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밖 - [4] >
구호 활동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구호단에게는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아말릭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이제 아말릭은 자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빈민들에게서 우월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아말릭은 요 며칠간 비프로스트의 주변을 너무 많이 보고 말았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여럿 알아버렸다.
예를 들어 아말릭은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발할라를 염원하는 순례자로서 그 농부는 처자를 이끌고 이 도시에 왔다. 그러나 도저히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고, 근처에 식량은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그 길이 너무 멀었다. 농부로서는 이곳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의 가족이 널려있었다. 그리하여 굶주리고 또 굶주리다 못해 농부는 자기 아이를 다른 가족의 아이와 교환했다. 그리고 녀석을 도살했다.
그러나 아이 무게만큼의 고기는 얻을 수 없었다. 주변에 주린 입이 너무 많았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고기를 빼앗겨버렸다.
이쯤 되어서는 모든 도덕성이 마비되었다. 아내에게 몸을 팔아 밥 한 끼 얻어오게 하는 것쯤, 농부에게는 이제 별 일도 아니게 되었다.
다행히도 성벽 바깥에서 매춘은 나름대로 흥했다.
신들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이유로 비프로스트 시내에서 매춘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아랫도리가 굶주린 남정네들은 시내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면 시외에서라도 해결할 의지를 보였다.
그러한 목적 하에 무리지어 성벽 바깥으로 나오는 전사들을 상대로 농부의 아내는 영업을 해왔다.
아말릭은 앞에 선 빈민에게 자루를 내주며, 이내 기도드렸다.
‘토르여. 그리고 발두르여.’
부디 저들을 구원하시기를.
그러나 눈앞의 빼빼 마른 남자는 아무리 봐도 발할라에서 받아줄 것 같지 않은 몰골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하신 분.”
자루를 건네받은 빈민이 고개를 힘없이 숙여왔다.
이제 아말릭은 가면 속에서도 웃지 않았다.
다음 빈민의 차례가 되었다. 그에게도 연명할 수 있을 물건을 내주며 아말릭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스론이 이 구호활동을 하는 것은 분명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비프로스트의 군주로는 비카파보다 예의 추기경이 더 낫지 않은가 하고.
알론소가 알기로, 비프로스트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오스론의 인기는 비카파를 훨씬 능가했다.
오스론이 비프로스트 공이던 시절, 빈민들의 생활은 이보다는 나았다.
오스론은 빈민들에게 제법 베풀 줄 아는 군주였다. 굶주린 자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고, 성벽공사를 일으켜 품삯을 지불했다.
사실 모두 남 돈으로 선심 쓰는 것이었지마는.
당시 오스론은 비프로스트에 찾아온 외국인 귀족들에게서 반강제적인 헌금을 뜯어내곤 했다. 그 돈으로 하층민들에게 베푼바, 당시 굶어죽는 인원은 거의 없었다.
결국 그 헌금 강요는 귀족들이 오스론의 축출에 동의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것이 어딘가.
‘비카파는 오스론보다 영지 경영자로서의 능력은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주로서는······ 사람 목숨을 그저 숫자로만 생각하는 개자식. 말 그대로 돈놀이꾼 겸 용병대장일 뿐이야.’
다음 빈민이 그 앞에 섰다. 그에게도 식량을 내주며 아말릭은 속으로 맹세했다.
‘또 다시 전리품을 얻는다면, 이번에는 더 많이 기부하리라.’
이틀 뒤가 다시 세계수에 오르기로 한 날이었다.
괴물과 싸우거나 세계수에서 행군하는 것은 지독히도 괴로운 일이지만, 지금 아말릭은 그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바랐다.
“자, 다음!”
다음 곡식자루를 들어 올리던 와중이었다.
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찢어져라 외치고 있었다.
“뭐가 온다!”
모두들 그곳을 바라보았다. 당장에는 뭔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조금 위를 바라본 순간, 모두들 그 비명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용이다!”
석양 너머에서 시커먼 용이 날아오고 있었다.
용의 거대한 두 날개는 조금씩만 펄럭였다. 그러나 그 비행속도는 그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빨랐다.
아말릭은 저 용을 알고 있었다. 동료를 죽이고 그 머리를 뜯어먹은 괴물.
한 차례나마 물리친 놈임에도 불구하고 아말릭은 오한이 들었다.
‘제발, 그저 날아갈 뿐이길.’
아말릭은 그리 빌었지만, 용의 비행방향은 정확히 이쪽인 듯했다.
용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가운데 아말릭은 다르게 빌었다.
‘이쪽에 오더라도 그저 지나칠 뿐이길.’
그 바람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곳까지 용이 날아왔다.
그 거대한 그림자가 지면에 드리웠다. 당장 빈민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식량 배급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그 모두를 내려다보며 용이 입을 열었다.
“반가워, 구더기들. 그리고 안녕.”
말에 이어 뿜어져 나온 것은 불길이었다.
용의 불꽃.
*******
오스론이 빈민들에게 식량을 풀더란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놈의 도시에는 당최 퍼지지 않는 소문이 없었으니까.
당연히도 그 소문은 영주의 귀에도 들어갔다. 오스론의 구호단이 일을 마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그 소식을 듣자마자 비카파 백작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성벽 바깥 구더기들한테 곡물을 나눠줘? 오스론이? 미치겠군, 정말.”
그 말을 받은 것은 까마귀 여인, 모르가나였다.
“신경 쓸 게 뭐 있어? 추기경으로서 할 일 하는 거 아니야?”
“오스론을 조심하라 말한 건 그대잖소, 모르가나.”
“그렇다고 놈이 하는 모든 일에 민감하게 굴라는 건 아니었어.”
비카파는 조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말했다.
“아니, 도저히 보아 넘길 수 없소. 애초에 오스론 그 작자는 빈민 구제니 뭐니 구더기들 밥 줄 돈 있으면 나한테 돈이나 갚아야 하오. 그런데 놈이 지금 돈을 그저 헛되게 쓰고 있을 뿐이라 해석하기도 힘들어. 지금 성벽 바깥 놈들은 전부 나한테 원한 있을 구더기들 아니오?”
“그래서?”
비카파는 왜 못 알아듣느냐는 듯, 초조한 어조로 외쳤다.
“지금 오스론이 그 구더기들한테 베푸는 것은 일종의 매수 작업이란 말이오! 언젠가 비프로스트 백작을 몰아내고자 봉기할 때 제 편을 들어달라고! 오스론, 놈으로서는 봉기할 때 도시 안팎에서 들고 일어서겠다 이거지! 안에서는 그놈의 영웅 추종자들이, 바깥에서는 저놈의 굶주린 구더기들이 날뛰길 바라는 거요!”
“진정해. 그래서 어쩔 건데? 관문출입을 더욱 엄격히 제한해서 구호활동을 방해하기라도 하게?”
“그것도 한 방법일 것이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되오.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마당에 관문을 단속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통행에 지장을 줄 수는 없는 일 아니오? 게다가 정 성벽 밖에다 식량을 주고 싶으면 방법이야 많을 테고. 설령 내가 온갖 수단을 써서 오스론의 발을 묶어둔들 그놈의 구더기들은 여전히 밖에서 들끓을 거요. 도시의 전사들을 상대로 가랑이 벌려 연명하면서 말이오!”
모르가나는 제안해보았다.
“그럼 일부를 시내에 들여보내주지 그래?”
“절대 안 되오! 전사는커녕 병사조차 못될 놈들이 무슨 쓸모라고 받아들여?
“세계수에 전사들만 필요한 건 아니잖아? 청소부인가 하는 까마귀 비슷한 직업군도 있던데.”
“시체청소부는 뭐 아무나 하는 줄 아시오? 괴물들이 들끓는 세계수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인데! 그런 고되고도 위험천만한 일을 바깥에서 쫄쫄 굶은 구더기들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지 않소. 아무나 까마귀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거요. 모르가나.”
모르가나는 슬슬 핀잔 받는 데 질렸다. 짜증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출입도 제한하지 않을 거다, 그 구더기들을 받아들여주지도 않을 거다. 그럼 뭐 어쩔 건데?”
비카파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싹 다 쓸어버릴 거요.”
“뭐?”
“죄다 죽여 버릴 거요. 그 수를 줄여둬야 해. 쓸데없거나 부도덕한 학살이라 비난하진 마시오. 그 구더기들이 언젠가 오스론의 봉기에 힘을 빌려줄 잠재적 반란군임을 감안하면, 놈들을 제거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전쟁행위요.”
그리 말하더니, 이내 비카파는 모르가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조아린 그대로 비장하게 말했다.
“이 전쟁에 힘을 빌려주시오, 모르가나! 비프로스트의 운명이 걸린 일이외다.”
“내 힘을 빌려주라니? 뭔 개소리야?”
“당신은 용으로 변할 수 있잖소? 그것도 매우 크고 불까지 뿜을 수 있는 강력한 용으로. 쇠뇌는커녕 활 한 자루 변변하게 없는 그 구더기들은 용에게 절대로 대적하지 못할 거요. 그러니 모르가나 당신은 그저 하늘을 날아다니며 안전하게 놈들을 구워버리면 되오.”
모르가나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러고 싶으면 네 용병들 시켜서 하든가.”
“난 못하오. 얼핏 보기에 그 구더기들을 제거하는 것은 순례자들을 핍박하는 듯 보일 테고, 오스론에게는 봉기할 명분이 될 테니까. 돈놀이꾼이 선량한 순례자들을 가로막다 못해 이제는 아예 학살한다! 뭐 이따위로 선동할 테지?”
“그러니 비프로스트 백작과는 전혀 상관없을 용이 그 일을 대신해주어야 한다?”
“그렇소. 제발, 부탁하오. 난 당신의 생명을 구해줬잖소? 이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은혜를 갚아주시오. 어차피 쉬운 일이잖소? 그저 불만 실컷 뿜으면 되는 것을.”
모르가나는 쏘아붙였다.
“쉬운 일이긴? 너 좆 하나 있으면 여자 백 명이고 천 명이고 하룻밤 만에 임신시킬 수 있어? 좆에 든 물이 무한정인 것도 아니고, 못하잖아. 용이 불 뿜는 것도 그래. 한계가 있다고.”
“그래서, 못하오?”
그리 묻는 비카파의 말은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모르가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정말 성벽 바깥의 빈민들은 모두 오스론의 잠재적 병력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네. 언젠가 놈들이 널 권좌에서 끌어내다 못해 산 채로 씹어 먹으리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고.”
“못 그럴 거 없지 그럼. 실제 놈들은 식인까지 하며 연명 한다 들었어. 그래서 가능한 거요, 불가능한 거요?”
조금 뜸 들이더니, 모르가나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가능하긴 해. 대신······”
“대신?”
“연료가 좀 필요하지. 불꽃을 뿜어낼 연료. 화톳불에도 장작이 필요한 것처럼. 용에게는 유황이 좀 필요한데, 있어?”
“있기는 있소. 많지는 않지만.”
“그럼 그거 내놔봐. 그 양만큼이나마 불을 뿜어볼 테니.”
*******
모든 곳을 불길로 뒤덮으며 용이 날아다녔다.
땅과 사람과 움막이 한꺼번에 불타올랐다.
용에게서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구워버리겠다는 살의가 엿보였다. 용은 낮게 비행하며 표적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빈민들이 마구 비명 지르며 도망치는 가운데, 그들 앞에 거대한 불줄기가 강타했다.
지면에 부딪쳐 사방으로 퍼져나간 불꽃이 도주로를 차단했다.
공포에 차 멈춰선 빈민들을 향해 용이 고개를 돌렸다. 그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이내 수십 명을 불살라버렸다.
빈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쳤지만 죽어라 뛰어봤자 나는 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용이 한 번 불을 뿜을 때마다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불타올랐다.
거의 모든 곳에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의 벽을 피해 달아날 길은 제한되어 있었다. 용은 그 길을 눈여겨보았다가, 그쪽으로 누군가 달아날라 치면 이내 덮쳤다.
*******
< 성밖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