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 - [1] >
카를은 손에 든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은 터였지만 다시금 읊어나갔다.
“아마 너희 차례도 곧 올 것이다. 서른 넘게 불러놓고 우리 셋만 부려먹을 것 같지······”
친구의 조언이었다. 언젠가 전장에 불려나갈지 모르니 준비를 해두라는.
한국에서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그저 보고 넘겼을 것이다. 좀 진지하게 받아들인들 언젠가 국가의 부름을 받을 터이니 종살이 할 준비나 해두라는 의미였을 텐데.
카를은 계속 소리를 내어 읽었다.
“······그날에 대비해라.”
누군가 편지를 엿볼 것을 걱정했는지 편지 내용은 딱딱했다.
무섭다느니 불안하다느니, 나약한 말 따위는 일절 적혀있지 않았다. 만약 그런 하소연을 적었다면 롤랑답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필체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카를은 친구가 보낸 편지에서 근심을 느꼈다.
카를 또한 알 수 있었다. 불려나간 셋은 분명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싸우는 판에 맘인들 몸인들 편할 리가 없다.
저쪽이 고생하는 판에 이쪽은 어떤가?
카를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훈련하는 동료들이 보였다.
전투훈련, 이제는 일과였다. 대련은 물론 어디선가 웬 검법서를 구해서 검술연구까지 하는 수련가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 노력의 결과 유저들은 강해졌다.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제 모든 마법사 유저들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주문들의 목록과 쓰임새, 그리고 주문마다 사용가능한 횟수와 지속시간마저 정확하게 파악했다.
전사계열 유저들의 능력 또한 자세하게 파악되었다. 모두들 실험과 기록을 거듭해나갔다. 그리하여 자기네 완력, 지구력 따위 신체능력을 수치화하여 기록했다.
무엇보다 이제 모두 대련에서나마 싸움에 익숙해졌다. 이제 그 어떤 유저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격에 눈감지 않고 반격을 날릴 수 있었다.
이제 모두들 기상하자마자 모두들 신전 주변을 뜀박질하며 체력을 유지했다. 그러고는 독서 및 사제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시대의 상식을 파악하고자 했다.
지난 사건에도 착실하게 대비했다. 이제 야간마다 확실한 근무 순번에 따라 조명을 제공하는 푸른 야수 소환물과 함께 보초를 섰다.
이 모든 것은 일과표에 정해진 대로 행해졌다. 기상시간, 훈련시간, 취침시간 모두 정해진 대로였다.
이 일과가 제대로 이루어지나 감독하는 책임자로서 카를은 지독하게 불안했다.
카를은 결코 훈련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저 모든 일과는 그저 이 년의 군 생활 동안 경험한 것을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군에서는 이내 모든 것이 흐리멍덩해지기 마련이었지.’
다른 부대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카를이 복무했던 군부대는 그러했다. 초소 경비는 그저 잡담을 나누는 시간에 불과했고 기상 후 뜀박질은 참 쉽게도 꾀를 부려 몇 명씩 빠지곤 했다.
‘우리도 곧 그리 되지 않을까?’
롤랑은 편지와 함께 금화 무더기를 배송했다.
금 시세에 문외한인 카를이 보기에도 엄청난 금이었다. 가뜩이나 나쁘지 않던 식단이 요새 더욱 풍성해지고, 신전 사람들이 성서처럼 광란의 아마디스를 읽어대기 시작한 것은 결코 그 선물과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롤랑이, 친구가 실제 피땀을 흘려가며 돈까지 보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카를은 끔찍하게 부담스러웠다.
카를 또한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봤자 후방부대 장교의 느긋한 업무에 불과했다. 이것으로 할 일을 다 하고 있노라 말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뭘 더 어찌해야하는가?
*******
쫓아라, 그리고 죽여라!
난폭한 지시와 함께 기사들이 뛰쳐나갔다. 모두들 광포하게 달려 나가며 고함질렀다.
“롤랑을 위하여!”
선두에는 그들의 영웅이 거대한 뒷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붉은 화살처럼 롤랑이 달려 나갔다. 저 앞에 보이는 트롤 부락을 향해서.
습격을 감지한 부락에서도 전사들이 뛰쳐나왔다.
마주 고함지르며 트롤 전사들이 달려왔다. 그들 트롤은 컸고 험상궂었으며 실제 괴력을 지녔다. 중무장한 기사라도 쉬이 구겨버릴 수 있을 만한.
그러나 기사들 중 그 누구도 떨지 않은 채 질주했다.
가장 빨리, 앞장서서 달려 나갔으므로 맨 먼저 적과 부딪친 것은 롤랑이었다. 그 손에 들린 발리사다가 한 번 번뜩여 분노와 공포에 미친 트롤을 갈라버렸다.
분출되는 피분수를 연료 삼아 트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그 절단면은 완벽하게 평면이었다. 어찌나 깔끔히도 베어버렸는지 땅을 구르는 그 머리통은 여전히 분노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 모든 것이 그저 현실감 없는 영화 CG 같았다.
그러나 CG의 퀼리티와는 무관하게 롤랑의 심장은 박동했다. 전설적인 강적들은 아닐지라도 저들 역시 언제든 이쪽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음을 알았다.
불안을 걷어내고자 신께 기도를 올렸다.
“오딘께, 이 순간의 영광으을!”
축복 주문. 그 이마가 회색빛으로 빛나고 몸의 모든 것이 향상되었다.
롤랑은 한층 더 예리해진 감각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느꼈다. 심지어 화살촉에 묻은 녹색 액체마저 볼 수 있었다.
발리사다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튕 하는 소리.
분명 위험했을 화살은 간단히도 튕겨나갔다. 한 발 더 날아온 것은 아예 손으로 붙잡아버린 다음, 자신을 향해 창을 찔러 넣으려던 트롤의 목에 던져 넣었다.
낯빛이 검게 변색되며 죽어가는 트롤에게서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다음 적의 가슴에 발리사다를 찔러 넣고는 또 다시 놈이 죽었는지 확인조차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다음 적을 바라보았다.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트롤 전사.
“너!”
트롤은 마치 못생긴 사람처럼 생겼다. 그 죽어가는 모습들 또한.
외치는 것조차 사람 같았다.
“미친, 것들. 뒈, 져!”
자신에게 도끼를 뻗어오는 트롤의 고함을 롤랑은 쉬이도 알아들었다. 그야 언어가 다르지 않았으니까.
미칠 일이었다. 이놈의 세상에는 언어의 변화성이 대체 왜 없단 말인가?
“죽······”
뭔가 더 말하려는 그 목구멍에 발리사다를 찔러 넣었다. 수직으로 내뻗은 칼날이 혀를 관통하고 머리 뒤로 빠져나왔다.
롤랑은 그대로 발리사다를 아래로 힘주었다.
별 다른 힘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롤의 목에 세로로 된 구멍이 나버렸다.
생겨난 구멍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롤랑은 얼른 트롤을 걷어차 저 멀리 밀어버리고는 그 옆에서 협동해오려다 굳어버린 트롤마저 베어버렸다.
여섯 트롤을 더 베어넘기고서야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잡았다.
알론소가 처음 돌격할 때 외쳤던 그 외침을 다시금 내질렀다.
“롤랑을 위하여!”
이내 모두 다시 롤랑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하여 기사들 또한 적들과 부딪쳤다.
거대한 철퇴를, 칼을 휘둘렀다. 한 번 한 번의 충돌마다 피와 불꽃이 튀었고 비명이 뒤따랐다.
한 거구의 기사가 거대한 망치를 내리찍었다. 지나치게 무거워 무기로는 적합하지 않은 크기였다.
그러나 위력만은 육중해 트롤 하나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져나갔다. 그리고 기사는 망치를 옆으로 휘둘렀고 그러자니 더 힘이 들어갔지만 이번에도 거기 명중한 트롤 하나가 죽어나갔다. 거대한 일격에 살이 으스러지고 뼈가 부러진 채로.
짧은 전투는 순식간에 결착이 났다. 발리사다가 빛났고 한 트롤의 영혼이 육에서 벗어났다.
마지막 트롤이었다. 놈은 잠시간의 경련과 함께 죽어버렸다. 그러나 그마저 영면이 될 수 없었다.
롤랑은 승자의 권리를 들어 선언했다.
“네 영육은 오딘의 것이다!”
트롤은 비명소리조차 없이 죽었지만, 대신 그 영이 비명질렀다.
홀로 절반 이상을 해치운 와중에도 롤랑은 아군을 신경 썼다. 뒤를 돌아보니 기사들은 부들거리는 트롤들의 목에 칼을 꽂아 넣으며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다.
이기긴 이겼다마는. 몇 명이나 다쳤고, 몇 명이나 죽었나?
롤랑이 얼핏 보기에는 별 피해가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초월적이지는 않더라도 꽤 강력한 괴물인 트롤 부대와의 전투였다. 그러나 기사들은 거의 멀쩡했다.
중상자 한 명, 그리고 경상자 몇 명. 그리고 두 명 죽었다.
전투의 종착을 발키리도 확인했다. 이내 세계수의 천장에서 날아다니던 그녀가 내려왔다.
숨을 헐떡이던 와중에도 기사들은 경건히 물러나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내 발키리가 눈 감더니 기도를 올렸다. 그녀와 함께 롤랑과 아말릭 또한 그리했다.
치료, 혹은 소생의 기도들.
시체의 상처에 빛이 감쌌다. 입에서 내장조각이 빠져나온 기사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이내 기사의 가슴이 박동하더니 그 상반신이 발작하듯 일으켜졌다.
커흑, 하고 기사는 소생했다.
롤랑은 그 모습을 담담한 눈으로, 그러나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게임 메디아의 설정에 따르면 소생이 가능한 조건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신체훼손이 심각하지 않을 것, 그리고 신성 4 이상이었지.’
그러니 저 기사가 소생한 것은 운이 좋았다. 전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갑옷 덕에 그 시체가 제법 온전했다.
그리고 신성 4, 이것이 가장 힘든 조건이지만 죽었던 기사는 그마저 달성한 터였다.
레벨 업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신과의 대면을 통해서.
세계수 오십이 층에서의 거대한 전투가 끝난 날, 괴물 코끼리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은 각기 신앙하는 신과 마주했다.
그리고 신들의 선물을 받았다.
선물로 말미암아 기사들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졌다. 모두들 괴물들과 수월히 싸워나갈 수 있을 만한 근력이며 내구성, 정신성을 얻었다.
소수의 인원은 신성을 얻어 영혼마저 성장했다. 룬을 선물 받은 몇몇이 오래 전에 사라진 고대의 주문에 각성한 것은 이제 놀라운 일조차 아니었다.
이번 전투의 승리 또한 모두의 영육을 강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롤랑은 전리품, 그러니까 트롤들의 시체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전투는 끝났어도 아직 저들이 지키고자 했던 부락은 남았다. 어째야하나?
다행히도 약탈을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전투를 지켜보았던 일단의 무리가 롤랑 앞에 나섰다. 빈곤하게 차려입고 실제로도 빈곤한 자들. 시체청소부들이었다.
청소부 대표로서 한 남자가 롤랑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경건히 부탁했다.
“승전에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와 경탄을 보냅니다. 이제 고귀한 전사들께서는 몸을 추스르고 다음 전투에 대비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귀찮고도 보잘것없을 전투의 뒤처리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사 합니다. 그것이 이 미천한 저희들의 일이니까요.”
그리 말하며 청소부 대표가 가리킨 것은 주변에 널브러진 트롤 전사들의 시체뿐만이 아니었다.
그 손가락은 부락을 향해있었다.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롤랑은 알고 있었다.
괴물의 죽음.
이제 청소부들은 단순히 시체를 청소할 뿐만 아니라 청소할 시체를 직접 만들고도 싶어 했다. 괴물 살해가 신들과의 대면으로 이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터였다. 그리고 그 대면의 결과 그 영육을 살찌울 수 있다는 소문도.
그렇다고 괴물 전사들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들로서는 그보다 못한 괴물들이라도 죽이고 싶은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저 부락에 어린 트롤, 늙은 트롤들 따위가 남아있을 터였다.
이내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부는 깊이 고개 숙여 절했다.
“고귀한 양보에 감사드립니다, 경.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청소부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몇몇은 남아서 이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수레에 실어 날랐다. 그보다 의욕적인 나머지는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무기를 꽉 움켜쥔 채 이내 저기 보이는 트롤 부락을 향해 걸어 나갔다.
롤랑은 그들의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저리도 열심히 일함에도 불구하고 청소부들은 끝내 이 발리사다의 주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날 이후 월렴은 완벽히도 실종되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청소부들이 시체 찾는 일을 게을리 한 탓은 아닐 터였다. 롤랑은 얼마 전 청소부들이 똥물에 불어터진 시체를 둘이나 짊어지고 온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바였다.
그 두 시체가 어찌나 끔찍하게 변색되고 변형되었는지. 롤랑으로서는 그 신원을 확인하기는커녕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도 없었더랬다······.
모두 멈춰 서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롤랑은 이내 자신의 신께 기도드렸다.
그 젊은 기사가 살아있기를. 만일 죽었다면 편히 쉬고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와 함께 이번 전투의 승리에도 감사드리며 그 영광을 바쳤다.
기도하던 롤랑의 눈이 절로 감겼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의 신과 대면했다.
*******
< 절벽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