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65화 (65/164)

< 동굴 - [3] >

둘은 달렸다.

남자는 시체 비슷한 것까지 짊어졌지만 거뜬하게 달렸다. 반면 지팡이 하나 들었을 뿐인 여자는 남자의 뒤를 따르기 벅찼다.

시체 비슷한 것을 짊어진 남자가 물어왔다.

“지나, 어디까지 가?”

여자는 달리느라 헉헉거리면서도 그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멀리까지!”

도망쳐야 했다. 트롤들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렇지 않으면 이내 쫓길 터였다.

지금 두 명은 트롤들의 손아귀에서 웬 괴물을 낚아채온 터였다. 부락에 쳐들어가 이내 잔뜩 죽여 버린 괴물을.

아니, 괴물이라 부르기는 민망한 일이었다. 여자가 추측하기로 이 괴물은 아마 롤랑이었으므로. 요새 비프로스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기사.

여자는 발키리도 보았다. 비록 화살에 적중당해 지금은 소멸한 마당이지만, 분명 발키리였다. 얼핏 듣기로 롤랑의 또 다른 영웅 동료가 불러낼 수 있다던가?

그가 위기에 처한 이상 기필코 구해내야 했다. 지금 여자의 사업에는 도움이 절실했으므로.

어려운 사업이지만 이 괴물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설령 이처럼 트롤들을 학살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자는 자신이 꽤 능력 있노라 자부했다.

여자는 유능한 마녀이자 모험가였다. 물론 후자의 능력도 출중했다. 그러나 주로 의지하는 것은 전자로서의 능력이었다.

지금 영웅의 구출에 쓰인 수단 또한 그러했다.

투명화 주문.

원래는 이런 마법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봤어도 직접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삼 주 전부터는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막 오십 층이 개척된 이후. 여자는 한 명의 전사 동료와 함께 세계수를 누비며 자잘한 괴물들과 싸웠다.

사실 썩 적극적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싸움은 이 동료 전사가 거의 다 했고 여자는 그 보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몇 번 전투의 결과 신들이 선물을 주었다. 동료 전사에게는 물론, 그 옆에 있던 이 마녀에게까지.

여자는 새로운 룬. 그리고 주문들을 깨우쳤다.

한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프로스트에 웬 소문이 퍼졌다.

‘괴물들과 싸우다 보면 신들께서 축복을 내려주신다.’

황당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주교가 직접 공언한 내용이요, 직접 겪기까지 한 일이었으니까.

이후로 여자는 괴물을 더 많이 죽이는 데 집착했다. 신에게서 더 많이 선물받길 원했으므로.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의 선물을 받았다지만 그래봤자 인간 나부랭이였다. 이곳 세계수의 괴물 대부분은 둘을 고기조각으로 나눠버리는 데 수 초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 강력한 괴물들 중에서 유독 약한 놈들, 그러니까 새끼라든가 작은 괴물 따위만 골라 죽여 나갔지만 금세 한계를 느꼈다.

어쩔 수 없이 둘은 수월하게 괴물을 죽이고자 임시 용병으로서 군대에 섞였다.

그리 전투를 계속하던 와중이었다. 그 군대가 삼 주 전 트롤 군대와 싸우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여자도 싸웠다.

썩 영광스럽게 싸우지는 않았다. 동료 전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지팡이에서 마법적인 불덩이만 계속 날렸을 뿐이니까.

그러나 이번 보잘것없는 전과에도 신이 마녀를 주목했다.

꿈에 나타난 프레이 신께서 말씀하셨다.

‘너 예쁘군. 내 기꺼이 네 분투를 감상했노라. 유흥의 대가로 선물을 주지.’

그 선물 중 하나가 바로 이 투명화 주문이었다. 잊힌 줄 알았던 고대의 주문.

이후로는 어쭙잖은 용병일은 그만두었다. 여자는 다시 동료와 둘이서 세계수를 누비기 시작했다. 새로 얻은 주문 덕에 그러기가 꽤 쉬워진 바였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보물지도를 얻었다.

원래는 이따위 물건은 믿지 않았겠지만, 고대의 주문을 얻은 마당에 고대의 보물인들 없겠나 싶었다.

이내 그놈의 보물을 찾고자 며칠이고 절벽 근처에 잠복한 끝에 오늘이 된 것이다.

이십 분 내리 달렸다. 끝내 여자는 체력적인 한계를 맞이했다.

“그. 만······”

다른 사람들은 축복으로 신체능력도 대폭 향상되었다던데, 여자는 그렇지가 못했다.

어느새 투명화의 효력도 끊겼다.

여자는 헉헉거리며 멈춰 섰다. 주문이 풀려 남자의 모습도 이제 제대로 보였다. 여자와는 반대로 그저 태연한 모습.

남자가 그 옆에 다가섰다.

“지나? 괜찮아?”

여자는 뭐라 말하려다가 이내 헛구역질만 몇 번 했다. 그러고는 이내 불안한 눈으로 남자가 짊어진 영웅을 살폈다,

롤랑.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쨌건 초인적인 영웅.

아까 흘긋 보았을 때는 반쯤 시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 몰골이 많이 나았다. 벌써 회복된 것인가?

아까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꼴이었는데. 여자는 이제 놀라다 못해 소름마저 끼쳐왔다.

‘진짜 괴물인가? 아니면 진짜 롤랑?’

요새 비프로스트에서는 웃돈을 줘야 살 수 있게 된 무훈 시, 광란의 아마디스를 여자 또한 읽어보았다. 물론 거기서도 롤랑은 성기사이자 광전사였다.

하지만 이런 괴물이라고는······.

갑자기 남자가 빽 고함질렀다.

“괴물!”

여자는 놀라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가 몸을 버둥거리는 것이 보였다.

‘반시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랐나?’

여자는 일순 그리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마구 치며 저 언덕을 가리켰다.

“괴물!”

여자도 그쪽을 보고는 흠칫했다.

처음에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놈의 줄무늬가 보호색 작용을 하여 그 몸을 주변에 동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보니 거기에 정말 괴물이 있었다. 맹금류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고양잇과 괴물.

날개호랑이.

여자는 다시 주문을 외고자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호랑이가 날개를 쫙 펴고 언덕 위에서 활공했다.

그 비행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여자가 그저 경악하는 가운데 남자가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러나 괴물의 덩치는 곧 질량이었다. 이내 호랑이를 막아낸 남자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땅을 굴렀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충돌의 여파로 호랑이도 꽤나 아픈 듯했지만, 어쨌거나 견딜 만해보였다.

그 괴물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내 날개호랑이가 울부짖었다. 그 포효에 담긴 초저주파를 약자들은 견딜 수 없다.

여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비된 사냥감을 향해 괴물이 다가갔다.

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 줄무늬만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쭉 잘해오다가도 갑자기 나타난 괴물에게 최후를 맞이한다니.

허망하고도 흔한 일이었다. 모두들 여자의 최후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요 관심도 없을 것이었다.

여자가 눈 감은 순간, 옆에서 뭔가 몸 달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호랑이가 또 다시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협을 위한 포효가 아니라 고통에 겨운 비명이었다.

*******

“이 똥겜은 대체 뭐야? 메디아?”

롤랑이 물었고 카를이 대답했다.

“그래. 지금 스팀 세일 중이니까 너도 사서 해라, 응? 츄라이, 츄라이!”

이 순간 롤랑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당황했다.

스팀 세일이 뭔가?

저 사람이 카를 황제인데. 황제가 저리 못생겼나?

아니, 황제? 아무리 봐도 인종부터가 다른 놈 아닌가. 왜 자신은 저자를 황제라 생각하는 것인가?

롤랑의 당황과는 별개로 그 입은 태연하게 열렸다. 이로써 롤랑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롤랑의 입이 물었다.

“꼴에 온라인 기능도 있네. 매칭 잡히긴 잡혀?”

“어. 외국 유저들만 가끔. 그네들이랑 영어로 채팅하면서 나 지금 회화 숙달하고 있다? 이대로 영어 실력 쭉 늘면 워킹홀리데이도 꿈이 아냐.”

”워킹홀리데이? 호주가서 돈 벌고 싶다는 거?”

“그래. 얼른 이놈의 헬조선을 떠야지.”

카를이 말했고 롤랑은 히죽거렸다.

“헬조선이건 뭐건 생판 외국보단  편할 건데? 애당초 워킹홀리데이 그거 말처럼 꿈과 희망이 넘치는 게 아니라니까. 호주 가봤자 한국인끼리 뭉쳐 다니느라 영어는 쥐뿔도 안 늘고 물가 비싸서 돈도 안 모인다고.”

카를은 딱 잘라 말했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롤랑의 입은 혀를 찼지만 무어라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친구가 추천하는 괴상한 게임이나 계속 구경하기로 했다.

카를의 성기사 카를이 나아갔다······.

롤랑은 이 관계를 이해 못해 다시금 당황했다.

문득 롤랑의 입이 말했다.

“한국 벗어나고 싶단 건 왜? 인서울 했고 제대도 했으면 한국 살기 그리 나쁘지 않을 건데.”

“나쁘지 않긴? 난 여기 좆나 싫어. 이번에 뽑힌 대통령도 좆같고 그걸 뽑아준 국민들도 좆같아. 애비 보고 그 자식 뽑다니 다 미친 거 아냐?”

“선거결과가 싫어서 나라를 뜨겠다고? 내가 보기엔 네가 미친 거 같은데?”

롤랑의 말에 카를이 부연했다.

“그거 말고도······ 이 땅의 서열문화가 특히 좆같아. 내가 이등병 생활 무난하게 해낸 건 다 이놈의 대학에서 새내기 시절 굴러가지고 적응된 덕분이었다니까? 지금은 복학생이니 괜찮다 쳐도 취직한 후 신입사원이면 다시 밑바닥 신분으로 전락하는 거지?”

“다 그렇지······.”

“그리 굽실거리는 생활 다시할 거 생각하니 그냥 저 멀리 튀어버리고 싶다. 이 땅에서 상사의 노예노릇 쭉 해내서 좀 신분상승한들······ 북괴 쳐들어오면 숭고한 군인정신 발휘하랍시고 다시 노예로 끌려가겠지?”

“끌려가면? 헬조선 좆까, 하고 탈영하게?”

롤랑은 비웃듯 물었으나 카를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거야······ 모르지. 상황이 그쯤 되면 애국심이고 뭐고 전투거부에 따른 불이익이 무서워서라도 싸워야 하지 않나? 아무튼 그럼 너는?”

갑자기 현실적으로 대답하다니. 롤랑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도 별 수 있나? 싫어도 싸워야겠지 뭐. 물론 지금처럼 평화로운 게 제일이지만.”

그 순간의 평화를 웬 짐승의 포효가 깼다.

길을 지나가던 카를의 성기사 카를 위로 웬 괴물이 덮쳐왔다.

날개 달린 호랑이.

카를이 놀라 비명 지르는 차 호랑이가 덮쳐왔다. 두 날개를 펼쳐 날아오며 괴물이 포효했다.

어흐으으으응, 하고. 스피커에서 쩌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꿈꾸는 자를 그 꿈에서 쫓아내기 충분할 정도였다······.

*******

일어난 즉시 롤랑은 꿈에서 본 내용을 마무리 지었다.

웬 호랑이가 보였고 롤랑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로 달려들어 놈의 목에다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꽂아 넣었다.

그리고 날개호랑이는 죽었다.

롤랑은 잠시 자신이 무슨 일을 해냈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괴물이 습격해왔으며 무의식적으로 놈을 해치웠노라고.

‘신전에서 괴한들이 습격해 왔을 때 그저 벌벌 떨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저 꿈에서 반쯤 깬 상태로도 괴물 하나 죽일 수 있게 되다니.’

롤랑으로서는 자신의 변화에 거의 감개무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운에 오래 잠길 수는 없었다.

옆에 주저앉은 누군가가 눈을 떴다.

“어?”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롤랑은 저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외관으로 그 성별을 알기는 힘들었다. 오래 모험한 탓인지 얼굴이 때로 꼬질꼬질했기에.

어쨌건 주저앉은 여성을 상대로 기사가 무덤덤할 수는 없는 법이다.

롤랑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는 상황에 걸맞은 대사를 읊었다.

“괜찮습니까, 아가씨?”

“어, 예······”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 동굴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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