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62화 (62/164)

< 절벽 - [5] >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초 하고도 약간.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가장 두려운 상대의 공격이 남아있었다.

마침내 화려한 트롤이 행동에 나섰다. 발걸음을 내딛는 그 표정이 굳어져 있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짧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놈 또한 보았으므로.

광포하게 방패를 내뻗고는 트롤이 돌진했다.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아르, 테미스!”

그 거대한 방패 너머로 자라나는 짐승의 털을 롤랑이 확인했다. 늑대인간 변신.

이내 롤랑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방어 위로 늑대의 방패가 부딪쳤다.

손목을 저려오는 거대한 충격. 롤랑은 눈에 힘을 주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썩을.’

역시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똑똑한 짓이 아니었다.

롤랑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그것을 빈틈으로 해석한 트롤이 연속해서 공격을 퍼부으려는 차, 롤랑은 염동력 발판을 만들어 밟았다. 그리하여 밀려나던 몸을 앞으로 곧추세웠다.

그 반탄력을 실어 발리사다를 내리찍었다.

“꺼져—!”

이번에는 늑대에게 거대한 충격이 가해졌다. 방패를 잡은 놈의 팔이 진동하듯 흔들렸다.

가공할 힘이었다. 늑대의 주둥이는 긴장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끝내 방패를 놓치지 않은 채, 늑대는 뒤로 도약했다.

한 번의 발동작만으로 늑대는 저 멀리 거리를 벌렸다.

이제야 삼 초.

늑대는 착지하자마자 다음 돌진을 준비했다. 그 사실을 롤랑은 쉬이 알 수 있었다. 늑대의 다리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으므로.

또 다시 예의 막강한 충격을 가해올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뒤에 동료가 쓰러져 있으므로.

롤랑이 고함질렀다.

“알론소, 일어나!”

알론소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끙끙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어찌어찌 기도를 외워 자기 몸에 치유의 빛을 감돌게 하면서.

그러나 롤랑이 안심할 틈은 없었다. 예상했던 공격이 덮쳐왔으니까.

“먹어, 라!”

이번에도 방패를 내세운 채 늑대가 온몸을 부딪쳐왔다. 그에 맞서 롤랑은 다른 반격수단을 강구했다.

순식간에 늑대가 당도했다. 놈이 부딪쳐오려는 순간 롤랑은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뻗었다. 하단차기.

늑대의 하반신을 노렸다. 그리고 명중.

무릎에 맞았다. 늑대 트롤의 한쪽 다리가 꺽여 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놈은 반격을 가해왔다.

주저앉으며 늑대 트롤은 방패를 내리 찍었다. 그 뾰족한 밑에 찍혔다가는 다리가 뜯겨날 것이다.

롤랑은 황급히 그 다리를 회수했다. 그 틈을 노리고 늑대 트롤이 거대한 앞발을 휘둘러왔다.

롤랑은 주저 없이 반격했다. 룬검이 타원을 그렸다. 그리하여 늑대의 발바닥에다 발리사다를 꽂아주었다.

칼날은 앞발에 깊숙이 박혔다. 늑대는 고통에 혀를 씹으면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괴, 물! 죽어!”

늑대가 고통을 분노로 바꾸어 발차기를 날려 왔다.

늑대의 거대한 뒷다리가 덮쳐왔다. 그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당장 손이 묶인 마당이라 롤랑은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늑대의 발이 롤랑의 흉갑을 걷어찼다.

판금이 우그러지며 롤랑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허공을 나는 와중에도 롤랑은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도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그런데 너무 멀리 있었다. 어째서?

그야 롤랑은 너무 빨리 달려왔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 또한 지금 이 격전은 체감하기로야 꽤 길었어도 사실 수십 초밖에 지나지 않은 채였다.

롤랑의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그 몸이 지면에서 한 바퀴 구른 순간, 알론소가 예비용 장검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오, 오오오오오오!”

쓰러진 채로도 롤랑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저 정신 나간 노인네. 용맹하면 뭐하나? 별로 강하지도 않은 주제에 막무가내로 뛰쳐나가다니.

이내 트롤들의 시선이 알론소를 향했다.

창이며 활을 든 놈들뿐만 아니라 늑대 트롤마저 그러했다. 늑대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알론소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내 늑대가 제 앞발에 잡고 있던 곤봉을 뒤로 던져버렸다. 결코 평화의 신호일 리가 없었다.

저 늑대가 맨손으로 알론소를 짓이기려는 모양이라고 롤랑은 생각했다.

그러면 어째야하나? 가뜩이나 제 몸 간수하기도 벅찬 마당인데 죽게 내버려둘까?

그리 냉정한 판단은 아니었다. 소생 주문이 있으니 죽어도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롤랑은 생각했다. 알론소의 신성은 몇인가 하고.

소생가능 조건인 4는 될까? 물론 알 수 없었다. 게임이라면 성기사인즉 신성이 높으려니 유추할 수 있어도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소생할 수 있도록 시체가 온전할지 여부도 알 수 없었다······.

이내 늑대가 달려 나갔다. 그에 맞서 알론소는 용감하게도 장검을 휘둘렀지만 그 장검의 칼날은 이 늑대인간의 송곳니만 못했다.

“억······”

이내 늑대의 앞발에 알론소의 손목이 잡혀버렸다. 엄청난 악력이 손목보호대를 압박하자 알론소는 비명 질렀다.

이내 늑대가 그 거대한 주둥이를 벌렸다. 그리고 붙잡힌 상대를 물어뜯고자 들이밀었다. 늑대의 본능으로서 당장 노린 것은 그 목덜미였다.

이내 물어버리려던 차, 그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었다.

“꺼지라고!”

롤랑이 늑대의 주둥이에 주먹을 쑤셔 박았다. 당장 끼어들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먹이 입천장을 강타했다. 절로 늑대의 머리가 위를 향했다.

그 끔찍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늑대 트롤은 정신을 놓지 않았다.

이내 늑대가 주둥이를 다물었다. 콱 하고, 그 안의 주먹을 깨물었다.

주먹을 통해서 롤랑의 온몸에 불이 번졌다.

롤랑은 끔찍한 통증, 마치 화형과도 같은 통증을 느꼈다. 고통으로 얼어붙은 턱으로나마 애써 포효를 내질렀다.

“개새끼—!”

그리고 아직까지도 제 왼손을 물고 있는 늑대를 향해 오른손의 룬검을 휘둘렀다.

롤랑 또한 상대의 목을 노렸다. 그 섬뜩한 공격을 보며 늑대 또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방패를 든 팔은 반대편에 있었다. 늑대는 급한 대로 한쪽 팔이라도 들어올렸다. 발리사다가 빛났고, 늑대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 와중에도 늑대가 주둥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안에서 롤랑은 자력으로 주먹을 빼내야 했다. 주둥이 속 이빨의 날카로움을 느끼며 팔을 잡아당겼다.

고통과 함께 피에 젖은 왼손이 회수되었다.

‘제발 불구가 되지는 않았기를. 장갑과 축복받은 피부가 근육을 잘 보호했기를.’

간절히 빌며 롤랑은 늑대의 시선을 보았다. 어디로 공격해올지 보기 위해서였는데, 이내 늑대는 공격에 나서지 않고 뒤로 펄쩍 도약해버렸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뒤늦게나마 다른 네 명의 트롤이 동시에 창을 찔러왔다. 그에 맞서 롤랑은 급히 한 손으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해내야했다.

그리하여 둘은 막아내고 둘은 베어버렸다.

나머지 놈들도 얼른 베어 넘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늑대와 함께 덮쳐 오리라.

롤랑은 트롤 둘을 상대로 맹공을 퍼붓는 와중에도 저편에 시선을 주었다.

롤랑은 저기 서있는 활잡이 트롤을 보았다. 그리하여 놈의 시선이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했음을 포착했다. 불길했다. 저놈이 뭘 보고 있나?

또 한 마리 트롤의 심장을 찔러버렸다. 다른 트롤은 겁 먹은 나머지 뒤로 내뺐다.

겨우 여유가 찾아왔다. 롤랑은 예의 활잡이가 보고 있는 곳, 그러니까 숲속에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등에다 트롤을 태운, 거대한 뿔사슴 세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적 기병의 합류. 롤랑은 이번에는 늑대를 보았다.

놈은 고통에 양 턱을 달달 부딪치면서도 자기 잘려나간 팔을 절단면에 접붙이고 있었다.

그 처량한 시도는 헛수고가 아니었다. 양 절단면의 근육다발이 달라붙으며 서로 합쳐지고 있었다.

하기야 늑대인간에게는 재생력도 있다. 익숙한 설정인데 잠시 잊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적까지 다가오는 마당인데, 아군은?

곧 다가오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너무 늦을 것이다.

이내 롤랑은 어쩔 수 없노라고 판단했다.

있는 힘을 다해 발리사다를 휘둘렀다. 또 한 마리 트롤을 해치웠다. 그러나 이미 기병들은 반쯤 다가왔고 늑대의 팔은 거의 다 달라붙었다.

어쨌건 남은 것은 활잡이 트롤, 그리고 저놈뿐이었다.

롤랑은 이제 한기마저 느껴지는 피투성이 주먹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위대한 오딘이시여. 제 삶과 영혼은 당신 것이니 이 종이 계속 모실 수 있도록 제발······.’

치유의 빛이 그 손을 감쌌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통증에 절어버린 주먹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내 늑대 트롤이 방패마저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통나무를 집어 올렸다. 양 팔로 말이다.

늑대가 다가오는 가운데 롤랑은 계속해서 기도했다. 다만 이번에는 포효하듯이.

“이 전쟁을!”

이내 늑대 트롤이 돌진해왔다. 통나무를 쥔 채로도 그 질주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롤랑이 외쳤다.

“오딘께 바친다!”

그리고 광전사가 붉은 세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

달려들던 늑대는 보았다. 갑자기 충혈 된 괴물의 눈을.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원한과 증오를 보았다.

그리고 광전사가 움직였다.

그 괴물이 달려온 순간 늑대는 눈을 크게 떴다. 이미 끔찍하게 빨랐던 괴물의 질주가 더욱 빨라졌기에.

가속된 것은 질주뿐만이 아니었다. 금세 다가온 광전사가 룬검을 휘두른 순간 늑대는 그 속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찌어찌 본능으로 통나무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손목에 힘을 주기도 전에 가슴 속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늑대가 피를 토했다. 그 등 너머로 칼날이 삐죽 빠져나왔다.

뒤이어 복부의 충격과 함께 늑대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광전사가 칼을 뽑아내고자 늑대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지면에 널브러지고 심장이 꿰뚫린 채로도 늑대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늑대는 아르테미스 여신께 맹세했다. 이 숲과 부족을 지키겠노라고. 당장 동료들이 쓰러진 마당이지만 계속 싸워야······.

심장의 박동이 그쳐가면서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부족전사를 구하고자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는 아군의 합류뿐만 아니라 적군의 합류 또한 볼 수 있었다.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승산이 없었다.

광전사가 다가왔다. 그 룬검이 늑대의 목을 겨냥함과 동시에 늑대가 고함질렀다.

괴물의 룬검이 요사한 궤적을 그렸다.

“도망, 쳐!”

그것은 유언이 되었다. 머리통이 땅을 구름과 함께 늑대의 세상이 회전했다.

광전사는 저 기병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언제나 넘쳐나는 트롤들. 지겨우나마 놈들과 싸우려는 차, 트롤들을 태운 뿔사슴들이 질주하던 방향을 바꿨다.

광전사가 눈썹을 꿈틀거린 순간 기병들은 이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달아나다니?

물론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광전사가 한창 싸우던 시절에도 트롤들은 언제나 저따위였다. 기습사격 후 숲속으로 달아나 자취를 감추고, 보급품을 약탈해 달아나고, 기습이 실패하면 미련 없이 달아나고······.

트롤들이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나갔다. 그리 만들어낸 시체들을 비웃으며 트롤들은 꽁무니를 감추곤 했다. 다음 약탈을 기약하고자.

놈들의 뒷모습만 봐도 주체 못할 살의가 치솟았다.

광전사는 울분에 겨워 자신의 신께 애원했다.

“오딘이여!”

그리고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에서 창을 뺏어들었다. 그 창에 신이 내린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던져버렸다.

그리하여 달아나던 기병 하나의 등짝을 관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당황하면서도 계속 달아나고 있었다.

쫓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았지만 광전사는 멈춰섰다. 무기에 신을 내리게 한 여파로 온몸에서 일순 힘이 빠졌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광전사를 향해 그 동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제이슨이 고함질렀다.

“롤랑, 괜찮냐!”

물론 광전사는 괜찮지 않았다. 증오스러운 적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내버려뒀다가는 언젠가 아군을 죽이고 군량을 빼앗고는 신들을 모욕할 놈들이었다.

그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광전사는 저기 숲 너머 절벽을 보았다. 저기가 분명 본거지일 것이다. 그리 판단하고는 늑대인간이 써먹었던 뼈 방패를 주워들었다.

이내 예의 절벽을 향해 포효했다.

“절멸하리라아아!”

그리고 광전사는 달려 나갔다. 달아나는 적들을 쫓아서.

제이슨이 달려나가며 애타게 고함질렀다.

“멈춰, 새꺄! 멈추라고!”

그러나 그 질주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제이슨의 목소리는 금세 닿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기사대가 쓰러진 알론소 옆에 다다랐다. 아말릭이 서둘러 알론소를 돌보는 가운데 제이슨이 욕설을 지껄였다.

“저 미친 트롤 새끼가!”

알론소 옆에 무릎 꿇은 아말릭이 기도했다. 치유의 기도에 감싸인 채 알론소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경께서······ 절 감싸려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지는 눈치 챘다. 유령 군마에다 걸어준 가속 주문 하나가 이 사태를 불러오고 만 것이다.

‘돌격을 더 빨리 하려는 거야 알았어도, 알아서 적절한 시기에 그럴 줄 알았는데.’

자신의 탓은 아니었으나 엄습하는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모지가 불안하게 입 다물고 있는 차, 제이슨이 하늘을 향해 고함질렀다.

“발키리! 저 트롤 새끼 쫓아가! 제 동족이랑 합류하려는 거 못하게 막아!”

*******

< 절벽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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