섭게 관문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끼이익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롤랑은 지옥을 보았다.

용이 피워낸 불길은 점차 꺼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기 편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불에 가려진 사람 형태의 잿더미들이 드러났다. 완전히 구워진 시체, 아예 까맣게 타버린 시체. 불탄 것이 아니라 아예 녹아내린 사람의 잔해들도.

덜 타죽은 시체, 그러니까 한 순간에 죽지 못하여 더욱 고통스럽게 화형당한 시체도 보였다. 그 눈알이 녹아 눈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참상을 보다 못해 제이슨이 헛구역질했다. 롤랑도 그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내고는 주변을 살폈다.

‘아말릭은?’

다행히 살아있었다. 그것도 꽤나 멀쩡히.

그 주변에 다수의 생존자들을 거느린 채였다. 기사들은 물론 빈민들까지 그 근처에 몰려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롤랑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와 동시에 생존자들도 이 세 영웅을 발견했다.

그들 또한 이 발견에 더없이 안도했다.

“롤랑 경!”

그 환호성이 롤랑의 혼란스러운 정신을 깨웠다. 너무 정신 나간 상황이라 잠시 멍했지만, 끔찍하게 강력한 적이 저기 있었다.

롤랑은 용과 싸울 준비를 했다.

우선은 방패를 들었다. 뼈로 된 방패. 저번에 강력한 트롤을 쓰러뜨리고 얻은 물건이었다.

롤랑은 저 너머에서 또 한 무리의 빈민들을 불태우던 용을 노려보았다. 모지가 중얼거렸다.

“신 내린 무기는······”

롤랑은 여전히 용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당장은 아니고, 적절한 시기에 쓸 거다.”

그러나 과연 투창 한 번에 저 용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었다.

수천, 어쩌면 그 이상의 사람들이 불타 죽었다. 저 용 혼자서 한 짓이었다.

‘모지와 제이슨 둘이서 잡았다더니.’

지금 와서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군대도 전멸시킬 만한 저 괴물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러나 싸우기로 했다.

롤랑은 짊어진 투창들을 붙잡았다. 이제 눈에 보이는 생존자들은 당장 보이는 저들뿐이었다.

셋은 용이 이쪽에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용이 이쪽을 보았다.

“아, 너희?”

그러더니 용은 날아올랐다.

위를 향해서.

세 영웅이 올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모르가나는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비프로스트를 등졌다.

이내 날개를 펄럭였고, 저편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용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무슨?”

모르가나는 당시 네 명을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다. 방심했으나마 한 번 지기까지 했다. 굳이 맹세를 깰 필요도, 또 패배할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피할 뿐이었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용을 롤랑은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신 내린 무기, 써? 던져? 말아?’

오딘을 신앙하는 성기사라면 궁니르를 복제한 창을 던질 수 있다. 초현실적으로 멀리 날아가는 기적의 창을.

그러나 진짜 궁니르가 아닌즉, 그것은 빗나갈 수도 있다.

맞출 확신이 필요했다. 롤랑은 창을 든 채로 기다렸다. 용이 멀어지는 척하다가 이내 습격해올 것을 대비하여.

용이 접근해오는 순간 곧바로 창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용은 이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석양 너머로 반짝이는 검은 점을 셋은 그저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허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살아난 다른 사람들의 심정은 그렇지 않았다.

웬 기사가 고함질렀다.

“용이 도망친다!”

정말? 저 괴물이? 빈민들은 그 말에 미심쩍어 했으나 용은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웬 기사가 떠벌렸다.

이미 저 영웅들께서 한 차례 용을 쓰러뜨린 바이다. 그러니 용으로서는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죽기는 싫을 터였으리라 기사는 덧붙였다.

“영웅?”

“롤랑 경, 그리고 모지 경과 제이슨 경!”

성벽 바깥 빈민들조차 그 이름은 들어보았다.

모두들 붕 뜬 얼굴로 세 영웅과 그 옆 소환물들을 바라보았다.

재와 연기로 뒤덮여 모두 무채색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그들 영웅은 서있었다. 생존자들마저도 온통 재가 묻어 회색이거나 검었다.

지금 영웅들만이 그을리거나 재에 덮이지 않은 채 본래의 색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직 저 영웅들만이 살아있는 듯했다. 적어도 생존자들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지금 그들은 거의 반쯤 죽은 심정이었기에.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갔나?”

이내 하늘에서 발키리가 내려왔다.

날개 달린 천사의 모습을 모두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싸움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한 서리거인조차 지금 생존자들에게는 공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서리거인 역시 푸른 색상을 간직했고 생동감이 넘쳤다. 생존자들은 놈에게서 생기를 전해 받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발할라여.”

그러더니 무릎 꿇었다. 그는 잿더미 위에 머리를 박고 절했다.

이내 모두들 따라했다.

그리하여 세 영웅은 자신들을 경배하는 수천 명 사이에 둘러싸였다.

*******

수천 명이 죽다 살아났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목숨을 건졌음에 안도하고 제 할 일이나 할 수는 없었다.

사방이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이 자리에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보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은 것은 물론, 숨 한 번 들이 내쉴 때마다 재를 흠뻑 빨아들여야 했다.

무엇보다 용이 언제 다시 덮쳐올지 몰랐다.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여부도.

당연히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왜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

대체 그 용은 무슨 이유로 습격해왔나? 분노하여? 아니면 심심풀이로?

비프로스트가 거슬렸다면 시내에 불을 뿜을 일이지 어째서 애꿎은 빈민들이나 불태운 것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생존자들은 그저 공포와 불안에 절었다. 용이 다시 덮쳐와 못다 죽인 사람들을 끝내 화형에 처하리라고,

피난해야 했다. 그러나 어디에?

당장 주변에는 사막뿐이었다. 그러니 당장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오직 한 곳뿐이었다.

비프로스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내 관문 앞에 육천 명이 넘는 빈민들이 모여들었다.

꽤 많이 남은 터였다. 아말릭과 기사들 주변으로 피신해서든, 구덩이 속으로 피해서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끝에 용에게서 벗어나서든 간에 각자 발버둥 쳐 겨우 살아남았다.

육천 명의 빈민들이 고함질렀다.

“문, 열어!”

분노한 그들의 뒤에 발할라의 영웅이 있었다.

< 관문 앞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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