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70화 (70/164)

< 성밖 - [3] >

비프로스트에서 식량은 언제나 비싸기 그지없는 자원이다.

세계수 뿌리가 지력(地力)을 게걸스레 빨아들이는 까닭에 비프로스트 인근에서 작물은 거의 자라나지 않는다. 결국 비프로스트의 주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식량 전부를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수입된 식량 중 일부는 대오공국의 선단이 날라준 것이지만 그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수입의 대부분은 육로에 의존해야 했으며, 각국에서 비프로스트로 통하는 지상의 길은 모두 메디아로 통했다.

그리고 메디아의 오스 왕이 자기 형에게서 영토를 빼앗은 백작을 미워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오스 왕으로서는 아예 비프로스트에 식량공급을 끊어버리고도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러지 않는 것은 이 비프로스트에 외국인들과 외국의 유력인사들이 가득한 까닭이요, 각국에서 식량을 운반하고자 메디아를 거치며 지불하는 세금 또한 제법 쏠쏠한 까닭이었다.

그놈의 세금에 운반비까지 붙어 비프로스트에 도달한 식량은 원래 가격의 세 배 이상으로 뛰었다.

백작에게서 식량을 일정량 지원받는 청소부들과 조합원들마저 식비를 내기 벅차 허덕였다. 이 와중에 성밖 부랑자들이 어찌 연명하는지는 비프로스트의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물론 오스론은 그 비싼 식량을 제값주고 이곳 비프로스트에서 구매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스론은 본국에 도움을 요청한 바였다. 메디아 궁성에다가, 이곳 비프로스트에 질 떨어지는 식량이나마 싼값에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내두었다.

그 서신은 롤랑과 아말릭이 기부를 하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본국에 닿아있었다. 분명 승낙 받을 수 있으리라 계산하고 진작부터 연락을 넣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스론의 명의로 된 식량이 비프로스트에 도착했다.

이후로 오스론은 지체하지 않았다. 마침 요새 트롤 토벌이 열의를 띄며 장기보존 가능한 식량들의 가격이 뛴 마당인즉 지금 식량을 주면 더욱 감사받으리라 계산되었다.

이내 오스론은 자기 앞으로 식량이 배송되자마자 바로 구호활동에 나섰다.

“문 열어라, 들개들아!”

일단의 무리가 비프로스트 관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섰다. 그들 뒤로는 곡식자루를 실은 수레들이 따랐다.

굶주린 부랑자들에게서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스론은 굳이 용병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롤랑을 추종하는 기사 무리를 꼬드겨 데려오면 되었으니까.

오스론의 구호단은 인부를 시켜 임시 구호소를 설치했다.

빈민들이 함부로 접근해오지 못하도록 목책까지 두른 뒤에야 본격적인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인부들을 시켜 외치도록 했다.

“비프로스트 공께서 자비를 베푸신다! 모두 모여라, 모여!”

임시 구호소가 굶주린 빈민들로 둘러싸이는 데는 불과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몇몇 폭도들을 밀쳐내며 구호단은 착실히 식량을 전달해나갔다.

물론 프레이 신과 메데이아 공의 혈통을 잇는 지고한 반신족, 메디아 왕족으로서 오스론은 저 추레한 자들과 옷깃조차 닿고 싶지 않았다.

이 고귀한 추기경은 그저 뒷짐 지고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역할이었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은 대동해온 기사들, 그리고 아말릭의 일이었다.

사실 아말릭 또한 직접 몸 움직여 일하기에 적합한 복장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근사한 가면과 법복으로 온몸을 가린 채였다.

그 불편한 차림으로도 아말릭은 곡식자루를 옮기고 또 옮기는 데 여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아말릭에게는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축복을 받아 그 신체능력이 대단히 향상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인 만족감이 그 몸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온몸이 때로 뒤덮인 남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나리, 자비를 바랍니다. 제발······”

아말릭은 기꺼이 그 손에 곡물가루 한 자루를 들려주었다.

남자는 고맙다고 마구 울부짖다가, 뒤에서 식량 받았으면 썩 꺼지라는 자들의 노성에야 겨우 자리를 떴다.

다음 빈민이 그 앞에 섰다.

방금 남자에게 꺼지랍시고 고함질렀던, 그 분노한 표정은 싹 달아난 뒤였다. 그 자리에는 이미 선량하고 비굴한 약자만이 남아있었다.

“모쪼록 제게도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고귀한 분.”

아말릭은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로나마 미소 지었다. 저 남자의 손에도 자루를 들려주며 생각했다.

‘저치들이 지금 내 적선을 애달피 바라고 있다. 나를 죄인처럼 짓밟으며 즐거워하던 자들이.’

사실 저들에 대한 아말릭의 평가는 롤랑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말릭이 보기에도 저들은 동정심에 앞서 경멸감이 드는 자들이었다. 직접 박해받은 장본인이기에 더욱.

‘그러나 한때 저들은 자기네가 이 아말릭보다 고귀하다고 느끼던 자들이었다. 그야 스스로가 한낱 문둥이보다 못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제는 어떤가?

지금 아말릭은 정식으로 서임 받은 기사였다. 그 서임에는 추기경과 백작 둘 그리고 후작까지 참관했다.

또한 그 백작 둘은 고대 영웅이었고 그 후작은 아예 롤랑이었다. 이후로는 저자들이 애타게 만나길 바랄 터인 신, 그것도 가장 인기 있는 토르 신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아말릭은 다시금 경전을 읽었고 매 시간마다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신학도일 시절보다도 더욱 신실하게.

이번 적선을 마치고는 돌아가서 깨끗이 씻은 뒤 다시 경전을 읽을 것이었다. 제단 앞에서 토르 신께 감사기도를 바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광란의 아마디스를 재독할 계획이었다.

“제게는 마누라와 아이들이 딸렸습니다. 제발 조금만 몫을 더해서······”

애걸해오는 빈민에게 아말릭은 남에게 보이지도 않을 터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다운 인자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준비된 자루는 거의 다 양이 같군요. 따로 더 챙겨드리고자 하고 싶어도 정말 그럴 수는 없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빈자여.”

더 조르지 못하도록 얼른 그 손에 곡식자루를 안겨주었다. 그 빈민 또한 뒤에서의 성화를 못 이겨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다음 빈민의 비굴한 미소를 아말릭은 즐거이 감상했다. 동시에 감사했다.

‘아, 신이여. 그리고 그들의 인도를 받는 영웅이여.’

마치 경구처럼 속으로 읊었다. 그러고는 진심어린 축복을 바쳤다.

‘그 고귀한 자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

셋은 저택의 또 다른 구석진 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방에서 새로이 묵게 된 귀빈과 마주했다.

책을 읽다 말고 난쟁이가 이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 비틀린 입에서는 잔뜩 쉰 목소리가 났다.

“다녀왔나? 트롤들은 많이 죽였고?”

롤랑이 대답했다.

“질리도록. 그리고 덕분에 당신 동포의 유산도 얻었소. 다시금 감사를 표하오.”

“동포 같은 소리 하기는. 다시 말하지만 난 니벨룽 귀족이야. 아무 동굴에서나 박혀 살던 놈들이랑은 격이 다르다고.”

난쟁이는 볼멘소리로 자기 신분을 내세웠는데, 실제 썩 고귀해 보이지는 않았다.

난쟁이는 꼽추에다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어둠의 정령, 니벨룽 족이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물론 그러시겠지.”

제이슨이 투덜거렸으나 난쟁이는 그저 롤랑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래서? 이제 내 말을 좀 믿겠나? 트롤들 틈에 있는 유물조차 멀쩡한 마당에 내 재산이 죄다 축났으리라고는 믿지 않겠지? 다시 말하건대 내 거처는 더 높은 곳에, 더 안전한 곳에 위치했어. 분명 거기에 내 재산은 온전하게 남아있을 테지. 그러니 분명 내게는 보상할 능력이 있어.”

롤랑이 대답했다.

“물론 그 말을 믿소.”

“자, 그러면 내가 줄 보상을 받고자 노력할 의욕이 생겼노라 해석해도 되나?”

“그래도 되오.”

난쟁이는 웃었고 롤랑도 따라 웃었다.

석상의 모습에서 돌아오자마자 난쟁이는 요구했었다. 자신을 보호해주고, 숙식을 제공해주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수 위에 있는 자기 본래 집까지 데려다달라고.

그래주면 기꺼이 자기 재산 중에서도 가장 귀한 두 보물, 성검과 황금 사과로써 보상하겠노라 약속했다.

이번에 발견한 난쟁이의 보물은 그 약속에 현실성을 부여한 바였다.

“그래서 당신 거처는 어디에 있소?”

롤랑의 질문에 난쟁이는 되물었다.

“당신네가 어디까지 올라갔는데?”

“칠십이 층.”

“꽤 많이도 올라갔군. 하지만 더 올라가야 돼. 이십팔 층 더 말이야.”

롤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 층에 당신 집이 있다고?”

“그래. 운치 있는 곳이었지. 그런데 왜? 불편한 기색이군. 너무 높다 이건가?”

“아니······.”

협상을 마치고 롤랑은 두 동료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은밀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애용하곤 하는 큰방에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제이슨이 말했다.

“씹할 백 층이라고?”

“그래. 백 층.”

제이슨은 그 층의 높이에 분개한 것이 아니었다.

“좆같네, 정말? 듣자마자 알겠더라. 저 새끼 척 보기에도 배신할 것 같지? 제 소굴에 데려다주는 순간 ‘날 위해 힘써주었구나, 고맙다 노예들아. 그러나 너희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 죽어라!’ 하고 뻔한 대사 외치는 거 아냐?”

롤랑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집이 백 층이라고 해서 배신할 거란 건 좀? 비약이지 그건?”

“왜 씹할? 오십 층이 딱 보스 층이었잖아? 백 층도 그럴 테니 저놈이 숨겨진 보스 아닌가? 모름지기 판타지에서 뭐 해주면 보상해주겠다, 이러는 새끼들은 다 뒤통수치게 돼있어!”

“결국 배신할 거란 증거는 딱히 없는 거잖아?”

“증거가 없으면 뭐? 그 새끼가 신의성실해 보이던?”

제이슨은 지금 클리셰만을 들어 그 난쟁이가 거짓말쟁이요, 배신하리라 주장하고 있었다. 역시나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내 롤랑은 말했다.

“아니.”

제 주장이 동의되자 제이슨은 웃었다.

모지도 거들었다.

“톨킨 이후로 난쟁이는 꽤 의리 있게 그려지곤 해. 하지만 막상 톨킨 작품의 모티브가 된 게르만 신화에서는 그렇지 않았지. 신화에서 난쟁이는 잔인하고 거짓을 일삼는 족속이지. 상대를 속여서는 아예 죽여 버려. 톨킨의 난쟁이와 같은 점이라고는 보물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단 것 정도야.”

예의 난쟁이는 딱 신화적 난쟁이의 전형 같았다.

아직 누군가를 속이지도, 살해하지도 않았지만 설령 그러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터였다. 그 성정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으므로.

문득 롤랑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느낌상 그런 거고. 실제 어떨 것인가 하는 증거는 당장 없지?”

“뒤통수 갈겨진 다음 그걸 증거 삼기에는 너무 늦어, 새꺄!”

“그건 알아. 아무튼 배신에 대비하더라도······ 약속은 이행되어야 해. 아무리 그 난쟁이가 수상하더라도 놈이 내민 보상을 무시할 순 없어. 알지?”

제이슨이 이죽거렸다.

“이 새끼 이거 성검에 눈 돌아간 거 봐라.”

“눈 돌아가긴?”

“아님 씹할, 성검 말고 딴 거 달라고 할까? 모지 지팡이 달라는 건 어때?”

롤랑은 그저 말없이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그에 맞서 제이슨은 씩 하고 웃어넘겼다.

끝내 모두는 결론지었다.

난쟁이가 제시한 보상은 부정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그러니 그 요구를 들어주도록 노력하되, 언제든 놈에게서 전통적인 배신을 당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자고.

그 결론이 내려지기까지 제이슨은 지겹게도 성검, 성검 하면서 롤랑을 조롱했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황금사과를 중점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 난쟁이만큼이나 못 미더운 족속이 또 있었기에.

메디아의 오스 왕, 그리고 그 친형인 오스론.

두 권력자는 병석에 드러누운 메디아의 본래 통치자, 오스마 여왕을 치료하겠답시고 황금사과를 원했다. 그것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소환된 영웅들은 이내 자유가 되리라는 언급과 함께.

그 말을, 두 사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세 영웅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

< 성밖 - [3] > 끝

ⓒ 검미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