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 - [4] >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롤랑이 손을 내밀어주고서야 그것을 붙잡고 겨우 일어섰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못 쉬었다.
그 눈에 깔끔하게 목이 베여 죽은 호랑이 시체와, 그 거대한 사냥물에 전혀 감흥이 없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사가 보였다.
동료는? 신음하면서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다.
그것을 보고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이었다.
롤랑이 물어왔다.
“어쩌다 여기까지?”
너무 당황한 와중이라 여자는 말을 고르지 못했다.
“그, 난쟁이 보물······”
거기까지 말해놓고서도 여자는 기겁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방정맞은 스스로를 욕했다.
‘이 미친년이?’
계획에 따르면 이 영웅에게 자세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되었다.
이자에게는 그저 트롤 부락의 소탕만을 부탁하면 족했다. 저 부락이 없어져야 할 이유로는 대강 저 부락 트롤 중 웬 놈이 자기 동료를 죽였다든가 어쨌다든가 하는 핑계를 대면서.
‘절대 보물의 보도 꺼내서는 안 되었는데.’
여자가 속으로 신음하는 가운데 롤랑이 입을 열었다.
“난쟁이 보물?”
“그게······”
여자가 얼버무리려던 차, 롤랑은 중얼거렸다.
“이 층이 본디 난쟁이의 영역이라고 하더랬지. 그 유산을 찾고 있습니까?”
그걸 왜 알고 있나? 여자는 경악하여 뭐라 말을 이어야할지 알지 못했다.
한편 롤랑은 온몸이 아픈 와중에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쟁이 보물이라.
이미 들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난쟁이에게서 말이다.
용이 내준 난쟁이 석상은 사기가 아니었다. 정화의 기도를 거듭한 끝에 그 변신 주문은 풀렸다.
결국 석상은 살아 움직이는 난쟁이가 되었다.
이주 전, 이번 세계수 탐색을 시작하기 전에 그 난쟁이가 말한 바였다. 이 층이 본디 다른 난쟁이들의 영역이었다고.
그리고 선심 쓰듯 조언했다. 칠십이 층에는 당신네가 바라는 황금사과는 없겠지만 어쨌건 황금은 좀 남았을지 모르니 재주껏 찾아보라고.
그 말이 사실이었나? 그 사실이 롤랑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이처럼 난쟁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이외 다른 보물도······’
저주에서 풀린 난쟁이가 약속한 바였다. 자신을 본래 소굴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거기 있는 보물 중 가장 훌륭한 두 개를 기꺼이 내주겠노라고.
그 가장 훌륭한 보물 중 하나는 당초 바랐던 황금사과요, 다른 하나는 성검이었다.
성검 그람. 가장 위대한 성검 중 하나.
난쟁이가 덧붙이길, 사실 황금사과는 남아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건 과일인즉 시간의 흐름을 못 이기고 시들어버렸을지 모르니까.
그러나 성검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성검은 지금 아무도 뽑아갈 수 없도록 돌에 박힌 채이기 때문에.
어느 쪽 보물이건 롤랑이 애타게 바라던 물건이었다. 정말 있는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지금 그 난쟁이의 말 일부가 사실로 증명되었다.
좋아하다 말고 롤랑은 절뚝절뚝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 입 부근에 피가 흥건한 대머리 남자였다.
롤랑이 물었다.
“동료인가요? 저 분은 어쩌다 피를 흘린 겁니까?”
여자는 남자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까 그 호랑이랑 부딪쳐서요.”
“그렇다면 내장 어딘가 상한 모양이로군.”
웬만해서는 곧 죽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리라. 그러나 롤랑은 저 남자가 지금 이 높은 층까지 올라온 용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어쩌면 저 남자 또한 괴물과 싸우고 또 싸운 끝에 축복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신성해진 축이라면, 기적의 힘을 더욱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롤랑이 다가가서 기도를 올려보았다.
“위대하신 오딘이여, 이 전사가 발할라 궁에 오르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합니다. 물론 그 부름은 영광스러운 일일 터이나 더 많은 공훈을 쌓도록 기회를 주소서.”
치유 기도는 효과가 있었다. 몸에 회색빛이 휘감김에 따라 대머리 남자는 차츰 그 낯에서 죽을상을 지워나갔다.
‘과연, 레벨 업을 꽤 한 양반이로군.’
롤랑은 남자를 인상 깊게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선 여자도 아마 꽤 유능한 모험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웅들조차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있는 이곳을 둘이서 다닐 수는 없다.
여자는 동료의 회복을 확인하려는지 그 몸 구석구석을 만지고 있었다.
롤랑이 물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 절벽에서 거리가 벌어졌군. 두 분이서 절 여기까지 데려와주신 겝니까?”
여자는 남자를 만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아, 예!”
“지극한 감사를 표합니다.”
롤랑이 고개를 숙이자 여자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은혜를 입었음을 제 입으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제 요구를 할 수 있겠다. 그놈의 보물을 가로막고 선 트롤들을 몰살해 달라는······.’
여자가 무어라 말하려던 차였다. 저 숲속에서 일단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 명은 경계하여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추격해온 트롤 부대가 아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제이슨이 고함질렀다.
“야, 이 트롤 새꺄!”
그리고 그 옆에 선 기사들. 여자는 잠시 안도한 다음 이내 절망했다.
롤랑의 무리라니?
이제 롤랑에게 웬 부족을 소탕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이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 와중이라면 은밀하고 개인적인 부탁으로 롤랑 하나를 움직이기 버거울 것이다. 설령 그리 움직이게 만든들 그 주변 사람들의 의심어린 시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고민하는 가운데 롤랑의 추종자들이 다가와 그 옆을 둘러쌌다.
제이슨은 계속해서 욕설했고 다른 기사들은 그저 합류를 기뻐했다.
아말릭이 물어왔다.
“온몸에 못 보던 피딱지며 화상자국이 가득하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괜찮으십니까, 롤랑 경?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롤랑이 대답했다.
“전쟁신의 축복을 받은 가운데 싸움을 겪었소. 죽을 뻔했는데, 이 두 분께 구원을 받았다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여자에게 쏠렸다. 여자는 그 모든 시선에 부담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제 어째야 하나?
기사들이 몰려와 감사와 칭송을 마구 건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여자의 머릿속은 황금빛이 보일락 말락 빛났다.
‘난쟁이의 보물······.’
난쟁이 유물 하면 웬만해서는 부르는 것이 값인 법이다. 이런 오지에 방치되었으니 그 상태가 좋지 않아 예술적 가치는 덜할지 몰라도 어쨌건 충분히 값질 것이다.
그 보물을 하나라도 얻는 순간 지금까지 마녀로서 벌어두었던 재산을 능가할 수입이 한 순간에 들어올 것이다.
지금 허투루 입을 놀렸다가는 그 기회가 송두리째 날아간다. 어쩌면 목숨마저도.
‘어쩔 것이냐, 지나······.’
웬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둘이서 이 세계수를 누비다니 정말로 강심장이로군요! 솜씨도 좋을 테고. 경외를 표합······”
이내 여자가 말했다.
“제 이름은 지나입니다. 딱히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실적이 있는 모험가예요.”
“아, 예. 지나. 경외를 표합······”
“모험가로서 할 말이 있어요.”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지나는 말을 이었다.
“제 조사에 따르면 저 절벽에 난쟁이의 유물이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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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전리품을 독차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기사대가 토벌 목적으로 부락에 몰려갔다가 자칫 거기 있던 보물을 우연히 발견해버릴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결국 지나는 자기 탐색자로서의 공로라도 내세우기로 했다. 지금껏 조사해온 공로를 인정하여 혹시 보물이 몇 점 발견되면 자기 몫도 좀 챙겨달라고.
도박이었다. 보물의 존재를 아예 누설해버리는 도박.
그리 일을 저지른 뒤 지나는 기사들과 동행하는 내내 긴장했다.
‘혹시 보물이 발견되지 않아 헛수고하게 되면 분풀이로 날 죽이려 들지 않을까? 아니, 발견되면 더 위험하지? 분배에서 두 명 제외할 수 있도록 죽이려 들 수도······’
이내 기사대가 절벽 앞에 도달했다. 그 위로 통하는 좁은 길 앞은 이미 무장한 트롤 전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기사와 트롤들. 두 병력이 서로를 노려보고 대치했다.
그러나 기사대의 눈이 영광과 전리품에 대한 기대로 번들거리는 가운데. 트롤들의 시선에는 오직 하나의 괴물만이 비췄다.
그놈의 광전사가 돌아왔다.
거의 다 죽여 놨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멀쩡해져서는, 심지어 병력까지 끌고 돌아와 버렸다.
트롤들은 그 피로 물든 갑옷이 보인 순간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한편 기사들이 고함질렀다. 누군가가 전투나팔을 높이 부는 가운데 모두가 함께 외쳤다.
“지금 우리 검을 들어 선전의 뜻을 알리노라!”
나름 영광스럽게 전투개시를 선언해보았다. 이제 돌격하려는 차, 트롤 가운데에서 한 늙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놈이 말했다.
“뭘 바라나. 우리를 죽여, 뭘 얻으려는 건가.”
한 기사가 고함쳤다.
“너희 괴물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난쟁이의 보물!”
“보, 물? 황금?”
“그렇다!”
“그걸 내주면, 물러날 겐가?”
항복? 롤랑은 당황했다.
지금 트롤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예상 밖이었다. 약자 특유의 처량함과 비장감이 동시에 감돌고 있었다.
롤랑은 어쩐지 자기네가 약탈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오지의 원주민을 습격하여 그 재산을 가로채려는 세련된 정복자들.
그러나 저 원주민들을 못 본 체 해줄 수는 없다.
나무늑대는 그리 초월적으로 강한 괴물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놈들은 엄청나게 빠르고 신출귀몰한 것만으로 십 년 넘게 모두의 악몽이 되었다.
트롤들은? 언젠가 그 늑대 괴물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악몽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놈들 역시 신출귀몰하고 지능도 높으며 일격일탈 전술에도 능하므로.
해치울 수 있을 때 해치워둬야 한다.
만약 이 지형에 익숙한 트롤들이 유격전을 벌여온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당장 놈들은 인간 군대를 상대로 적극적인 유격전을 벌여오지 않는 마당이지만, 그것은 트롤들이 자기들끼리만 지낸 나머지 전투는 익숙해도 전쟁에는 경험이 일천한 까닭이라 분석되었다.
그러나 계속 치고받고 싸우다보면 놈들도 전쟁에 능숙해질 것이다. 훌륭히 무장하고 수적 우세로 덤벼오는 인간 군대를 상대로 어느 전술이 유용한지 깨달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전쟁에서의 승리 따윈 포기해버리고 그저 피 튀기는 보복전을 계속하길 원하는 게릴라로 화할지도 모른다.
그 지경까지 이르기 전에 죄다 쓸어버려야 한다. 세계수 정복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그래야했다.
‘그리고 세계수가 개척되어야 오딘을, 동포들을 구할 수 있어.’
결국 롤랑이 말했다.
“물러날 수는 없다, 트롤. 신들의 적, 거인의 말예야. 너희는 차지해서는 안 될 영토를 장악했고 고귀한 기사들의 목숨을 허망하게 꺼뜨렸다.”
“기사들의 목숨이라니? 우리는, 이번에 있었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백오십 년 전 얘기다, 트롤. 너희가 내 친우들을 죽였다. 젊고 신실했던 란스 경은 너희 독수에 당해 온몸을 뒤틀다 사망했다. 그건 그가 마땅히 맞이했어야 할 영광스러운 최후답지 못했다. 그 이래 나는 너희 족속에게 복수하기로 서약했다. 서약을 했다고, 트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나?”
사백오십 년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나머지는 알아들었다. 트롤이 말했다.
“끝내 놓치지 않겠다는 게로군. 아무도.”
롤랑은 부정했다.
“약간은 놓쳐주겠다. 아이와 노약자는 놓아주지. 성별 개념이 너희에게도 있다면 여성도. 하지만 전사들은 남아라. 싸워서 죽어라. 그게 너희 최후다, 트롤.”
나름 관대한 제안에 트롤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광전사.”
“제안을 거절하고 다 죽겠다고? 아이부터 전사까지 전부?”
“그건 아니고. 이미 살아남아야 할 자들은, 달아났거든. 이 자리에 남은 모두는 늙, 었으나 전사다. 다만 싸우기 전에 부탁 하나 하세.”
“듣겠다. 뭔가?”
“싸움이 끝난 다음, 우리 시체를 욕보이지 말고, 다 불살라 주게. 우리 집들과 함께 말이야. 창고에 기름통, 있으니까 불 지르는 데 그거 쓰고.”
트롤 시체는 돈이 되지 않는다. 롤랑은 쉬이도 수긍했다.
“알겠다.”
늙은 트롤은 감사했다.
젊은 전사들은 거의 다 부락에서 벗어나 있었다. 숲속에서 반쯤 죽은 채 도망치고 있을 광전사를 추격하기 위해서.
부락에 피어오른 연기는 그리 헛짓거리 하느라 바쁠 젊은 전사들에게 부족의 함락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돌아오지 말고 대피 중인 아이와 여성들이나 보호하러 가야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것이다.
늙은 트롤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명예롭군, 기사. 그러면서도 피에 굶주렸나? 오딘이 손가락질하던가? 전쟁을 원해? 그럼, 오게!”
< 동굴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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