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72화 (72/164)

< 성밖 - [5] >

카를은 눈앞 세 명의 말이 그저 농담이기를 바랐다.

“김장을 하겠다고?”

그러나 세 명은 진지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양놈들 빵이며 치즈나 처먹은 지 너무 오래됐잖아. 그러니 그냥 김치 좀 담그자 이거지. 유저 대부분이 한국인이니 다 좋아할 거 아냐?”

카를은 거의 얼이 빠져서는 부정했다.

“안 좋은데. 안 좋다고.”

“그럼 넌 먹지 말든가.”

“기어이 담그려고? 김치?”

“그럴 거라니까. 고추 없는 건 뭐, 빨갛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면 되고. 고추 구할 수 있으면 좋지만 뭐 불가능하겠지?”

그놈의 고추. 카를은 저 세 명의 그것을 찢어버리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이내 분노를 겨우 억눌러 참으며 말했다.

“절대 안 돼.”

세 명이 표정을 구겼다.

“왜?”

“빨개서 시체 같아 보일 김치든, 희멀건 백김치든 신전 사람들 보기에 수상할 만치 이상해 보일 텐데? 그걸 또 몸소 만들겠다고? 우리 지금 고대 영웅 코스프레 해야 한다는 거 잊었나?”

“발할라 전통음식이라 우기면 되잖아.”

“채소를? 전사들의 음식이라 주장하겠다고? 미쳤나? 설령 그 헛소리를 어찌 믿게 한다고 쳐도 재료는? 사제들에게 사달라고 요구해야 할 텐데, 무슨 염치로 그러겠단 건가?”

“롤랑이랑 두 명이 돈 보내주는 거 있잖아. 그 돈으로 채소랑 몇몇 식재료 좀 사달라는 게 뭐 그리 부담이라고?”

“직접 돈 벌어 바치는 거 아니면 닥쳐라.”

카를이 윽박질렀지만, 먹히지 않았다. 세 명은 그저 웃었다.

“싫은데?”

저 셋은 현실 친구인지 뭔지 몰라도 요새 와서는 거의 붙어 다녔다. 유저들이 평소 하는 대련과 연구도 저 셋은 자기들끼리만 하곤 했다.

거기까지면 그저 그러려니 하련만, 문제는 친한 사람들끼리 낄낄거리며 일과를 보내는 것이다 보니 그 모든 것이 점점 건성이 되어간다는 점이었다.

카를은 그것을 얼마 전부터 불만으로 여겨왔는데, 이제는 아예 준 반란에 이르고 말았다.

‘세상에 강림한 고대 영웅들이 김장이나 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냐 병신들아?’

카를이 말했다.

“우리 유저들은 합의했다. 상하관계는 아닐지라도 일단 나를 통솔자로 인정하겠다고. 너희도 그 자리에서 동의했을 텐데?”

“그게 똥 싸는 거며 처먹는 거까지 허락받겠단 건 아니었거든? 스탈린 같은 새끼가 진짜 별 걸 다 통제하려 들어.”

“이건 단순 섭식 문제가 아니야. 보안은 물론 우리 지위 및 체면에 관련된 문제다.”

세 명 중 하나가 웃었다.

“어이가 없네. 보안? 지위 및 체면?”

“그래.”

“해석 참 지 꼴리는 대로 하시네. 네가 뭔데? 팬 사이트 운영자가 무슨 벼슬이냐? 하여간 이런 새끼들이 어디에나 있어요. 인터넷 카페 매니저니 부녀회장이니 별 좆도 없는 감투 하나 달아주면 좆대로 휘두르지 못해 안달이지?”

카를은 화내지 않고자 애썼다.

물론 화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비난받는 상황 자체를 중심화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셋이 그놈의 김치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내 카를이 말했다.

“내 맘대로 하는 게 싫으면, 투표에 부치자.”

유저들 대부분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즉각 투표했다.

“지금 저 셋이 김치를 담그면 안 된다 생각하는 사람들, 손들어. 김치 먹고 싶은 사람들은 손 내려.”

카를의 말에 따라 유저들이 손을 움직였다.

들린 손, 내린 손을 바라보며 카를은 안도했다.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다. 정말 다행히도, 대부분에게 상식이 있었다.

카를이 유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봤지? 이제 수긍하나?”

그 목소리에 절로 자신감이 실렸다.

독재자라 비난받은 순간 카를은 움츠러들었다. 사실 다른 유저들도 자신을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에.

그리 불안한 와중에 모두가 자신을 편들어준 것이다.

과연 세 명도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 명은 유저들을 설득하려 했다.

“사제 새끼들이 우리한테 빵이랑 고기만 처먹이는데 다들 괜찮아? 다들 슬슬 물릴 때 되지 않았어?”

웬 유저가 반박했다.

“그래도 이계까지 와서 김치 타령은 좀. 몸뚱이가 달라서 그런가, 고향 음식은 썩 그립지도 않은데? 군에서 휴가 나올 때마다 집밥에 환장했는데 막상 여기서는 그냥 주는 대로 먹을 수 있어. 다들 그렇지 않나?”

그 말에 유저들 대부분이 동의했다. 그것을 보며 카를은 생각했다.

‘다들 썩 맛있지도 않은 중세 음식만 먹는데도 고향 음식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 다들 그렇단 말이지?’

이내 카를은 판단했다.

사실 저 셋도 정말 김치가 그리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그저 셋이서 옛 이야기 하던 와중에 김치, 김치, 하고 말이 나오니까 한번 언급해봤을 뿐이겠지. 지금 와서 순순히 포기하기에는 나한테 지는 것 같으니까 계속 뻗대는 거고.’

그렇다면 좀 숙여서 저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좋을까?

카를은 일순 그리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저 셋은 평소대로 말해도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하면 아예 더욱 만만하게 여길 것이다.

차라리 더 고압적으로 나가는 것이 낫겠다.

카를이 고심하는 가운데 셋은 계속 설득에 나섰다.

“지금 우리 식단에 과일이랑 채소 안 나오지? 고기만 죄 처먹어가지고 벌써부터 다들 낯빛 안 좋은 거 봐라? 비타민 부족한 거야 그거! 게다가 곧 겨울이란 거 같던데 그리 되면 더 비타민 섭취하기 힘들어지는 거 아냐? 이계까지 와서 다들 괴혈병으로 뒈질 거야?”

카를이 쏘아붙였다.

“그놈의 괴혈병을 굳이 김치로 극복할 이유가 있나? 식단에 과일이나 좀 올려달라고 요구하던가. 그 정도는 괜찮을 테니.”

“겨울철 대비해서 비축해야 할 거 아냐!”

“양파, 처, 드세요. 애초에 겨울에 비타민 좀 못 먹는다고 안 뒈져. 정 죽겠다 싶으면 날고기라도 처먹던가. 더 헛소리할 거 없으면, 닥치고 치즈나 계속 처먹는 거다. 알겠나?”

결국 셋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 새끼야. 김치 안 처먹을게. 됐냐?”

“됐지 그럼.”

그러나 셋은 끝내 한 마디 덧붙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실랑이에서 이겼다고 신나겠다? 그런데 너무 좋아하진 마라, 북한에서 민주주의 배워온 새꺄.”

“좋아하긴 뭘······”

“이건 그냥 다수결에 따른 거다, 스탈린 새끼야. 그따위로 독재 계속해봐라. 어느 병신 새끼가 끝까지 따라줄지 시험해보라고. 좆도 없는 새끼가 휘두르는 지휘봉에 뭔 놈의 권위가 넘칠 거 같냐?”

그 순간, 카를은 주변 유저들이 저 셋의 개소리를 성토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켜보던 모두 침묵했다. 그 사실에 카를은 충격을 받았다.

조금 시간이 흘렀다. 카를은 평소 가깝게 지내는 유저 랑슬로에게 물어보았다.

“나 유저들 사이에 이미지가 많이 나쁜가?”

“별로.”

랑슬로의 대답에 카를은 일순 안도했지만, 랑슬로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유저들끼리 네 뒷담 좀 하긴 하지.”

“내 뒷담을 한다고?”

“그래, 뭐 어쩔 수 있나? 조교든 교사든 통솔자는 원래 욕먹는 거잖아. 뭐 그래도 카를 저 독재자를 몰아내자든가 뭐 그런 말은 오가지 않으니까 안심해.”

그러나 카를은 방금 그 대화를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홀로 떨어져 앉아 생각에 잠겼다.

‘조교와 교사의 권위는 그 지위에서 나온다. 심지어 법에서 그 권위를 보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게임에서 달고 다니던 이놈의 대제 칭호 말고 또 뭐가 있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이내 고찰했다.

통솔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

아말릭은 제자리에 서서 용, 불,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방금까지는 도망치는 사람이었던 휘날리는 재를 보았다.

온 세상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말릭 주변의 기사들 또한 뭘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용맹한 그들은 지금 그저 그 자리에 굳어있을 뿐이었다.

물론 용을 죽이는 것은 뭇 기사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지금 저 용을 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번씩 신과 만나 축복받은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벌써 수천명을 학살한 저 용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살해할 수 있는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웬 기사가 중얼거렸다.

“영웅들은? 두 영웅이 흑룡을 물리쳤노라고······ 그 분들께 도움을 청해야······”

곧바로 반박이 나왔다.

“도움을 어찌 요청해? 주변이 온통 불로 휩싸였는데?”

“바로 그 불이 문제지! 가만히 있다가는 곧 다 타죽을 거요! 내가, 내가 저 불길 너머로 몸을 던져보겠소! 불타 죽지 않는다면 바로 시내에 들어가 영웅들을 불러오겠·····”

실제 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 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 난리 와중 아무도 피난해 오지 못하도록.

비카파의 지시에 따르면, 설령 도시 출입권이 있는 기사들이라도 출입봉쇄의 예외가 아니었다.

이내 기사가 자기 말을 실행에 옮기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가 막 달리기 직전, 아말릭이 외쳤다.

“그만! 가지 말아요, 가지 마! 불타죽을 뿐입니다!”

“이대론 다 죽는다니까!”

“내게 방도가 있어요! 모두 이 자리에 서서, 내가 시키는 대로 외쳐요!”

이내 아말릭이 웬 문장을 말했다.

기사들은 그 말에 따랐다.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지금도 사람을 불태우느라 바쁜 용을 향해서.

“넌 맹세했다, 용! 우리에게 덤비지 않겠노라 맹세를 했다! 궁니르의 맹세를 어길 셈이냐!”

빈민들의 비명소리에 묻혀 바로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계속 외쳤다.

“······덤비지 않겠노라 맹세를 했다! 궁니르의 맹세를······”

두 영웅에게 저 용은 목숨을 구걸하며 궁니르에 맹세했다. 이제 덤비지 않겠노라고.

그 자리에 아말릭도 있었다. 그러니 그 맹세는 아말릭에게도 적용될 터였다.

이내 용에게도 그 소리가 들렸다.

용이 고개를 돌려 기사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무리에 섞인, 온몸을 가면과 법복으로 가린 아말릭을 발견했다.

사실 저번에 봤을 때와는 다른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 복장에서 풍기는 느낌이 엇비슷했기에 알아볼 수는 있었다.

정말 본인인지 확신은 서지 않았지만, 용은 맹세를 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용은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좋아, 너희는 살려주지.”

아말릭과 그 주변 기사들을 향해 용이 날아왔다. 모두들 비명지르기 바쁜 가운데, 용이 불을 훅 하고 내뿜었다.

“신이여, 죽······”

그러나 그 불꽃은 기사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용은 그 주변에서 타오르던 불길을 노려 불을 뿜었다.

일종의 맞불이었다. 두 불길은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다가 서로 엉켰다. 그리 주변 모든 것을 잡아먹다가, 더 이상 불태울 것이 없자 이내 사그라졌다.

그리하여 아말릭과 그 기사들의 주변 불길은 금세 꺼졌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용은 아직도 사냥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용은 이내 다른 사람들이라도 불태우고자 이내 저쪽으로 날아갔다.

넋 놓고 구경할 수는 없었다. 아말릭은 빈민들을 향해 외쳤다.

“이리 오시오! 다들 이리 와! 여기 오면 살 수 있어!”

기사들도 함께 외쳤다.

“이리로 오시오, 다들!”

그리하여 미친 듯이 도망치던 빈민들이 이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들의 눈에 불길이 꺼진 곳에서 멀쩡하게 서있는 사람들이 포착되었다.

그리하여 주변의 모든 빈민들이 그 옆에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빈민들은 기사들의 옆에 당도해서야 멈춰 섰다.

용은 공중에 뜬 채 그들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이내 단념하고는, 달리 불태울 자들이 없나 살폈다.

******

< 성밖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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