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68화 (68/164)

< 성밖 - [1] >

롤랑과 그 무리가 막 도시에 발을 디뎠을 때 세계수 앞은 인산인해였다. 앞서 귀환한 청소부들이 그들의 귀환을 알렸기에 미리 환영인파가 몰려왔던 것이다.

수많은 비프로스트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영웅을 구경하려는 무리, 혹은 영웅들과 함께하는 발키리의 눈에 들고 싶은 순례자 무리들.

“롤랑, 롤랑!”

“발키리여, 저흴 인도하소서!”

거의 종교집단을 방불케 하는 무리였다. 모지가 한껏 움츠러든 가운데 제이슨이 맨 앞에 서서는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제이슨은 모두 앞에서 잔뜩 힘준 목소리로 외쳤다.

“목소리 높여 우리를 맞이하라! 영웅들이 돌아왔노라!”

저따위 유치한 대사라니.

롤랑은 그 머리통을 쥐어박고픈 것을 애써 참았다. 수백 년 묵은 고대 영웅답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아예 중학생 수준의 대사 아닌가.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저놈은 제 하고픈 대로 해도 좋을 테니까. 알려진 인물배경도 없으니 제이슨은 굳이 자기 캐릭터를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달리 널리 알려진 영웅으로서 롤랑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든 요소를 통제하고자 애썼다.

잔뜩 지친 와중에도 안면은 거만하게,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등허리는 꼿꼿하게 펴고 양 어깨는 나른한 것처럼 보이도록 힘을 뺐다.

“롤랑 경, 이쪽을!”

여기저기서 그 이름을 불러왔지만 롤랑은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여기저기 호응해주는 역할은 제이슨 하나면 족했다.

롤랑은 그저 전방에 시선을 향한 채 힘 있게 걸어 나갔다. 기사들은 그 뒤를 기분 좋게 따랐다.

롤랑과 그 무리의 전진은 가히 시가행진에 가까웠다. 그저 길을 지나가기만 해도 건물에서 지켜보던 주민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여길 봐요!”

중세 기준으로는 거의 반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아가씨가 상반신을 창밖으로 내놓은 채 손을 흔들어댔다.

몇몇 기사는 물론 제이슨까지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는 휘파람을 불어댔다.

롤랑은 이제야말로 그 머리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럴 수야 없다는 사실에 심히 애석해졌다.

제이슨이 그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거둔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롤랑은 새삼 느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놈이라고.

‘현대 동양인 감성에는 썩 예쁘지 않을 아가씬데. 그걸 또 좋다고······.’

갑자기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롤랑은 슬그머니 그쪽에 시선을 보내고는 흠칫했다.

하늘을 아무 목적 없이 날아다니는 발키리가 보였다. 어느새 제이슨이 구경꾼들에게 과시하고자 불러낸 것이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롤랑도 작게나마 입을 열었다.

“제이슨? 함부로 소환물 불러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말은 제이슨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 제이슨은 웬 아이가 건네준 꽃을 받고는 히죽거리고 있었다.

사실 아이로서는 그 꽃을 누군지 모를 이 금발 놈이 아니라 그 옆 롤랑 경에게 주고 싶었던 것 같지마는.

결국 조합에 들어선 뒤에야 롤랑은 인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

겨우 숨을 돌리려는 차, 제이슨이 또 다시 영웅적으로 외쳤다.

“모험에서 영웅들이 돌아왔노라!”

그 순간 또 다시 조합건물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중 몇몇은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롤랑이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는 차, 일하고 있던 조합원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절했다.

“미리 마중 나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왕림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이 VIP 대접에 제이슨은 거의 좋아죽을 지경이었다. 롤랑은 저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이 방정맞은 동료를 반드시 때리겠노라 맹세하고는 입을 열었다.

“세계수에서 발견된 유물의 매매를 여기에다 위탁할 수 있지 않나. 그러려고 왔는데, 공증인은 지금 있나?”

그 요구에 따라 유물 매매를 담당할 전문가가 대령되었다.

얼룩덜룩한 가죽옷을 입은 비만 남자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러고는 공손하다 못해 비굴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비만 남자가 말했다.

“세계수에서 전리품을 가져오셨다고요? 그 귀중한 것을 저희에게 위탁하시어 신뢰함을 보여주시다니 실로 감격을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감히 지금 그 전리품들을 볼 수 있을지······”

비만 남자는 경매 중개인으로서 꽤 많이 벌어먹는 작자였다. 이곳 비프로스트에서도 꽤 행세하는 자였지만, 지금은 기꺼이 하인처럼 굴 작정이었다.

귀족들을 상대로는 능히 그래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 귀족들이 기사들과 이름 높은 영웅이라면······.

비만 남자가 손을 비비는 차 웬 종자가 우월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전리품을 보고 싶으시다?”

비만 남자는 속으로 욱했다. 좆도 없는 종자 새끼가?

제 주인 놈 죽으면 바로 이 오지에 버려진 미아 신세 될 놈이 저따위 태도라니. 내 수입이 얼만지나 알고 저러나?

비만 남자는 배알이 뒤틀렸지만 그저 웃어보였다.

“물론입죠, 저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단순 일이 아니라 보물 애호가로서 기대되는군요. 견식을 넓힐 드문 기회가 되겠지요. 자 그럼······”

얼른 보여줄 것 보여주고 내놓을 것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그 뜻을 알아먹지는 못했지만, 종자는 기꺼이 비만 남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종자가 수레를 가리고 있던 모포를 휙 당겼다.

그리하여 수레에 실린 내용물이 드러난 순간, 비만 남자는 종자가 왜 저따위 태도였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었노라고 인정해야 했다.

원래부터 비만 남자는 저들이 내민 전리품이 설령 뿔쥐 발톱이라고 해도 지고의 보물을 보는 양 경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정말이지 뭘 보든 간에 지극한 감격을 표하여 저들을 만족시켜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은 잊히고 지금 이 자리에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보물을 응시하는 한 남자만이 남았다.

비만 남자뿐이 아니었다. 사무를 보던 조합원들마저 모두 이곳에 시선을 향하고는 굳었다.

황홀한 황금빛이 이 자리의 모두를 홀리고 있었다.

“저기, 자네?”

롤랑이 말을 걸고서야 비만 남자는 제 업무에 나섰다.

롤랑과 남자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수수료와 세금 따위를 설정했다.

계약을 체결하는 동안 롤랑은 고고한 기사답게 자잘한 돈에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투로 말을 섞었다. 그러나 그 눈은 계약서의 작은 글씨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 모든 일을 마치고서야 무리는 헤어졌다.

“언제 또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롤랑 경?”

기사의 물음에 롤랑이 대답했다.

“기회가 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마음 같아서는 유물이 팔리면 그대로 평생 놀고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유물이 좋은 값에 팔리면 그 돈으로 무구를 사야할 것이다. 그 무구를 입고 더 많은 괴물을 죽여야 할 것이다. 그 괴물을 죽여 전리품을 얻는다면 그 또한 팔아 더 좋은 무구를 사는 데 보태야 할 것이다.

수많은 RPG에서 그러하듯이.

물론 오늘 그래야 할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롤랑은 기사들과 헤어져 저택으로 향했다.

대문 앞에는 지겨운 남자가 마중 나와 있었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영웅 분들!”

오스론이 말했고 롤랑은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저택의 창고에 들어가 앤지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벗었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지만 일단 이놈의 무구를 정리해야 했다. 특히 이놈의 갑옷부터.

별 마법도 걸려있지 않은 물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토 나오게 비싼 물건이었다. 이래봬도 메디아 궁성에서 직접 내준 물건이었던 것이다.

갑옷 외부는 물론 관절 사이마다 피와 지방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든 이물질을 닦아내고 기름을 묻혀야 했다.

이내 앤지가 손질도구를 가져왔다. 롤랑이 천에다 기름을 묻힌 순간 앤지가 말해왔다.

“기사님은 주무세요. 이건 제가 해놓을게요.”

그래도 되나?

될 터였다. 그것이 종자의 임무니까.

하지만 이 커다란 갑옷을 저 조그만 손으로 다 닦아내기는 벅찰 터였다. 그리고 신병에게 자기 총기 손질을 맡기는 병장처럼 굴기 싫었던 롤랑은 이내 말했다.

“너나 자라, 앤지.”

물론 앤지 역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후로 주종은 아무 말 없이 갑옷을 닦고 또 닦았다. 롤랑은 이미 아픈 와중이라 빌어먹게도 힘들었다.

‘광란의 아마디스에 롤랑은 자기 무구를 제 몸같이 여겨 남에게 함부로 내주지 않았다, 이 구절만 없었으면 그냥 하인들 시키는 건데.’

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지겨운 작업이 끝났다.

주종은 온통 더러워진 몸을 닦고자 함께 욕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러고는 잔뜩 지친 채로 침대에 함께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

트롤들의 층에 난쟁이의 보물이 잠들어 있더라는 소문은 이미 비프로스트 시내에 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늘로 말미암아 그 소문은 허망한 바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보로 화했다.

모험과 괴물에 질려있던 자들이 녹이 슨 병기를 쥐었다.

청소부, 소규모 모험가들. 그리고 심지어 군대를 이끄는 귀족들까지. 모두들 한 가지 목적으로 다시금 세계수에 올랐다.

난쟁이와 그들의 황금이 모두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 이용객이 폭증한 나머지 승강기 요금은 유례없이 비싸졌다. 심지어 보존식량 가격마저 폭등했다.

평소 걸레처럼 팔려나가던 보물지도는 이제 부르는 것이 값이 되었다. 그 수상한 지도들은 이제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황금 판으로 된 것인지 모를 가격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계수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더 많은 병력이, 더 전의에 넘친 채 최전선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속도로 트롤들이 죽어나갔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무거웠다. 좀 더 누워있어야 할 듯했다.

물론 침대에 누운 와중에도 펜은 움직일 수 있었다. 롤랑은 그렇게 했다.

서랍에서 캐릭터 시트를 꺼내 펜을 끼적였다.

롤랑 LV 19

- 광전사 LV 15, 성기사 LV 4

근력 8

민첩 8

정신 4

지혜 4

건강 5

신성 8

* 특기 : 장검 숙련 LV 4, 방패 숙련 LV 3, 중갑 숙련 LV 3, 반격 숙련 LV 3, 전투함성  LV 3

+ 염동력 LV 1

* 주문 : 원소 룬, 축복, 회복, 소생, 정화, 신 내린 무기

* 가호 : 초재생, 바람의 화신, 부활하는 자, 축복받은 피부

그동안 꽤 방치되었던 것을 한꺼번에 밀려 썼다.

사실 이 시트가 정확한지 아닌지 판별할 수 없었다. 능력치 면에서 특히 그러했다.

얼핏 기억하기로 오딘에게 좀 더 굳건한 신체를 바라는 동시에 건강이 상승한 것 같기는 한데. 역시나 정확하지는 않았다.

어쨌건 성장했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일단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하고는 계속 누워있었다.

그러다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얼른 서랍에 시트를 쑤셔 넣었다. 염동력으로 서랍을 닫아버린 직후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앤지였다.

“기사님? 예하께서 식사 하자고 하셔요.”

오랜만에 함께 식탁에 앉자는 것일까.

‘그냥 혼자 처먹지 좀.’

순간 그리 생각했지만 롤랑은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찌뿌듯하고 쑤셔왔지만 적어도 열은 없었다.

‘이걸 보아 그놈의 건강 수치가 오르기는 오른 것 같은데.’

이내 연회실에 가보니 모지 그리고 아말릭과 알론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슨은?”

롤랑의 물음에 모지가 대답했다.

“더 자려나 보던데?”

슬슬 롤랑은 놈이 부러워졌다. 역시나 남 눈치 보지 않는 놈 같으니.

이내 기도를 올리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롤랑이 닭다리를 씹는 와중 오스론이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 놀라운 성과를 얻으셨다 들었습니다.”

< 성밖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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