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 - [2] 유료연재 시작입니다 >
“왕이 호령하면 종은 추종할 뿐이다. 종이 궂은일에 착수할 때 왕은 옥좌에 앉아 일이 잘되길 빌 뿐이지. 그러나 모두를 호령하며 가장 고된 사업에 발 디딘 자들이 있으니 바로 너와 같은 자들이다. 영웅이여.”
롤랑은 즉시 머리를 땅에 박았다. 감격에 겨워 빨갛게 물든 얼굴을 가리고자. 그 부끄러운 모습을 감히 주인께 내보일 수 없었다.
롤랑의 주인, 미드가르드의 창조자는 혀뿌리마저 드러난 와중에도 웃어보였다.
“가장 비천한 노예조차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 마당이다. 놈들의 하잘것없는 도움마저 절실한 마당에 가장 위대한 영웅이 내 종이라니? 네 무력한 왕은 그저 기쁨에 겨워 잠자코 기다릴 뿐이구나.”
롤랑은 그렇지 않노라 마구 고함질렀다. 자신은 그리 대단하지 않으며, 당신께서는 결코 무력하지 않노라고.
롤랑의 괴성은 귀를 아프게 찌를 정도였다. 분명 듣기 싫을 터였으나 오딘은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오딘은 인자한 아버지답게, 그저 부드러이 말할 뿐이었다.
“네 전쟁은 가장 황홀한 룬이 되어 내 가슴 속에 빛난다. 그 일부는 내가 가질 것이나 나머지는 돌려주어야겠지. 홀로 영원히 간직하고픈 맘이야 간절하다마는 독차지하려다간 더 얻을 수 없는 법. 네 왕이 빚어낸 룬을 주리라. 무엇을 원하느냐?”
롤랑은 선물 따위 없이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입이 반쯤 열리다 말고 냉큼 닫혀버렸다.
오딘께서 저번에 말씀하셨다. 선물하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고. 같은 말씀을 두 번 하시게 만들 수야 없다.
이내 무엇을 바라야 할지 몰라 롤랑은 고심했다. 고심하고 또 고심하다가 문득 자기 팔을 만져보았다.
근육질답게 탄력 있었다. 그 사실이 롤랑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롤랑이 입을 열었다.
“본래 제 몸은 좀 더 단단했던 줄로 아옵니다.”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네 견고함에는 오직 영웅 지크프리트만이 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본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나약한 몸뚱이 하나뿐. 그 손실을 서글피 여기지 말라. 다 네 주인을 구하기 위한 희생이 아니더냐? 네 희생은 반드시 보답 받으리라. 내 기필코 보답하리라. 우선은 작은 보답이라도. 등을 돌려라, 롤랑.”
롤랑은 분부에 따랐다.
오딘이 예의 보답을 시작함에 따라 어마어마한 고통이 뒤따랐다. 이내 기꺼이 감내하고는 롤랑은 자신의 팔을 만져보았다.
그리하여 더 이상 자신의 살결이 부드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롤랑의 피부는 마치 돌이었다. 단단한 돌.
이 선물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롤랑은 넙죽 엎드려 부르짖었다. 당신의 은총에 더없이 감읍하노라고.
“마치 화강암 같은 피부입니다!”
그러나 오딘은 자신이 준 선물에 만족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화강암이 단단해봤자 결을 치면 쪼개지는 법이다. 네 피부는 본디 강철과 같았는데 지금은 겨우 암석이로구나.”
감격에 찼던 롤랑의 낯이 창백해졌다. 말을 잘못 고른 나머지 주신을 실망시켰다.
대체 어찌 이 죄를 갚아야할지 몰라 롤랑이 당황하는 차, 오딘은 역으로 사죄했다.
“다 내 탓임을 안다. 손실은 컸으나 보답은 작았구나. 내 당장 이 죄를 어찌 갚겠느냐마는, 복구를 위한 지혜나마 빌려줄 수 있지. 내 방법 하나를 일러줄 터이니, 들어주겠느냐?”
“경건히 경청하겠나이다!”
그리고 오딘이 말했다.
“용을 죽여라.”
“용을······”
“그래, 용을 죽여. 그 피를 뒤집어써라. 용의 피는 네 육에 불멸성을 줄 것이니. 그로써 네 본래의 견고함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리라. 더 지혜를 빌려주자면, 지금 네게서 용의 체취를 느낀다. 역겨운 비늘냄새. 아마도 네 근처에 용이 있는 모양이구나. 혹은 용 비슷한 무언가라도. 놈을 노려라. 그와 동시에 경계하라. 용들은 로키처럼 음흉하고 속임수를 일삼는 족속이니.”
“귀한 충고를 가슴에 깊이 새기겠노라 맹세하는 바이며,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바치나이다!”
“나 역시 네 봉사에 감격할 뿐이다, 롤랑.”
기쁨에 벅찬 와중, 롤랑은 본래 자신의 육체가 어떠했던가 떠올렸다.
마지막 순간, 수르트가 쥔 레바테인에 꿰뚫리기 전까지 롤랑은 불사신이었다. 그 피부에 닿은 눈먼 화살은 장님처럼 땅에 처박혔고 보잘것없는 병졸들이 휘두른 창칼은 보잘것없이 부러졌다.
그 강건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오딘께도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으리라.
롤랑은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내 오딘이 작별을 고했다.
“시시각각 네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옛 영광이 돌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신왕의 권좌 또한 돌아오리라.”
*******
현실에 복귀한 순간, 롤랑은 고통에 겨워 숨을 헐떡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잠시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벌어진 일은 명백했다.
레벨 업.
그 자체는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하다. 그러나 롤랑을 놀라게 한 것은 지금 오딘과 마주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설마 기도 한 번 했다고 신과 마주할 줄이야.
지금까지 롤랑은 잠들었을 때, 혹은 트랜스 상태에 빠졌을 때나 오딘과 마주했다.
남들은 기도만 올려도 신과 만나곤 했노라 들었다. 유독 오딘만 한정적인 상황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제약일 터였다. 다른 신들과 달리 오딘은 지금 멀리 보는 옥좌 흘리드스캴프에 앉지 못하니까.
그러나 방금 오딘은 꽤 수월히도 롤랑과 통신했다. 어떻게?
어쩐지 롤랑은 알 것도 같았다. 오딘이 뭐라 했던가? 그 영광이 돌아오고 있다고?
‘오딘의 힘이 돌아온다?’
좋은 일이리라. 분명했다.
지금으로서는 저 드높은 세계수 어디에 오딘이 매달려있는지 알 방법이 없어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오딘의 힘이 돌아온다면 그 마법의 권능도 돌아오지 않을까? 그리고 돌아올 권능 중에는 자기가 어디 위치했는지 알아내는 수단도 있지 않을까?
지치고 고달픈 가운데 의욕이 샘솟았다. 롤랑은 문득 생기 넘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모지와 제이슨이 보였다.
제이슨이 물어왔다.
“뭐냐? 아파?”
“아니. 그거야, 그거. 레벨 업.”
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그러나 눈치 없게도 제이슨은 거의 소리지르다시피 말했다.
“뭐? 또?”
모지와 제이슨도 이미 한 번씩 더 레벨 업을 한 바였다. 그리하여 이제 둘의 레벨은 18. 겨우 롤랑과 같아졌다 싶더라니 롤랑의 레벨만 또 다시 올라버린 것이다.
두 동료 모두 떨떠름해했다. 일단 제이슨은 그저 성장에서 뒤처졌음에 분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모지는 그보다 더 깊은 고찰에 빠진 모습이었다. 중얼거리듯 모지가 말했다.
“확실히 우리보다 훨씬 빨라. 당장에는 레벨 차가 1에 불과해도 조금 있으면 2, 3만큼도 벌어지겠는데······ 너만 경험치 요구량이 다른가? 어째서?”
“나 혼자 떨어져서 행동했을 때 너무 많이 죽여 댄 덕분 아냐?”
롤랑이 말했지만 모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감안해도 너무 빨라. 너 레벨 업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오른 거잖아? 대체 어째서? 사람에 따라, 혹은 신앙하는 신에 따라 차이가 있나?”
그리 말하더니 모지는 이내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롤랑 또한 함께 추측해보았다.
물론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비교대상도 별로 없는 마당에 신이 얽힌 일을 어찌 연구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답도 나오지 않는 추측 따위는 집어치우고 이왕 얻은 수확에나 관심을 돌렸다.
롤랑이 자기 팔을 내밀었다.
“능력치로는 건강 좀 올랐고. 추가로 신체가 단단해졌어.”
롤랑의 말에 제이슨이 물었다.
“단단해져?”
“그런 것 같은데?”
제이슨은 롤랑이 내민 팔을 만져보았다. 이곳저곳 더듬거리더니 그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네? 씹, 성기사 가호? 축복받은 피부였나? 좋네 이거! 저번에는 신 내린 무기 따위 병신같은 거 얻더니 이제야 좀 쓸 만한 거 얻었네. 알론소랑 아말릭도 레벨 업 또 하면 이런 거 얻으려나? 저번처럼은 절대 안 되는데. 셋이서 동시에 똥 내린 무기 얻어가지고 나 욕할 뻔했거든 진짜.”
신성모독의 향연이었다. 롤랑은 즉시 눈을 부릅떴다.
“입 닥쳐. 잊지 마, 신들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사실이 그러했으므로 저것은 도덕적이 아니라 실질적인 충고였다.
그러나 제이슨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좆까. 신들이 지켜봐서 문제라면 어차피 신전에서 유저들 병신 짓한 거 다 보였을 텐데 뭘 더 걱정해? 애당초 프레이 그 새끼 나 좆나 싫어해. 저번 레벨 업에도 왜 내가 자기 대전사냐면서 인신공격 수준으로 갈궜다고. 홀딱 벗은 십새끼가 진짜.”
롤랑은 저놈을 한 대 때려야 할까 생각했다. 그래야 프레이 신이 덜 분노하지 않을까?
하지만 주변 시선이 너무 많았으므로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퀘스트도 하나 받았어.”
“퀘스트?”
“용을 죽이라고 하시던데. 나의 주, 오딘께서.”
롤랑은 자신을 본받으라는 듯 일부러 오딘을 높여 불렀다. 그러나 제이슨은 롤랑이 의도한 바와 전혀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제이슨이 벌컥 성냈다.
“이 새끼가? 혼자 황금사과 구해와라, 주신을 구해라 등등 메인 퀘스트는 혼자 다 받더니 또 혼자 퀘스트 받아?”
저것이 질투인지 아니면 장난인지 롤랑은 알지 못했다. 아마도 반반 같았지만, 어쨌건 할 말이나 계속 하기로 했다.
“더 설명하자면, 용을 죽이고 그 피를 뒤집어쓰도록 분부하셨지. 그럼 내가 반쯤 불사신이 되리라 하시더군.”
모지가 물었다.
“파프니르를 죽이고 불사의 몸이 된 지크프리트처럼?”
“아마도. 그리고 내 근처에 용이 있다고 하셨어. 경계하라고도 하시더군.”
그 말에 모지와 제이슨은 흠칫했다. 둘은 자신들을 덮친 그 흑룡을 떠올렸다.
그녀를 경계하라?
쉬이 들어 넘길 수 없는 경고였다. 애초에 그 용은 까마귀로 변신할 수 있을뿐더러 투명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 변화무쌍한 괴물이라면 그저 야간에 저택에다 불만 뿜어도 끔찍하게 위협적일 것이다.
애초에 용이 정면에서 덤벼온들 다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당시 그 용을 이긴 것은 운과 상황이 따라준 결과였으므로.
용을 이겼노라 미친 듯이 자랑해대곤 하던 제이슨마저 지금 표정이 굳었다.
“씹할, 용이 근처에 있다고? 씹할 년이 덤비지 않기로 서약해놓고선 배신을 했다간 아주 거기를 찢어버려야······”
“됐고. 아무튼 내 하고픈 말은 다 전했다. 이제 할 일이나 계속하자.”
할 일은 물론 간단했다. 전투와 그 준비.
휴식시간이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롤랑 또한 그 사실에 슬퍼 하는 차, 앤지가 다가왔다. 말끔하게 빛나는 발리사다를 공손히 내밀며.
“기사님, 칼 손질 다 끝냈어요.”
이번 탐색에는 앤지 또한 따라온 바였다.
오스론이 붙여준 것이었다. 슬슬 기초적인 종자교육을 다 받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주인을 섬길 때라면서.
롤랑은 거절하려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오스론이 아니라 앤지쪽에서 롤랑에게 따라붙길 원했기 때문이다.
롤랑은 손질된 발리사다를 받아들며 말했다.
“장하고도 고맙구나, 앤지.”
앤지는 발그레 미소지었다. 그러고는 수도사답게도 주인을 축복했다.
“신께서 돌보시는 바, 이 무기가 결코 주인을 배신하지 않길.”
롤랑은 떨떠름하게 화답했다.
“괜한 걱정이노라. 주인이 먼저 그러지 않으면 도구는 그저 사용될 뿐이니.”
둘이서 입을 맞추어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는 어구였다. 실제 기적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상답지 않게도 실제 주문적인 효과조차 없었다. 결국 그저 흔해빠진 문장이 읊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변 기사와 종자들은 모두 선망 어린 눈길로 두 주종을 바라보았다.
앤지 또한 그 시선을 느꼈다. 이내 앤지는 우월감과 뿌듯함에 가득 차 미소 지었다.
그 싱그러운 모습을 롤랑은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귀여운 어린애. 이쪽에서 일을 망쳤다가는 저 아이마저 끝장이다.
물론 지금 동행하는 기사들 또한 롤랑의 책임이었다. 정식으로 기사단을 이루어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쪽에서 멋대로 쫓아오고 롤랑이 용인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쨌건 롤랑 또한 기사들의 전력을 이용하고 있었다. 실제 저들과 함께 싸우면서 전투는 훨씬 쉬워졌고 안전해졌다.
그리하여 지난 열흘, 롤랑과 기사들은 수많은 트롤 부락을 쳐부수고 또 쳐부수었으며 레벨까지 올린 마당인 것이다.
꽤나 이상적인 관계였다. 롤랑도, 기사들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롤랑은 끔찍하게 부담스러웠다.
‘능력 따위 쥐뿔도 없는 나한테 책임질 게 자꾸 늘고 있어.’
물론 실제 쥐뿔도 없는 것처럼 굴 수는 없었다.
롤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짝짝 박수쳐 모두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는 호령했다.
“다들 이제 충분히 쉬었으리라 예상합니다. 설령 지쳤다 한들 영웅은 불평하지 않는 법. 그럼 이제, 다음 적을 찾아 나섭시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병기를 드시오!”
자리의 모든 기사와 종자들이 흥에 겨워 벌떡 일어섰다. 모두들 각기 든 무기를 치켜들며 고함질렀다.
“롤랑을 위하여!”
*******
< 절벽 - [2] 유료연재 시작입니다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