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 - [5] >
싸우기 전에 난쟁이의 보물을 어디 숨겼는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절벽 한 귀퉁이가 툭 튀어나오더니 웬 공간이 열렸다. 일종의 비밀통로였다.
그 안에서 콧김을 씩씩거리는 짐승들, 큰곰과 거대한 뿔사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숨겨진 공간. 그놈의 보물도 분명 저곳에 있을 것이다.
이내 기사들이 다시 한 번 전투나팔을 불었다. 방금은 선전 신호였다면 지금은 돌격 신호였다.
그리고 모두가 달려 나갔다.
“롤랑을 위하여!”
최선두는 당연히 롤랑이었다. 스스로에게 축복을 걸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온몸이 끔찍하게 아팠다. 움직일 때마다 사지가 삐걱거렸다. 심지어 전혀 내키지 않는 전투였고 죽이기 괴로운 상대들이 눈앞에 있었지만 롤랑은 티내지 않았다.
그저 용맹하게 달려 나가 발리사다를 휘둘렀다.
이쪽에 뭔가 수상한 주문을 쓰려던 늙은 트롤의 심장을 찌르고는 고함질렀다.
“오딘을 위하여!”
그리 시작된 전투는 기사들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트롤들은 늙은이와 몇몇 짐승들만 남은 터였다. 반면 기사들은 놈들보다 수적으로, 심지어 질적으로 우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의에서 앞섰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모두들 신속히 시체처리에 힘썼다. 기사 다섯이 죽었고 셋은 소생했으며 둘은 그대로 죽었다.
부상자는 꽤 많았지만 이제 어쭙잖은 상처는 그저 기도만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 마당이었다.
이내 기사와 종자들은 트롤들이 바라던 대로 해주었다. 트롤 시체들을 한 데 모아 그들의 움막과 함께 불살랐다.
이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끝냈다. 이제는 하고픈 일을 해야 할 차례였다.
“자, 전리품을 찾아봅시다!”
기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다. 한 무리는 아까 짐승들이 나왔던 비밀통로로, 나머지 무리는 절벽 위 동굴에 들어갔다.
롤랑은 동굴을 선택했다. 그 뒤를 네 동료와 모험가 남녀가 조용히 따랐다.
동굴은 아래로 깊숙하게 이어져 있었다. 점점 어두워졌고 모지는 주문으로 조명까지 제공해야 했다.
계속 걸어간 끝에 조명이 모퉁이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 있던 사물에 빛이 닿아 영롱한 광채를 흩뿌렸다.
노란빛.
아말릭이 다가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물건을 주워보았다.
크기가 좀 작긴 하지만, 투구였다. 황금으로 된 난쟁이의 투구.
아까부터 내내 움츠러들어 있던 알론소가 말했다.
“설마 그게 바로 타른헬름입니까?”
롤랑도 그 이름을 들어보았다. 난쟁이들이 만들어냈다는 마법 투구.
얼핏 듣기로 그것을 쓰면 투명해지거나 짐승 혹은 괴물로 변신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써보니 아무런 마법적 느낌도 나지 않았다. 결국 타른헬름이 아님은 드러났지만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전혀.
벌써부터 황금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더 있을 터였다.
모두들 기대에 차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계속 걸은 끝에 다른 무리와 마주쳤다.
분명 절벽 밑 비밀통로로 들어갔던 무리였다. 그들 모두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롤랑도 그곳에 시선을 옮기고는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써야 했다.
잔뜩 지친 마당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것은 피로를 잊게 하는 데 손색이 없었다.
지나가 중얼거렸다.
“난쟁이의 금······.”
모두들 짐처럼 쌓여있는 금 무더기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
황금 신상, 황금 그릇, 황금 단검 등등. 기타 은이나 대리석 따위로 된 물건에다 보석도 여럿 있었지만 모두 값졌다.
다름 아닌 난쟁이들이 손수 만든 유물인 것이다. 상태가 좋지 않음을 감안해도 충분히 수집가들에게 팔아치울 만했다.
롤랑의 중재 하에 그 보물들을 분배했다.
이 무리의 전리품 분배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활약한 자에게 우선 일 할. 그 다음으로 가장 용맹하게 싸운 자에게 일 할의 분배가 보장되었다.
최초발견자에게도 일 할의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나머지는 함께 싸운 자들이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식이었다.
이상의 규칙에 따라 롤랑에게는 황금의 이 할이 보장되었다. 거기에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사들은 자신들이 그저 수저만 얹었음을 알고 있었다. 절벽 위에는 이미 롤랑이 해치운 트롤들의 시체가 잔뜩 깔려 있었는데, 그 수가 아무리 봐도 당시 기사들이 싸웠던 늙은 트롤들보다 많았으므로.
“그리고 일 할은 앞서 이곳을 조사하신 두 모험가 분의 몫이오. 이의 있소?”
롤랑이 그리 말했을 때 지나는 한껏 긴장했다. 이제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시간인가?
그러나 기사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그로써 결정되었다.
두 모험가는 제 몫을 보장받았다. 롤랑이 그 권리를 보장했다.
이후로 롤랑은 척척 읊어나갔다. 분배는 조합 경매에 맡겨서 그 낙찰가로 계산한다느니. 지금 사망한 자들에게 추가로 몇 할 주겠다느니. 싸우다가 갑옷이 상한 조지 경에게 얼마 미리 줘야겠다느니 등등.
그 모든 사항에 기사들은 그저 알겠노라 답할 뿐이었다. 사실 홀로 결정해도 될 것 같았지만, 롤랑은 집요하게도 계속 동의를 받아내었다.
그토록 수월하게 금 무더기가 분배되는 것을 지나는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전설의 기사씩이나 되니까 돈 얘기는 입에 담기도 싫어할 줄 알았는데. 도맡아서 하네.’
지나가 보기에 그것은 훌륭한 일처리였다. 민감하고 불평 살 만한 일을, 얼핏 보기에도 공평하게 해내고 있다니.
결국 황금 무더기 분배는 원만하게 끝났다. 이런 상황에 흔히 예상될 만한, 탐욕어린 인간 군상들의 투쟁 따위는 없었다. 그 앞에 어마어마한 황금이 쌓인 마당이지만 그저 다들 자기 몫에 만족했다.
그 사실이 지나는 가장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난쟁이의 보물 따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저 황금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억울한 마당이었기에.
‘뭐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 저 무더기를 둘이서 옮길 수도 없고, 여기 트롤들을 어찌 처리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결국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열흘간의 탐색은 끝났다.
기사들은 귀환을 선택했다.
혹시 모를 배반에 대비하여 지나는 언제든 동료와 탈출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귀환하는 길은 별 다른 일 없이 그저 순조로울 뿐이었다.
계속 걸은 끝에 원정대의 주둔지가 보였다. 롤랑이 무리를 멈춰세웠다.
“잠시.”
이 층을 벗어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그동안의 전과를 원정대에 보고해야 했다.
무리는 잠시 대기시켰다. 롤랑은 몇몇 기사들을 이끌고 사령부 막사에 들어섰다.
롤랑은 사령관에게 말했다.
“몇 차례 전투를 마쳤소. 이제 돌아가고자 하오. 공작.”
아이스피시 사령관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고했소.”
어찌나 작게 말했는지 청력 좋은 롤랑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후로 롤랑은 사령관의 부관과 말을 섞었다. 탐색하면서 작성한 지도를 제출하며 보고했다. 여기 무슨 지형이 있었고 무슨 부락이 있었더라, 하는 내용을.
“이야, 남쪽을 싹 다 밀었군요?”
놀라운 전과에 부관은 탄성까지 내질렀다. 아이스피시로서는 듣기 괴로웠을 테지만, 그는 간섭해오지 않고 그저 외면할 뿐이었다.
이 순조로운 와중이었다. 롤랑의 귀에 웬 기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엄청난 금이었소! 그것도 난쟁이의 금이었지! 내 몫을 받으면 그걸로 갑옷이고 검이고 싹 다 새로 장만할 수 있을 거요. 그런데 당신네는? 전투의 영광 따윈 없이 그저 저 망쳐먹는 아이스피시랑 여기 멍하니 눌러앉아 있을 뿐이지? 그러지들 말고 이제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롤랑은 눈을 부릅떴다.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저 병신 새끼가?’
저 기사는 지금 막사의 다른 기사들을 상대로 전과를 떠벌리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들 앞에서 난쟁이의 보물을 구했노라 자랑하다니. 이 상황에 롤랑은 그저 경악하고 분노했다.
“입 다무시오!”
롤랑이 경고하고서야 기사는 겨우 닥쳤다.
그리 분개한 와중에도 롤랑은 흘긋 아이스피시의 눈치를 살폈다.
‘들렸나?’
들린 것 같았다. 그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것을 보니.
롤랑은 긴장했다. 한껏 모욕당한 와중에 이 개 같은 놈들이 황금까지 얻었다는 것이다. 마침 자기 군대가 여기 있겠다, 싹 다 죽여 버리는 것도 아이스피시로서는 나쁘지 않을 터였다.
문득 아이스피시가 중얼거렸다.
“위대한 롤랑 경께서 이제는 전설의 보물까지 찾으셨단 거지? 허 참.”
롤랑은 얼른 이별을 고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무리에 합류하여 발걸음을 서두르도록 했다.
온몸이 아작 난 뒤 기적과 재생력에 힘입어 겨우 치유된 마당이었다. 롤랑은 그저 걷기만 해도 괴로웠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모두와 함께 강행군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끝내 아이스피시는 이 경멸하는 영웅과 그 추종자들을 뒤쫓아 오지 않았다. 그저 막사에서 자기 부하들과 험담을 지껄였을 뿐.
*******
기사들은 이후로 하루 꼬박 걸었다. 그리 멀리도 걸어오던 와중 괴물이 보였다 치면 절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직진하다가 그 괴물이 다가오면 곧바로 죽여 버린 다음 계속해서 길을 나아갔다.
그 광경을 보며 지나는 상식이 파괴당하는 데서 온 충격을 받았다. 지금 이 무리는 숫제 작은 군대였다. 그것도 대단히 강력한.
주목할 만한 무리였고 그 지도자가 저기 있었다.
지나는 롤랑을 흘긋 보았다. 그 얼굴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리 계속 걸어온 끝에 밤이 되었다.
이제 푹 자고 일어나 몇 시간만 더 걸으면 오십 층에 다다를 것이요, 이후로는 승강기를 타고 편히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롤랑은 저녁을 먹고 눈 붙이고자 천막에 들어갔다. 이내 모포를 깔려니 누군가가 슬그머니 접근해왔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알론소였다.
“무슨 일이오?”
롤랑의 물음에 알론소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 꿇더니 절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롤랑 경. 제 탓에······.”
그래, 저 노인이 돌출행동을 한 탓에 자칫하면 다 끝장날 뻔했다. 트랜스 상태에 빠진 광전사는 멋대로 달려 나가 적들에게 부딪쳤고 실제로 죽을 뻔했지 않은가.
롤랑은 어찌 대답해야 하나 몰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옆에 있던 앤지가 불쑥 끼었다.
“미안하면 은퇴할 거예요?”
알론소는 이제 거의 죽을상이 되었다. 그 노인이 입을 달싹이며 어물어물하는 가운데 롤랑이 말했다.
“입 다물어라, 앤지······. 알론소 경?”
“예, 롤랑 경.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지요······.”
“되었소. 사실 그 돌출행동 덕에 결과는 좋았소. 그때 충돌한 늑대인간 트롤은 끔찍하게 강맹한 놈이었고 놈들의 졸개는 활까지 챙겨왔소. 기습 후 도망칠 생각이 만만이었던 게지. 만약 놈들에게 급히 따라붙지 않았더라면 이내 도주하고 다시 습격해왔을 터요. 그랬다면 우리 무리는 놈에게 잔뜩 당하고 여럿 죽었겠지만 경 덕분에 그리 되지 않았소. 끝내 보물까지 얻었지. 그렇듯 결과만은 좋았소. 그 덕을 입은 마당이니 더 탓하지는 않으리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알론소는 그저 울며 감격만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롤랑 경! 저는······”
그리고 롤랑이 말했다.
“다만 기억하시오. 알론소 경.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안 되오. 막무가내로 뛰쳐나가지 말고, 적들을 충분히 두려워하시오.”
앤지가 물었다.
“적들을 두려워해요?”
“그래.”
“기사가요?”
“기사든 학자든 적은 언제나 두려운 법이다. 그 두려움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용기인 거고. 그렇기에 용기가 가장 숭고한 거지. 그럼, 그래주시겠소, 알론소?”
알론소는 그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는 이제 거의 감동까지 드러나 있었다.
다 늙은 노인이 훈계 받고서 감격하다니. 이 상황이 롤랑은 퍽이나 우스웠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는 알론소가 광란의 아마디스를 줄줄 노래하는 소동이 있었다. 서장부터 종장까지 완창 할 기세였다.
그 찬양 따위는 필요없고 그저 얼른 자고 싶었던 롤랑은 거의 애원하듯 저 노인을 쫓아내야 했다.
그 후에야 겨우 아픈 몸을 뉠 수 있었다. 옆에 앤지가 누운 가운데 롤랑도 이내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비프로스트에 돌아왔다.
******
< 동굴 -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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