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 - [4] >
모두들 그 방향에 시선을 향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트롤들이 타고 왔던 곰, 그리고 사슴의 시체들이 수축하고 있었다. 놈들 짐승의 몸에 난 털이 사라지고, 갈색 살가죽이 표면을 덮어나갔다.
변이한 끝에 짐승 시체들은 트롤 시체로 화했다. 이 이해 못할 광경에 모두들 그저 눈만 깜박거렸다. 대체 이게 뭔?
웬 기사가 중얼거렸다.
“트롤들이 변신이라도 했던 것인가? 그리고 죽음과 함께 마법이 풀렸나?”
문득 아말릭이 다가가 방금까지 짐승이었던 트롤 시체를 만져보았다.
한참 더듬거리더니, 놈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들어 자세히 바라보았다. 초승달 장식의 목걸이.
이내 아말릭이 말했다.
“이건 아르테미스 여신의 문양이군요.”
기사가 물었다.
“아르테미스? 달의 여신?”
아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그리고 숲, 사냥, 짐승의 여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녀는 아틀란티스 여신 아니오? 한 줄기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세계수에 어찌 다른 대륙의 여신이 흔적을 남겼나?”
“글쎄요. 잘은 몰라도 일부 거인들이 티탄 신들을 섬긴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티탄도 저쪽 아틀란티스의 신들 아닙니까? 아마 자기네가 섬길 신들이 마땅치 않으니 딴 대륙의 신이라도 신앙하는 게 아닐까 싶군요.”
사실이 그러했다. 지금 전멸한 트롤들의 부족은 우연한 계기로 그 존재를 알게 된 이방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겼다.
여신의 축복을 받고자 그들은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모종의 의식을 치렀다. 여신의 눈요기가 될 만한, 성스러운 난교(亂交) 의식을.
그 의식에 주목한 아르테미스 여신이 손길을 내린바, 이내 트롤들은 거대한 야수로 변한 것이다.
그 야수로의 변화가 사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사실을 트롤들은 알지 못했다. 아르테미스는 순결의 여신이기도 하며, 그녀로서는 트롤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역겨운 짓을 하자 응징했을 뿐이란 사실을.
아마도 그 사실을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여신과 이들 부족과의 사이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므로.
*******
기사들이 그저 쏘다니다 적과 마주치면 죽일 뿐은 아니었다. 그들은 원할 대로 하면서도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지난 전투 이후, 패퇴하는 트롤들을 쫓아 원정대는 파죽지세로 위를 향해 돌진했다. 그 결과 원정대는 벌써 세계수 칠십이 층에 다다랐다.
이 층이 트롤 부족들의 본거지였다.
원정대는 이곳 칠십이 층의 주요거점마다 주둔지를 형성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하여 층의 중심부를 장악함으로써 트롤들의 세력권을 완벽하게 쪼개놓는 데 성공했다.
원정대의 중심병력은 중심부에 눌러앉아 트롤 부족들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그리하여 트롤들이 부족 간에 힙을 합치지 못하는 가운데 소규모 정예들이 각개격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기사들이 활약하기 딱 좋은 판국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롤랑의 무리는 지난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공훈을 쌓았다.
그들 무리는 소수였으나 가히 작은 군대였다.
까마귀들이 군대를 따르듯 대규모의 청소부들이 그 뒤를 뒤따랐다. 그러다 전투가 벌어지면 잔뜩 생겨난 시체를 챙겨 돌아갔다.
그 귀환은 단순 힘겨운 운반노동이 아니었다. 세계수에 내려간 그 청소부들은 이내 우쭐해지곤 했다.
롤랑의 기사대를 따르던 청소부들이 귀환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치면 비프로스트의 온 주민들이 나와 구경했던 것이다. 그들이 운반해 온 괴물 시체들을 보기 위해서.
그보다는 못할지언정 여러 기사대가 활약하고 있었다. 그 중 염동장군 보어조아와 그 휘하 염동력자들은 유독 주목할 만한 무리였다.
보어조아는 자신의 상관이던 아이스피시에게 정식으로 이탈을 선언하고는 그 지휘에서 빠져나왔다.
이후로는 자신만의 병력을 이끌고 온갖 괴물들을 죽여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보어조아와 염동력자들 또한 자신의 신을 마주했다.
그리하여 수차례 선물을 받았다.
이제 보어조아와 그 측근들은 염동력자로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치 강력해졌다. 의지만으로 나무를 부수고 바위를 집어던졌다.
여럿이서 힘을 합치면 대포 몇 문 옮기는 것쯤 쉬운 일이 되었다. 지난 전투에서 전설이 되어버린 대포를 수리해서는 이 높은 층까지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보어조아의 의뢰를 받아 공방장인들은 그처럼 고강해진 염동력자들을 위한 전용무구 제작에 한창이었다. 염동검, 염동갑옷 따위의.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작은 포(砲)의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고 했다. 보어조아가 지난 전투에서 포의 존재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리 의뢰했노라고······.
이렇듯 모두가 힘을 다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에게서 무능하다 비난받는 아이스피시조차 주력군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한 마당이었다.
그 모든 사실에 롤랑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든든함, 그리고 쫓기는 자 특유의 위기감을.
‘본래 싱글 게임에 가깝던 RPG가 뒤늦게나마 온라인 게임이 되어버린 셈이지. 선두주자였던 우리 유저는 게임 캐릭터로 치면 랭커인 셈이다. 그러나 그 우위 따위, 멍하니 있다가는 언제 따라잡힐지 모른다. 모두들 발전하고 있듯 우리도 계속 진보해야 해······’
문득 알론소와 아말릭을 바라보았다.
저 두 현지인 동료는 그동안 열심히도 싸웠지만 또 다시 신을 만났노라 밝히지는 않았다. 게임처럼 말하자면 그 레벨 업 속도가 예상보다 더뎠다.
낮은 레벨에서 세계수의 강한 괴물들과 싸우다 보면 빨리도 성장하리라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당장에는 롤랑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저 둘의 성장이 느리다면 나머지 현지인들은 더할 테니까.
자, 어서 할 일을 하자. 저들에게 뒤처지지 않게.
롤랑은 그 모든 상념을 지우고 우렁차게 외쳤다.
“다음 정찰지가 보이는군. 주의하여 나아갑시다!”
기사들 역시 기운차게도 화답했다.
“롤랑을 위하여!”
슬슬 저 구호가 듣기 지겨웠으나 롤랑은 만면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모두들 주변을 경계하며 나아갔다.
주변 지형은 숲이었다. 아마 이곳이 트롤 부족의 영역일 터였다.
정찰에 나선 발키리가 말했기로 저 숲 너머의 절벽 위에 움막들이 보였더랬다.
이 험난한 지형조건에도 불구하고 알론소는 말에 탑승한 채 나아갔다. 모지가 불러준 유령 군마 위였다.
방금 보았던 기현상이 일종의 모험심을 자극한 듯했다. 알론소는 쾌활하게도 말했다.
“모지 경, 왜 그 바람이 몸을 감싸는 주문 있잖습니까.”
“가속?”
“그래요, 그거. 이따 적을 마주치면 그걸 이 유령마에 걸어주실 수 있을까요? 돌격의 위력이 훨씬 증대될 거 같은데요.”
모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알론소는 몇 번이고 감사하노라 주절거렸다.
한편 롤랑은 최선두에서 그저 조용히 걸어갈 뿐이었다. 제 입으로 방심하면 안 된다 말했듯 롤랑은 도저히 맘 놓을 수 없었다.
숲에서라면 발키리라도 그 매복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전투화장까지 한 놈들이니 육안으로 발견하기도 고역이리라. 나아가다가 기습사격이라도 당했다가는······.
롤랑은 과도할 만치 온정신을 전방에 집중한 채 걸어나갔다. 그랬기에 갑자기 벌어진 기습에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반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풀이 흔들리더니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이미 롤랑은 발리사다를 빼든 채였고 주저없이 휘둘렀다. 그리하여 날아오던 발사체 중 세 개를 갈라버렸다.
화살 세 개가 딱, 딱 하고 떨어졌다. 나머지 화살 한 개는 롤랑의 흉갑에 맞아 힘없이 튕겨나갔다.
수풀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어조.
“방금 그거, 뭔?”
당연히도 적들이었다. 즉시 공격에 나서고자 롤랑이 땅을 박찬 순간, 저 멀리에서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화장과 문신으로 온몸을 치장한 트롤들. 아까 봤던 놈들과 같은 부족 출신일 터였다.
‘오딘께 내 영혼을.’
축복과 함께 달려가며 롤랑은 주변을 살폈다.
숲속임에도 도로 비슷한 공간이 보였다. 저곳으로 언제든 기병이 난입해올 수 있음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롤랑이 돌격함에 따라 트롤들은 활을 치우고 창을 빼들었다. 그 수는 겨우 여섯.
롤랑이 할 만하다고 느끼던 차, 갑자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두르여!”
그리고 알론소를 태운 유령 군마가 롤랑을 추월하고 달려 나갔다.
정신 나간 일이었다. 롤랑은 본디 초인적으로 빨랐으며 축복까지 걸린 지금 그 속도는 가히 질풍이랄 만했다. 그것을 넘어서는 속도라니, 어떻게?
기겁하여 바라보니 유령군마에 실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가속 주문.
과연 그 속도는 무지막지했으나 롤랑은 저 돌격이 성공하리라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돌격한들 달랑 혼자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왜 저런 돌출행동을? 아까 마주친 적을 영웅 둘이서 죄다 해치워서? 자기 몫이 적었던 것이 서러웠나?
“알론소, 그만!”
롤랑이 고함질렀으나 알론소는 그저 제 속도에 취해있을 뿐이었다. 애당초 저 가속이라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었겠지마는.
과연 트롤들은 그 속도에 경악하면서도 착실하게 대응했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창을 앞으로 내뻗으면 되었으니까.
놈들을 향해 알론소는 그저 신나게도 달려 나갔다. 그 노인이 늘어뜨린 창은 지금 황금빛으로 빛나지 않았다. 신 내린 무기는 아까 쓴 뒤였고 그것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내릴 수 있는 기적이 아니었다.
“돌······”
이내 알론소가 충돌했다. 그러나 그가 늘어뜨린 창은 목표물에 닿지 못했다.
역으로 트롤이 내뻗은 창이 알론소가 올라탄 유령 군마를 관통했다.
유령 군마가 소멸함과 동시에 알론소는 비명 지르며 땅을 굴렀다.
알론소의 투구가 벗겨지고 그 얼굴이 지면을 긁었다. 피 흐르는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는 그 노인을 죽이고자 트롤들이 창을 찔러왔다.
뒤늦게 달려 나간 롤랑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뻗어오던 창을 자루 째로 잘라버리며 이를 악물었다.
‘젠장.’
좋지 않았다. 알론소를 구하고자 너무 빨리, 멀리까지 달려와 버렸다. 원래는 아군 기사들이 적절히 따라잡을 수 있도록 달려야 했는데.
일단 적들의 수부터 줄이고자 롤랑이 한 발을 내딛었다. 트롤 하나가 이 적에게 맞서고자 다가왔다.
그러나 그 앞을 더 화려하게 화장한 트롤이 가로막았다.
그 화려한 트롤은 거대한 방패를 앞세운 채 중얼거렸다.
“비켜. 이 괴물, 화살 베는 거 봤잖아.”
무시무시한 강적이니 자기가 상대하겠다는 소리였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마저 롤랑은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저놈은 화살을 막는 초인을 상대로 싸울 자신이 있단 거로군.’
정예 괴물의 등장인가? 끔찍한 사태였다. 아무런 전조 없이, 적들 중에 웬 강적이 섞여있는 패턴.
게임에서도 이런 패턴이 자주 있었다. 감흥이 없을 만치 빈번한 일이면서도 그런 사태에 마주할 때마다 롤랑은 욕설을 지껄이곤 했더랬다.
역시나 이 돌발 상황에 마주하자니 롤랑은 침착할 수 없었다. 놀라지는 않았지마는.
어쨌건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던 것이다. 게임 내 인스턴트 던전에서도 그랬는데, 하물며 가장 위험한 이곳 세계수임에야.
입술을 씹으며 롤랑이 발리사다를 휘둘렀다. 간단한 견제 동작이었으나 빠르고 묵직했다.
그에 맞서 화려한 트롤은 방패를 들어 막았다. 그 순간 발리사다에서 느껴진 충돌에 롤랑은 다시금 신음했다.
발리사다에 맞서 방패는 뚫리지 않았다. 금속이 아니라 가죽과 뼈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므로.
이내 롤랑이 방패 위로 공격을 퍼부으려던 순간, 양 옆에 있던 트롤들이 창을 뻗어왔다. 심지어 한 놈은 활까지 겨누는 마당이었다.
이 상황에 롤랑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뒤에 알론소가 나자빠진 와중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롤랑은 발리사다를 들어 얼굴을 가린 채 적들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어진 삼 초 사이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맨 먼저 화살이 시위에서 벗어나더니 창날 두 개가 덮쳐왔다. 그리고 화려한 트롤의 곤봉 쥔 팔이 꿈틀거리는 것을 롤랑은 보았다. 연격이 덮쳐올 터였다.
그리하여 롤랑은 선택했다.
궁수는 무시하고, 그저 발리사다를 비스듬하게 들었다. 이내 적들이 공격해왔다.
빠르게 찔러온 창의 물미에 롤랑은 칼날의 옆면을 걸쳤다. 이어서 칼날이 물미를 자르지 않고 그저 적당히 박히도록 힘을 준 다음, 칼날 각도를 꺾어 옆으로 휘저었다.
창과 함께 트롤의 몸이 당겨졌다. 그에 휘말린 다른 창잡이의 창 궤도마저 엉켜버렸다. 트롤 둘이 쥔 창들은 교차하다 자루끼리 부딪쳤다.
화살은? 명중해버렸다. 롤랑의 이마에.
그러나 살갗을 좀 찢다 말고 튕겨나갔다. 맞은 부위가 불타오르는 듯이 아팠지만 롤랑은 화살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애초에 저리 되리라 예상했으므로.
< 절벽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