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밖 - [2] >
그 말을 듣자마자 롤랑은 꺼림칙했다.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벌써부터 예상이 되었기에.
어쨌건 롤랑은 순순히 인정했다.
“적당한 가격에 팔려서 칼 한 자루 제대로 된 걸로 살 수 있길 바라오. 이 발리사다는 언젠가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테고 그리 되면 난 맨손이 될 터이니.”
혹시 돈 좀 꿔달라는 말이 나올지 몰라 미리 그 말을 차단해두고자 했다. 달리 돈 쓸 데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러나 오스론은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제 할 말을 했다.
“그 일부는 거룩한 일을 위해 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씹할 새끼.’
롤랑은 즉시 대답했다.
“물론 기부할 거요. 내 동포들이 있는 소환전과 이곳 비프로스트 신전에 각각.”
이쯤 말했으면 알아서 눈치 채고 입 다물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오스론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거룩한 일입니다. 가슴 깊이 존경하고 있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천상을 향한 헌금이 아니라 지상을 기는 인간 족속을 위한 나눔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돈 달라는 말이로군. 롤랑은 주저 없이 비꼬았다.
“지상을 기는 인간? 이를테면 추기경을 말하는 건 아니리라 믿소. 나눔이 필요할 것 같은 행색은 아니니까 말이외다.”
한 푼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절대.
더 이상 저놈의 추기경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되노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제 롤랑과 그 영웅은 굳이 후원자가 필요한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굳이 오스론과 함께 있는 것은 신들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신들이 저 추기경에게 이 영웅들을 지상에 불러내도록 허락한 이상 멋대로 저자와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복종할 이유도 없다.
얼마 전이면 모를까. 명성에다 재산까지 얻은 지금 저 막돼먹은 추기경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군대를 거느린 아이스피시한테도 삥 뜯기지 않았는데 저 새끼한테 뜯길 수는 없지. 말 그대로 피땀 흘려가면서 번 돈인데.’
마음속으로 그 결정을 굳히던 와중이었다.
오스론도 이쪽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매우 죄송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물론 절 위한 기부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요?”
“메디아에서부터 비프로스트 원정을 함께한 민초들 있잖습니까. 오직 신의 뜻을 따르고자, 성전을 위해 보따리 하나씩 들고 이 먼 곳까지 터덜터덜 걸어온 민초들. 지금 그들은 밖에서 구덩이 하나씩 파고 거지꼴 행색으로 연명하고 있지요. 그들을 이끈 원정 책임자로서 구제해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롤랑은 평소 의아해하던 것을 물었다.
“애당초 그들을 왜 끌고 왔던 거요? 추기경 당신이 비카파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던데. 이곳 백작이 적대하는 추기경께서 이끌고 온 무리를 반겨줄 리 없다는 것은 자명했잖소.”
“당시에는 그놈의 돈놀이꾼이 관문을 틀어막고 통행 자체를 금할 줄은 미처 몰랐지요. 조사가 미흡했던 제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제 잘못 때문에 그들이 전부 죽어나가는 건······”
“그래서 그 가엾은 민초? 그치들을 위해 내가 기부하면 그 돈으로 식량이든 뭐든 사서 베풀겠다 이거요?”
“예. 부끄럽지만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롤랑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없소. 그들을 위해 쓸 돈이 있다면 차라리 신전에 기부나 더 하겠소. 가엾은 민초? 성전을 위해 터덜터덜 걸어와? 내가 그때 본 것은 그리 어린양처럼 묘사될 만한 자들이 아니었소, 추기경. 내가 본 그들은 나병환자를 구타하고, 서로 강간하고 도둑질했으며 농부에게서 강도질하려 하는 무뢰한들이었지.”
오스론은 당황하여 변명했다.
“그건 그들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악한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리가? 모두들 자기네 일부의 범행을 좌시할 만큼은 충분히 악했잖소. 추기경. 그네들이 과연 추기경께서 보살펴주지 않으면 객사할 만큼 연약할지 의문이 드는구려. 정 굶주리면 서로서로 잡아먹기라도 하면서 연명할 작자들 같던데?”
롤랑은 이제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방금 그 말은 그저 돈 내주기 싫어 내뱉은 핑계가 아니었다. 실제 롤랑은 그들에게 조금도 동정심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핍박받았던 나병환자들에게 몰입한 나머지 적대감을 느끼면 모를까.
문득 롤랑은 동료들을 보았다.
이 와중에 모지 또한 뭐라 덧붙이지 않았다. 롤랑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찬동을 표했을 뿐.
오스론의 낯빛이 어두워지던 와중이었다.
“곧 제 몫도 들어올 예정입니다. 그 중 일부라도 괜찮다면 감히 예하께 드리고자 합니다.”
아말릭이 말했고 오스론이 눈을 크게 떴다.
“아말릭 경?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미약한 도움이나마······”
롤랑이 끼어들었다.
“아말릭. 정당하게 얻은 몫을 어찌 쓰든 경의 자유겠지마는 감히 좀 참견하겠소. 이번 탐색에서 죽은 또 다른 동료를 기억하시오. 마귈론 경 말이오.”
마귈론. 또 다른 나병환자의 이름이었다.
이번 탐색에서 마귈론은 죽었다. 트롤들과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레벨 업 따위는 하지 못한 마당이었기에 당연히 소생하지 못했다.
“마귈론 말씀이십니까? 그를 왜?”
아말릭의 물음에 롤랑이 대답했다.
“그 죽음을 애도해도 모자란 마당 아니오. 그런데 과거 그를 짓밟고 아예 죽이려 들던 작자들에게 적선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말릭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에 더욱 그들에게 기부하고 싶습니다.”
“무슨 소리요?”
“기부란 것은 위에서 아래에 베푸는 행위 아닙니까.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우위관계가 형성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그들보다 못났지만 이제는 아닐 것입니다. 문둥이 동료들······. 이제 저 이외에는 모두 죽었지만 그들 모두 기사로서 죽었습니다.”
롤랑은 위로하고자 덧붙였다.
“또한 전사의 죽음이었소.”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마귈론은 전사로서 죽었지요. 마귈론 역시 이번 탐색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얻은 전리품의 일부를 기부한다면, 그것은 마귈론이 기부하는 것 또한 될 것입니다. 그 행위는 마귈론이 저들보다 나아지는 셈이 될 것입니다.”
“마귈론은 원래부터 그들보다 나았소. 굳이 기부할 필요도 없이.”
“뭐 괜찮습니다. 문둥이니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것, 돈을 아껴봤자 그걸로 무얼 하겠습니까? 이곳 비프로스트에 왕국이라도 세울 게 아닐 바에야.”
롤랑은 복잡한 심경으로 아말릭을 바라보았다.
저번 마지막 트롤 부족과의 전투에서 아말릭과 알론소는 또 다시 레벨 업 했다. 그리하여 게임으로 치면 레벨 4가 된 지금 아말릭의 신체는 붕괴를 멈추었다. 건강과 신성 능력치가 오른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붕괴된 신체가 다시 복구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수명은 이제 어떨 것인가.
‘치료받지 못하는 나병환자의 수명은 짧을 것인데, 이 경우는 대체?’
롤랑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추측조차 불가능했다. 의학요소뿐만 아니라 판타지 요소마저 섞인 마당이었으므로.
어쨌건 닥치고 저축이나 하라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롤랑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오스론은 호들갑떨며 감격을 표했다.
“참으로 거룩한 뜻이오! 발두르 신께서도 이 선행에 기뻐하시겠지!”
갑자기 알론소도 끼어들었다.
“그럼 저도 한 손 보태지요, 예하!”
오스론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경도?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어쩐지 죄다 한 손씩 보태는 분위기였다.
롤랑은 다시금 모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모지는 이 문제에 끼고 싶지 않은 듯 식사에만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썩을.’
결국 닭다리를 씹다 말고 롤랑이 말했다.
“경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나 또한 약간의 성의를 보이겠소.”
오스론은 안면에 희색을 띄우며 외쳤다.
“정말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경!”
“하지만 내 몫에서 아주 일부만을 보탤 거요. 그리고 그마저도 그들에게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말릭 경에게 줄 것이고. 설령 아말릭 경이 도중에 맘이 바뀌어 그 돈으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요.”
오스론의 낯빛이 일순 어두워지려다 말았다. 명목상 누구에게 주는 것이든 무슨 상관일 것인가.
“결국에 그 자비가 닿을 곳은 하나입니다. 메디아의 일원으로서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경!”
오스론이 말했고 롤랑이 쏘아붙였다.
“되었소. 아말릭 경에게나 감사하시오. 그리고······ 기부를 한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지? 자선회라도 여나? 아니면 몸소 자리를 펴고 구호물자를 전달하나?”
“후자입니다. 추기경으로서 직접 봉사할 계획이에요.”
그 말을 롤랑은 추기경으로서 칭송받을 기회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그 봉사의 터에 아말릭 경도 함께하는 게 어떻소?”
아말릭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말입니까?”
“본디 성직에 몸담으려 했다고 들었소. 자선행위에 기쁨을 느낄 것인데, 추기경과 함께하며 예전의 기쁨을 다시 느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들 앞에서야 예의 가면을 쓰면 될 테고. 물론 싫다면 거절하셔도 무방하오.”
롤랑으로서는 그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 감시해줄 인원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그리 말했다.
그러나 아말릭은 그 제안을 달리 해석했다.
‘추기경과 함께 무언가를 하다니, 성직자 나부랭이라면 마다할 수 없는 기회야. 물론 나야 성직자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내 아말릭은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예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야.”
아말릭의 말에 오스론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함께해준다면 영광일 것이오.”
그러고는 모두 식사를 계속했다. 조금 시간이 흘러 오스론이 툭 던지듯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롤랑 경. 아주 일부라면 얼마나?”
“일 푼. 퍽 적겠소?”
롤랑으로서는 비꼬는 것이었으나 오스론은 그저 웃었다.
“아니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경!”
당장 롤랑은 그 웃음이 거짓웃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 위탁한 유물들이 팔리고서야 롤랑은 오스론이 그 말에 정말 기뻤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유물들은 그저 몇 점 팔렸을 뿐이었다. 그 몇 점 팔린 몫에서 또 몫을 나누어야 했다.
그러니 손에 들어온 금은 얼마 되지 않아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합원이 가져온 금에 롤랑은 아연해졌다.
“십만 닢?”
벌써?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조합원은 매우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몇몇 유물은 나중에 있을 경매에 내보내기가 껄끄러워 미리 경매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결코 부랴부랴 팔아치운 것은 아니노라 장담 드립니다.”
마치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는 투였다. 롤랑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현상금이며 괴물 시체를 팔아 번 수입의 절반가량이 한 순간에 들어와 버렸다.
상태 나쁜 물건만 몇 점 팔았을 뿐인데 저 가격이라니. 그렇다면 다 팔아치울 경우는 대체 얼마란 말인가?
이내 롤랑은 자기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침대에 파묻고는 혼자 히죽거렸다.
거기에서 얼마쯤 떼어내 빌어먹을 추기경에게 주어야한다는 사실은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런다 한들 충분한 돈이 모일 터였으므로.
일행은 그 돈으로 무구를 살 것이요, 목표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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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밖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