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 - [4] >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지는 그저 불안하게 멈춰 섰다.
작은 망치모양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기도문을 읊는 사람들. 컬트 종교 같아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들 순례자들은 심지어 일행을 빙 둘러싸기까지 했다.
방금 악마와의 대화 탓에 심히 혼란스러운 가운데 모지는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달아나기라도 해야 하나?
다행히도 모지가 마법사로서 현자다운 타개책을 떠올려야 할 필요는 없었다. 제이슨이 앞으로 나섰다.
“뭔가, 당신들은?”
한 순례자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용이 쓰러졌습니다. 당장 시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랬습니다. 정말 당신들이 이룬 일입니까? 발키리와 함께요?”
그 질문이 제이슨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엄청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우리가 용을 쓰러뜨렸다! 이제 기념 비석이라도 세워주나?”
“발키리는······”
“내 동지 중 하나다!”
제이슨이 그리 선언한 순간, 모여든 순례자들의 기도문은 더욱 커졌다.
순례자 중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기도문이 울려 퍼지는 와중이라 그 질문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제이슨은 용케도 포착해냈다.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 자들에게 정체를 묻는 행인 A의 질문이라니. 소설에서 많이 접했던 이 상황을 제이슨은 절대로 흘려넘길 수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뽐내야 할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제이슨은 배에서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바로 메디아 백작 제이슨과 그 동지들임을 알라!”
자기 이름을 빼놓았다는 사실에 모지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을 홀로 상대해준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을 뿐.
그렇다고 제이슨에게 감사한 것은 아니었지마는.
모지는 자신들의 목적이 용 살해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롤랑 도와주러 가는 게 목적이었는데. 뜬금없이 용 때려잡았다고 다 끝난 셈 치기에는······.’
공포와 긴장감에 시달려 정신적으로는 이미 지쳤다. 그래도 탈진할 정도는 아니었다.
용의 위험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저 세계수 위에 혼자 남겨진 동료를 지원하러 가야하지 않나?
그러나 이 상황에 입을 열기가 모지로서는 끔찍하게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침묵하고 있자니 제이슨은 계속해서 연극적인 대사들을 읊어나갔다.
“우리는 끝내 용의 목숨을 끊지는 않았으나 그 자비가 맘이 약해진 탓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 할 터! 우리는 자비를 베풀어 용과 거래한바 이제 그 용은 우리를 해치지 않으리라 궁니르에 맹세했음을 널리 퍼뜨려 뭇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할 것인즉······”
어쩐지 들어본 어조였다. 어디서 들었던가?
모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탈한 동료로부터였다.
‘저놈 지금 롤랑 흉내 내나 보네.’
롤랑의 연기와 비슷한 울림에 비슷하게 서사적인 대사였다. 롤랑과 달리 어휘가 부족하고 문장이 쓸데없이 긴 나머지 강렬함은 덜했지마는.
이 순간 모지는 깨달았다. 그동안 제이슨은 롤랑을 굉장히 부러워해왔노라고.
“당신의 이름이 제이슨이라고 하셨······”
한 순례자의 질문에 제이슨은 힘차게도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제이슨이다. 발할라에서 내려온 메디아 백작이자 프레이 신의 대전사이다.”
거의 롤랑을 베낀 대사였다. 그 사실을 확신에 차 느끼며 모지는 생각했다.
‘평소에 자기도 저런 대사들을 읊고 싶었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군중 앞에서 영웅적인 대사를 읊기. 말주변 부족한 모지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을 뿐더러 저것을 왜 동경하는지 이해도 할 수 없었다. 롤랑 본인도 사람들 앞에서 말 꾸미기를 피곤해 하지 않았던가?
롤랑이 일전 모지에게만 털어놓기를 사실 현지인 동료고 뭐고 다 필요없더랬다. 롤랑은 삼인조끼리만 다니고 싶었노라 고백했다. 그러면 남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지금 보니 제이슨은 정확히 그 반대 심정인 듯했다.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주목과 칭송을 받고 싶어 안달 났던 모양이다.
어쩌면 알론소를 동료로 삼은 것도 자기를 열렬히 칭송해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모지는 추측했다.
문득 모지는 다른 두 동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흠칫했다.
알론소와 아말릭은 심장마비로 죽은 두 나병환자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둘은 특히 용에게 뜯어 먹혀 머리가 아작 난 시체를 가리고자 애썼다.
모지는 아말릭을 바라보았다. 안면가리개에 가려진 그 표정을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불안해진 모지가 다가가서 말했다.
“저 자식 주책을 용서하십시오. 원체 정신머리가 없는 놈입니다.”
모지로서는 지금 아말릭이 분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 아닌가. 동료 둘이 죽은 마당에 저 지랄이라니.
그러나 아말릭은 평탄한 어조로 물었다.
“용서요? 무얼 말씀하시는 거지요?”
“지금 저놈 저리 신나서 저러는 거 말입니다. 보기 매우 안 좋다는 걸 나도 알고 있습니다.”
아말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보기 좋습니다. 절로 기쁘기까지 하군요.”
“어째서?”
용에게서 살아남은 마당이라 동료들의 죽음쯤은 넘길 수 있는 것인가? 모지는 그리 추측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말릭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르께서 절 지켜보고 계셨다더군요.”
저 말에 내포된 의미를 모지도 알아챘다.
나병을 종교적으로 터부시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여기서도 그렇다. 그런데 위기의 상황에 처한 문둥이가 신과 만난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유명하고 칭송받는 천둥신과.
“그래서 지금 감격스러우십니까?”
모지의 물음에 아말릭은 열렬히도 긍정했다.
“감격뿐이겠습니까? 생사관이며 인생관 모두 뒤엎어질 지경입니다! 신들께선 절 버리지 않았어요! 롤랑 경을 본디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롤랑 경이 그토록 칭송받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친 결과일 테니, 실제 역사에서는 무훈시만 못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만나 뵌 그 분은 묘사된 것보다 훨씬 고결한 분이었습니다! 그 동료 모지 경 또한 그랬습니다. 카를 대제의 열두 성기사 중 하나, 은둔자 마우그리스······. 역사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고 서사에서는 그저 신앙심 깊은 고대 마법사로 등장할 뿐이라 책에서 읽을 때는 아무 감흥조차 없었는데······”
“지금도 그저 마법사 하나일 뿐이지.”
“아니요. 아닙니다. 귀공보다 고결한 분을 전 상상할 수 없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모지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으나 아말릭은 계속해서 흐느끼듯 말했다.
“두 문둥이 동료의 시체를 보았을 때, 제가 느낀 건 슬픔이 아니라 감동이었습니다. 문둥이는 그냥 보기도 흉측합니다. 창공에서 떨어져 으깨진 문둥이라면 특히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둘은 으깨져죽지 않았어요.”
“그거야······”
“귀공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보냅니다, 고결한 마우그리스. 궁니르에 맹세컨대 결코 귀공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내 영혼은 이제 천둥신의 것이지만 심장은 귀공의 것입니다.”
교사까지 붙여가며 미친 듯이 공부했던 롤랑이라면 저 마지막 어구가 일종의 충성맹세라는 것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심하면 독서가라는 편견과 달리 책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모지는 여기 와서도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
그래서 모지는 저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희열만은 생생히도 느꼈다.
이런 것이 바로 영웅이 받는 칭송이리라.
지금 이 순간 모지는 조금이나마 제이슨의 심정을 이해했다. 영웅으로 칭찬받고픈 그 유치한 심정을.
그리하여 모지는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모지가 나아감에 따라 순례자들의 시선 일부가 모지를 향했다. 그 압박감을 이겨내고 모지는 제이슨에게 말했다.
“지금 이럴 때 아니야.”
제이슨이 물어왔다.
“뭐?”
“롤랑 도우러 가야할 거 아냐?”
의외로 제이슨은 이 찬사 받는 상황에 방해받은 데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더니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지. 위기에 처한 동료를 도우러 가야지.”
용과 싸운 마당에 이제는 군대와 싸워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제이슨의 낯에서는 일말의 주저함도 읽을 수 없었다.
자신감. 거의 전능감에 가까운 감정이 그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이슨은 순례자들을 향해 선언했다.
“우리는 지체할 틈이 없다. 또 다시 출전해야 한다! 그러니 이제 모두 비켜라!”
그 말에 따라 순례자들이 길을 터준바, 일행은 두 시체의 운구를 저들에게 맡긴 뒤 다시금 세계수에 올랐다.
결국에는 수고스러울 뿐인 발걸음이었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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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품을 주인께 바친 뒤, 롤랑은 기력을 다했다. 너무 팔팔하게 움직였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어도 이미 한계를 넘기고 넘긴 몸이었다.
이내 롤랑의 탈진한 몸은 트롤의 머리를 쥔 채로 쓰러졌다.
다가오던 기사들이 비명 질렀다.
“롤랑 경!”
다행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기사들은 마치 부모가 죽을 뻔한 듯 슬피 울며, 롤랑의 몸을 환자용 들것에다 옮겨 실었다.
기사들은 그 허름한 들것을 마치 왕이 탄 가마라도 되는 양 넷이서 정중하게 옮겨왔다. 이내 그들이 사령부 막사에 들어섰다.
승리에 기뻐하고 있던 사령관은 그 낯에서 미소를 거두고 쏘아붙였다.
“기사씩이나 되어 천한 인부와 같은 역할을 도맡다니. 스스로를 낮추기라도 할 셈인가? 헛짓거리 말고 신분에 맞게 행동하라!”
사령관은 대오공국의 공작이자 이 먼 오지까지 일만이 넘는 군대를 거느려온 막강한 군주였다. 설령 황제라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기사들이 사령관에게 보낸 시선은 그런 지고한 지배자에게 향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멸시와 경멸을 보내며 기사들이 고함질렀다.
“닥쳐라, 망쳐먹는 아이스피시! 그 이상 입 놀리면 결투를 신청하겠다!”
아이스피시 사령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망쳐먹는 아이스피시라니?
대오공국에서 몇몇 영주들이 자신을 그리 험담한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멸칭을 면전에서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스피시 사령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경악에 가득 차 그 목소리가 떨렸다.
“이 미친 것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기사가 외쳤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머저리 하나다! 이해할 수 없는 시기와 질투로 찬 머저리, 네놈은 오늘로 말미암아 영원해질 뻔했다. 삼만 병력을 말아먹은 패장으로 사서에 길이 남았을 테니까! 그리 비참하게 죽어버린 네 영혼은 헬에서조차 업신여겨졌을 것이건마는. 그 영원했을 치욕에서 구원해주신 은인께 어찌 그따위 언동을 취할 수 있느냐?”
사령관은 들것 위 롤랑을 부들거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 사령관은 다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은인이라고? 저 사칭꾼이?”
“다시 말하지만, 그따위 언동을 계속하면 결투다!”
이번에는 또 어느 미친놈이 저따위 건방진 소리를 했나? 기억해두고서 나중에 보복하고자 사령관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흠칫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염동장군 보어조아였다. 대오공국의 해군사령관. 공작의 주요 동맹자인 저놈마저 저따위 태도라니.
아이스피시는 이 하극상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저 끔찍한 무례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사실 또한.
당장에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결국 아이스피시는 발언을 철회해야 했고, 마음에 없는 사과까지 꺼내야 했다.
세계수에서 내려와 개선하는 내내 그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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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