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 - [3] >
지난 열흘, 롤랑과 그가 이끄는 기사들은 적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마주친 모든 트롤 부대를 격파했고, 눈에 띈 수많은 괴물들을 잡아 죽였다.
잡아 죽인 몇몇 괴물은 상품가치가 있어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대부분의 괴물은 그저 그 고기만큼의 가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해치우기 유독 힘든 몇몇 괴물들마저 그러했다.
현상금마저 걸려있지 않았다. 이 층은 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곳의 괴물들은 아직 큰 악명을 떨치지 못했으므로.
결국 당장 괴물 토벌은 대단한 금전적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물론 기사들로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그저 영웅과 함께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그러다 보면 신과 만나 선물까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저 모두들 영광스럽게 싸워 한 놈이라도 더 많은 적을 쓰러뜨릴 수 있길, 그 결과 신들께서 자신을 주목하시길 바랄 뿐이었다.
롤랑은 그런 무리의 대표자였다. 맨 앞에 뛰쳐나가, 그저 영광만을 바란다는 듯 열렬히 발리사다를 휘둘렀다.
그 모습은 그저 용맹하고 투쟁만을 갈구하는 듯 보였다. 지극히 영웅답게도. 그렇기에 저 위대한 영웅이 당장 금전적으로 목말라 하고 있음을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더 좋은 장비를 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금이 필요했다.
롤랑은 앤지가 닦아 칼집 속에서도 빛나는 발리사다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대단한 칼이었다. 그동안 수십 마리 괴물을 베었음에도 날 하나 상하지 않았을 만큼.
그러나 이 놀라운 룬검은 롤랑의 칼이 아니었다.
‘월렴의 것이고, 그 가문의 것이지.’
지금 롤랑이 쓰고 있는 것도 내심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롤랑은 자기 것이 아닌 이 칼을 어딘가에 잡혀있을 본래 소유주, 월렴을 더 수월히 구해내겠다는 명분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영영 그럴 수 없을 테니, 언젠가는 반환해야 할 것이다.
결국 지금 일행의 소유물 중에서 그들 수준에 걸맞은 물건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용에게서 제이슨이 받았다는 지팡이. 그 용이 까마귀로 변하곤 했다는 이유로 까마귀 지팡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용을 이기고서 고작 지팡이 하나 받았다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롤랑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났기로, 당시 거래는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높이서 날아다니던 발키리가 내려왔다. 그러고는 정찰한 결과를 보고했다.
“저쪽, 백이십 보 거리에. 트롤 스물.”
모두들 그 말에 따라 시선을 향했지만 별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수풀만 보였는데, 발키리의 말이 옳다면 저기 적들이 숨어있을 터였다.
트롤들. 사람과 닮아 죽이기도 껄끄러울 뿐더러 죽인들 마땅한 전리품도 주지 않는 적들이다. 그러나 놈들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었다. 놈들 또한 경험치는 줄 테니까.
롤랑은 즉시 지시했다.
“돌격.”
지시 내린 본인부터 뛰쳐나갔다. 포효하듯 자기 자신을 축복하며.
“오딘께, 내 영혼을!”
땅을 박차는 그 다리 사이로 회색빛이 감돌았다.
풀이 자라난 부드러운 땅을 밟고 달려나갔다.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롤랑이 질주함에 따라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로써 매복한 적에게 기습할 수는 없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발키리가 보고한 순간 모두들 저쪽 수풀에 노골적인 시선을 보낸 바였다. 저기 숨어있을 트롤들도 슬슬 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수풀에서 뛰쳐나온 트롤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달려 나가던 롤랑이었다.지금 나타난 트롤들의 모습이 지금껏 본 놈들보다 명백히 현란했기에.
‘전투화장?’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치장한 트롤들. 온몸에는 현란한 문신이 새겨졌다.
RPG에서 저토록 특이한 적수들은 정예인 법이다. 롤랑의 눈에 힘이 들어간 가운데 웬 트롤이 입을 열었다.
“순차, 발사!”
트롤들이 기다란 대롱을 불었다. 그 안에서 독침이 발사되었다.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 순간 롤랑은 지체 없이 땅을 굴렀다.
회전하는 시야로도 롤랑은 아직 발사를 마치지 않은 적들을 포착했다.
순차 발사. 연달아 발사된 독침이 롤랑의 얼굴을 노렸다. 롤랑은 고개를 숙여 안면을 가렸다. 이내 독침들은 투구에 맞아 툭툭 떨어졌다.
롤랑은 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즉시 일어났다. 이내 적들에게 달려들려던 롤랑의 눈에 웬 기현상이 보였다.
트롤들의 뒤에서 시퍼런 에너지가 일렁였다. 에너지는 순식간에 부풀더니 이내 웬 사람 크기 만해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일 초.
그리 형성된 차원문 안에서 뛰쳐나온 흑기사는 아무런 전조 없이 검을 휘둘렀다.
대롱을 쏘려던 트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차원문 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준비한 것 같은 기습이었다.
그 짧은 순간의 동요가 롤랑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발짝 내딛으며 롤랑이 발리사다를 내찔렀다. 그 일격은 트롤의 빈약한 가죽방어구를 간단히도 관통했다. 사실 판금갑옷이었으면 더욱 쉬이 뚫렸겠지마는.
그렇게 한 마리 해치운 다음 롤랑은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주변에 있던 트롤 셋을 동시에 공격하고자.
웬만해서는 정신 나간 동작이겠지만 그 손에 들린 칼이 발리사다라면 그렇지 않았다. 칼날이 회전하며 거기 닿은 목 세 개가 연달아 날아가 땅을 뒹굴었다.
롤랑이 연속해서 공격을 퍼붓는 가운데 흑기사 또한 트롤 하나를 또 베었다.
이제 남은 적은 불과 열 마리. 롤랑은 아군이 닿기도 전에 다 끝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경험치를 제이슨과 둘이서만 차지할 수 있어 이득 아닐까······.
그러나 갑자기 땅이 울렸다. 롤랑은 그쪽에 시선을 향하고는 아연해졌다.
‘트롤 기병들?’
뭔가에 올라탄 트롤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올라탄 것이 말이 아니라 거대한 사슴과 큰곰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영락없는 기병대였다.
트롤 기병은 열 놈이나 되었다. 놈들이 늘어뜨린 창은 피를 머금고 빛났다.
‘기병돌격에 정면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
롤랑은 다리에 힘을 주고 옆으로 빠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침을 삼켰다. 굉음을 울리며 달려오는 놈들이 실로 무시무시했기에.
이내 회피하고자 뛰려던 순간, 롤랑은 허공에서 서릿바람을 느꼈다.
롤랑의 앞 공간에서 서리거인이 뛰쳐나왔다.
본래부터 제이슨은 꽤 멀리에 소환물을 불러낼 수 있었다. 16레벨 소환사 특기로 ‘원격소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에게서 얻은 지팡이로 말미암아 이제 제이슨은 더 멀리, 훨씬 빨리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우트—가르—트—!”
거인이 너무 갑작스럽게 뛰쳐나왔기에 달려오던 기병은 창을 들지도 못했다.
서리거인이 달려 나갔다. 포효를 내지르며, 마주 달려오던 기병에게 그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트롤을 태운 사슴의 질주가 멈췄다. 그리고 참격. 사슴은 뿔과 두개골 째로 박살나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물론 그 위에 올라탄 트롤도.
롤랑은 돌격에서 피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거인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이내 롤랑은 저들 기병의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우선 보이는, 큰곰에 올라탄 기병. 저 곰도 일종의 괴물인지 덩치가 끔찍하게 컸다.
롤랑이 달려든 순간 기병보다도 먼저 탑승물이 반응했다.
큰곰이 휙 하고 몸을 돌려 롤랑을 향했다.
이내 곰이 덮쳐오고자 다리에 힘을 준 가운데, 그 옆구리에 칼날이 꽂혔다. 흑기사의 칼이었다.
고통에 따른 경직을 놓칠 수 없었다. 롤랑이 즉시 곰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 가죽 두께에도 불구하고 칼날은 쉽게도 박혀 들어갔다. 그리고 쉽게도 빠져나왔다.
이내 곰이 쓰러졌고 그 위에 올라탄 기병이 노출되었다.
“죽, 인다!”
노성을 내지르며 기병이 달려들었다. 롤랑이 방어 자세를 취한 순간, 트롤이 창을 휙 하고 찔러왔다. 민첩한 일격.
그러나 롤랑이 보기에 그 궤적이 너무나도 뻔했다. 쉽게도 고개를 돌려 피해낸 다음, 그 가슴팍을 갈라버렸다.
트롤은 컥, 컥 거리더니 이내 곰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곰과 함께 꺽꺽댄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내 아군 기사들이 당도했다. 유령군마에 올라탄 알론소가 특히나 두드러졌다.
“발두르여!”
그 손에 들린 창은 신이 내려 황금빛으로 빛났다. 찬란한 발두르의 빛. 이내 알론소의 돌격이 목표물에 명중했다.
트롤은 그 가슴팍이 꿰뚫림과 함께 날려나가 황금빛 최후를 맞이했다.
뒤이어 기사들이 섞였다.
그리하여 격전이 벌어졌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된 뒤였다. 기사들의 합류는 트롤 기병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포위망을 형성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롤 부대는 전멸했다.
짧은 격전이었으나 충분히 치열하게 싸웠다. 기사들은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만면의 미소를 머금었다.
괴물과 싸웠고, 통쾌하게도 이겼다. 그 사실이 모두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역시······ 함께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나날이군요. 매 전투가 기적의 현장입니다. 전설의 기사가 앞장 선 가운데 발키리가 날아다니고······”
기사는 롤랑뿐만 아니라 제이슨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키리 아래의 제이슨에게.
요새 제이슨의 입지는 가히 명성을 얻었노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기네 윗사람의 명예를 위해서, 아이스피시 사령관의 군종 사제들은 당연한 상식을 들어 주장했다. 발할라의 전사들은 강림할 수 없는 법이라고. 그놈의 신비기사가 설령 전설적으로 강하다 할지라도 전설의 인물일 수 없는 이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사제들조차 이 발키리의 존재는 어찌 설명해야 하고, 어찌 부정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어느새 다가온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그 입 꼬리는 거만하게 올라가 있었다.
“뭐, 이 정도야······ 고대에는 일상풍경이었다오.”
롤랑은 새삼 느끼던 충동, 그러니까 저 밉살맞은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정말 그럴 경우 프레이 신께서 기뻐하다 못해 레벨 업을 시켜주지 않을까?
그러나 기사는 그저 경탄만을 바칠 뿐이었다.
“정말이지 부럽고도 한탄스러운 노릇입니다! 이토록 혈기 넘치는 제가, 그 황금시대에 태어나지 못하고 이 지루한 시대의 일원일 뿐이라니요?”
“뭐 그리하여 세계수에 올랐잖소. 앞으로는 지루할 틈이 없을 거요.”
“그 사실만이 제게는 안식입니다! 괴물들과의 혈투는 언제나 영광스럽지만 고통스럽기도 한 것이었는데, 귀 영웅들과 함께라면 그저 영광만이······”
기사의 말에 롤랑이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뒤따를 거요. 방금이야 쉬이도 이겼지만 늘 그럴 수는 없어. 언제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세계수요. 이 순간을 즐기되, 결코 방심하지 마시오. 기사여.”
단순 제이슨과 그 추종자가 맘에 들지 않아 핀잔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롤랑은 나무코끼리들을 몇 마리 베어버린 다음 마주친 코끼리 영매를 떠올렸다.
저들 트롤들은 이쪽 기사 무리의 수가 적다는 사실에 승산을 보았으리라. 그러나 이들 무리에는 초인이 셋이나 있었으며 나머지 인원들 또한 조금씩이나마 다른 인간들 보다 두드러진 자들이었다.
겉만 봐서는 그 사실을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상상 이상의 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
코끼리 영매 또한 그 정도는 덜해도 마찬가지였다. 겉만 봐서는 그 기이함을 알 수 없었고, 그저 전리품만을 바라고 놈과 맞붙은 끝에 일행은 낭패를 보았다.
갑자기 마주친 강적은 언제나 당황스러운 법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롤랑이 이내 생각에 잠긴 차, 한 소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감격에 차 나불거렸다.
“물론입니다. 절대 방심하지 말라?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롤랑 경!”
그러던 와중이었다. 누군가가 비명 질렀다.
< 절벽 - [3]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