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57화 (57/164)

< 허공 - [5] >

세계수 원정의 고비를 넘긴 지 며칠이 지났다. 그 기념으로 열린 승전식은 사흘 내내 계속되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수많은 병사들, 기사들, 모험가들 그리고 순례자들이 모였다.

제단 위에서 주교는 축사를 읊어나갔다.

“신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전사다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피와 금속이 끓어오르는, 강자의 죽음을······.”

승전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감사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비프로스트 주교는 난처해졌다.

전투에서 이겼으니 전쟁신에게 감사를 바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전쟁신에게?

현재의 전쟁신은 티르이지만 이번 승전의 주역에는 자칭 롤랑이 속했다. 그리고 롤랑은 옛 전쟁신 오딘의 대전사로 유명하지 않은가.

결국 주교는 기도문에서 전쟁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발두르의 이름만 언급한 다음 아스가르드 전체에 감사와 제물을 바쳤다.

뒤이어 제단 위에 전투의 주역들이 올라왔다. 염동장군 보어조아를 비롯한 지휘관들, 그리고 영웅 롤랑.

롤랑이 모습을 내비치자 어마어마한 환성이 광장을 뒤덮었다.

“롤랑! 롤랑, 롤랑, 롤랑!”

한편 축제의 또 다른 주역이어야 할 비프로스트 백작은 집무실에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곧 오기로 한 손님을 기다려야 했다.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

꽤 시간이 흘러서야 문이 열렸다. 그리고 예의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소, 백작.”

비카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귀하신 행차에 감격을 표합니다, 아이스피시 공.”

아이스피시는 마주 예를 표했으나 건성이었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이스피시 사령관이 말했다.

“저 영웅을 사칭하는 사기꾼 탓에 불편하시겠지.”

노골적인 질문에 비카파는 말을 흐렸다.

“기껍지는 않지요······.”

비카파는 그 화제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아이스피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기꾼, 듣자하니 오스론 추기경이 데려왔다고? 그자가 백작에게 원한이 있다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외다. 당연히도 뭔가 수작질 하려는 거 아니겠소? 뭔 꿍꿍이일까? 저 성벽 밖 구덩이에서 날을 지새우는 군중을 선동해 비프로스트를 공성(攻城)? 아니면 비프로스트 변경백이었음을 내세워 현 영주를 내쫓기? 어느 쪽이든 오스론은 당한 것을 되갚으려 들 거요. 저 가증스러운 사기꾼을 앞세워서 말이오!”

비카파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로 그자가 사기꾼이라 생각합니까?”

“당연하지. 왜 아니겠소?”

“듣자하니 이번 전투에서도 믿지 못할 활약을 했다고······.”

“코끼리들 죄다 죽인 거? 놈들과 싸울 때 놈이 벌인 짓 자체가 놈이 가짜라는 증거요. 고대 기사란 놈이 대포가 뭔 줄 알고 그걸 이용한 전술을 벌였단 말인가?”

비카파로서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대체 댁이 오죽 못났으면 고대 기사보다 현대병기 운용을 못해 그 전술마저 탓하느냐고.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자가 공중 높이 도약하여 피의 창을 던졌다고도 하던데. 마치 궁니르 같은 창이었다고······.”

“궁니르? 무지몽매한 병사들과 전설에 굶주린 기사들이 지껄이는 개소리요, 백작.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믿소. 그리고 그딴 병신 같은 것은 보지 못했소. 내겐 한눈팔 여유가 없었지. 당시 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중이었으니까.”

“의무라 하심은?”

“지휘관으로의 의무 말이오. 내 지휘에 따른바 아군이 막 트롤 군대를 물리친 참이었소! 보어조아 같은 머저리가 자기 지휘의무는 내팽개치고 생각 없이 칼질이나 할 때 난 책임을 다했단 말이오!”

“그럼 공작께선 보지 못해서 믿지 않는단 겁니까?”

“그렇지. 사실 보지 못했든 듣지 못했든 간에 놈들 헛소리를 어찌 믿겠소? 내 휘하 군종 사제들과 전담 사제 또한 입을 모아 말하기를, 발할라에서 영웅들을 데려오는 건 불가능하다 했소. 그건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신학상식이라고도 했지. 반면 저 머저리들이 지껄이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생각해보시오. 천장까지 닿을 만치 뛰어올라 적들의 한 가운데에 투창? 사람 각력으로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할 생각인가?”

비카파는 반론은 않고 그저 속으로 앓았다. 그놈의 롤랑이 거인과 싸웠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때 그 기사는 거인을 상대로 밀리기는커녕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런 초인에게 좀 높이 뛰는 것쯤 불가능했을 것 같지는······.

어쨌건 비카파는 침묵했다. 아이스피시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 멍청이들은 속았단 말이지. 그 탓에 나는 수모를 당했소, 백작. 일생에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어. 그놈의 사기꾼이 날 모욕했단 말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이제 백작과 나는 공통의 적을 둔 셈이오.”

“공통의 적이요?”

아이스피시는 엄숙히도 선언했다.

“이 시간부로 우리는 동맹이오, 백작.”

뜻밖의 말에 비카파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스피시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일의 상황에 내가 힘을 빌려주겠소. 이제 일만이 넘는 정병이 당신의 편이오.”

“정말이지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부담스러워 할 것 없소, 백작.”

그리 말하더니 아이스피시는 방을 나섰다. 뭔가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낸 표정으로.

방금 나눈 대화를 비카파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동맹? 대오공국의 공작과?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언젠가 찾아올 권좌의 위협에 일만 대군이 도와준다면?’

좀 더 생각해본 뒤 비카파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무조건적으로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구두계약으로 동맹을 맺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방금 대화 나눈 그놈은 아이스피시인 것이다.

망쳐먹는 아이스피시. 대오공국의 다섯 공작 중 하나로서 놈은 지고의 권력자였다. 미드가르드의 모든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열강의 군주.

그 권세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 벌인 멍청한 짓거리들 탓에 놈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곳 비프로스트에 원정을 와야했다.

얼핏 듣기로 당시의 일은 이러했다. 아이스피시는 웬 총독 하나가 자신을 모욕했노라 느꼈다. 이내 보복하고자 군대를 일으킨 순간, 대오공국의 영주들이 자신에게 맞서고자 끔찍하게 거대한 연합을 맺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아이스피시는 그대로 비프로스트에 원정을 와버렸다는 것이다. 애초에 군대를 꾸린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던 양 위장하고자.

실제 그랬는지, 아니면 헛소문인지 비카파는 알지 못했다. 어쨌건 놈이 썩 믿을 만한 동맹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애당초 두 군주의 목적은 흡사해보여도 실제로는 다른 것이다. 비카파는 롤랑이 무얼 하건 지금 이 권좌만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그 공작은 롤랑에게 원한을 가지고 적극적인 해코지를 하고픈 모양새였다.

‘괜히 이쪽에서 놈의 멍청한 보복에 가담하다가 빌미만 줄지도 모르지······.’

그리하여 비카파는 결론 내렸다. 방금 그 동맹은 만약의 상황에 도움될지는 몰라도 그저 없는 셈 치는 것이 낫겠노라고.

진실한 동맹자들은 따로 있었다.

비카파는 집무실을 나와 영주성의 귀빈실에 발을 들였다. 새로 생긴 동맹자에게 내준 공간이었다.

며칠 전, 비카파의 용병이 다쳐 쓰러진 까마귀를 데려왔다. 비카파가 평소 까마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수에 방치된 시체들은 곧 괴물들의 살이 될 것인즉, 괴물들이 먹을 시체를 대신 치워주는 하피와 까마귀 등은 비카파가 보기에 매우 이로운 짐승들이었다.

과연 비카파는 까마귀를 치료하도록 지시했다. 심지어 사제와 의사까지 붙여서는 그 까마귀를 돌보게 했다. 그 보살핌 덕에 까마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치되었다.

그리하여 비카파는 새로운 동맹자를 얻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웬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맨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은 채 여인은 이쪽에 시선을 향하고 빙긋 웃었다.

“아, 비카파? 어서 와.”

비카파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몸은 좀 어떻소, 모르가나?”

“괜찮아. 덕분에. 그래서 왜 왔어?”

“전에 했던 이야기, 마저 듣고 싶어서 말이오. 롤랑과 그 무리······ 아마도 진짜가 아닐 거라는 말······.”

모르가나는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말했잖아? 발할라에서 영웅들이 강림할 일 따위는 없다니까. 기본적인 신학상식이잖아. 주교가 몇 번이고 말해줬다는데?”

“하지만······”

“그 멍청한 프레이가 왜 레바테인을 잃었는지 생각해봐. 중매비용치고는 지나치게 귀중한 것이었지만 결국 내줘야 했지. 자신의 부관이 미드가르드에 다녀오는 대가로 말이야. 그만큼 천상에서 지상을 오가는 것은 힘든 일이야.

설령 프레이 신이라 할지라도 미드가르드 심부름을 공짜로 시켜먹을 수 없어. 하물며 롤랑은 발할라 전사들의 수좌 중 하나인데 뭔 수로 보내? 그러려면 대가로 자기 한쪽 팔이라도 뜯어줬어야 할걸. 그런데 강림한 건 여러 명이라지? 그럼 제 몸뚱이 다 내줘도 모자랐겠지.”

결국 모르가나의 주장 역시 주교의 논리와 같았다. 황금 좀 내줬다고 발할라의 영웅들을 부려먹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비카파는 힘없이 말했다.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증명하고 있잖소. 스스로가 영웅임을 말이오. 괴물들을 죄다 쓰러뜨리고, 쓰러뜨리고, 쓰러뜨려 업적을······ 심지어 당신은 용의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롤랑의 동료에게 패했다면서?”

“뭐 예상 밖의 일이긴 했지. 마우그리스를 닮았다 싶더니 실제 놈의 주문을 쓰고 놈의 사안까지 가지고 있더군? 하지만 마우그리스와 같은 짓을 한다고 동일인물이란 건 아니야. 실제로 놈들은 실제 영웅들과 행동거지가 달라.

그 마우그리스 놈은 날 알아보지도 못했지. 비록 용의 모습이긴 했지만 목소리는 엇비슷했을 텐데 눈치도 못 채더라고? 게다가 아이스피시? 내가 듣기로 그 얼간이가 한껏 면박줄 때 롤랑은 그저 감내하기만 했다던데······ 실제 롤랑이라면 절대 안 그랬지. 모욕을 느꼈다 싶으면 바로 장갑을 던지거나 장갑이 없으면 주먹질이라도 해서 결투의사를 밝힐 놈이거든.”

“그럼 대체 뭐요? 영웅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영웅은 아니다?”

“뭐 여러 가능성이 있지. 사제들이 불러내는 소환물들처럼 영혼의 일부를 담은 분신체일 수도 있고······ 신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복사체일 수도······. 어느 쪽이건 욕먹을 일이지만 프레이라면 능히 그럴 만하지. 세계멸망을 막는 데 써먹어야 할 룬검을 장가 좀 가려다 종말의 거인에게 뺏긴 머저리잖아. 뭔 짓을 더 못하겠어?”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야 눈앞에 있는 마녀는 모르가나였으니까.

수많은 무훈 시에 등장하는 고대 마녀. 수백 년을 살아온 변신술사.

얼핏 듣기로 이 마녀의 변신술은 실로 대단하여 남자를 여자로 바꿀 수도, 그 반대도 가능할 정도라고 했다. 심지어 자기 몸을 까마귀에서 용으로 바꿀 수준 아니던가.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비카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에 관해서는 저 마녀야말로 전문인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비카파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자를 롤랑이라 믿는다면, 그리고 실제 그 능력이 롤랑에 준한다면 내게는 대체 뭔 차이겠소? 언젠가 적으로 마주할지 모르는데?”

“적대하지 않으면 되잖아? 나도 그럴 거야. 이미 된통 당한 마당에 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는걸. 그러니 내버려 둬. 놈들의 정체가 파편이건 그림자건, 영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름의 긍지가 있겠지. 네가 잠자코 있으면 부당하게 해코지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 애꿎은 롤랑보단······ 오스론을 조심해.”

추기경의 이름이 불린 순간 비카파는 눈을 크게 떴다. 그자도 물론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왜 저 마녀의 입에서 나오나?

“그자에 대해 뭘 알고 있소?”

“비밀이야. 맹세를 했거든. 그러니 말해줄 수 없지만······ 어쨌건 괴물 때려잡느라 바쁜 롤랑이 중요한 게 아냐. 오스론을 조심해. 알겠지?”

결국 자기 집무실에 돌아온 뒤 비카파는 생각했다.

‘롤랑은 내게 위험하지 않다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주교와 모르가나, 두 동맹자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비카파는 이미 롤랑에게 일을 저지른 뒤였다. 정확히 말해서는 그 동료들에게 일을 저질렀다.

얼마 전, 오스 왕이 황금을 들여 의식을 치르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뭔 의식인지는 몰라도 황금을 제물로 바친다니 비카파로서는 도저히 들어 넘길 수 없었다.

자신에게 갚아야 할 금을 헛짓하는 데 쓴다니? 채권자로서 비카파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비카파는 신전에 일단의 병력을 보냈다.

의식을 직접 방해하기에는 신들이 두려웠으므로 용병행세 하는 강도들을 부려먹었다. 그 들개들을 시켜 신전의 사제들을 해치우고 거기 운반된 황금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이후에 듣기로, 당시 습격에 나선 자들은 전멸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롤랑이 등장해버렸다.

그래서 비카파는 불안했다. 그 롤랑이 습격의 흉수를 짐작할까봐. 그리고 원한을 가지고 있을까봐.

그 들개들은 야간에 습격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잠들어있던 그 동료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그리하여 롤랑이 보복할 의무를 느끼고 있다면 큰일이다.

가뜩이나 이 악명 높은 은행가의 권좌는 위태로웠다. 주변에 이미 위험요소가 산재한 마당이었다.

재정위기, 도시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난 폭도들, 괴물들, 거인들, 오스 왕, 오스론······.

그 목록에 원한을 가진 고대 영웅이 더해지지 않기를. 비카파는 정말이지 간절히 바랐다.

*******

< 허공 - [5]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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