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 - [2] >
용이 날아오고 있었다. 놈과의 거리를 모지는 불안하게 살폈다.
저 용을 쓰러뜨려야 한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지만, 아마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였다. 적어도 모지는 그리 믿었다.
모지가 판단하건대 저 용은 무적이 아니었다.
용의 비행속도는 덩치치고 빨랐으나 어쨌건 일행을 추월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두꺼운 비늘이 번개마저 튕겨내고 있었지만 날개에는 맞지 않도록 용 스스로가 조심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약점이 있기는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날개를 노려 화염구라도 쏘아댈까?
모지가 보기에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당장 순간이동을 쓰기에도 벅찬 마당이었다. 공격까지 하려다가는 금세 머릿속 연료가 고갈될 터였다.
모지는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주문을 아끼고 아끼다가 결정적인 순간······.’
이제는 머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생각하기도 고역스러웠다. 그 고통을 이겨내며 모지는 두 번 더 순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일행은 마지막 나병환자의 곁에 도달했다.
병자는 공중에서 둥실둥실 하강하고 있었다. 그 옆에 도달한 순간 모지는 생각했다.
한 나병환자는 불타죽은 동료를 매장하랍시고 지상에 남겨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만약 그마저 챙겨야 했다면······.
문득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또 죽었네.”
제이슨이 보기에도 분명했다. 안면가리개 사이로 보이는 눈이 허옇게 뜬 채 감기지 않고 있었다. 몸은 하강하느라 흔들릴 뿐, 움직임이 없었다.
끔찍한 일이지만 모지는 그 사실에 순수하게 슬퍼할 수 없었다.
‘죽었어? 순간이동 할 때 데리고 갈 필요가 없어 다행이군.’
잔혹한 생각이지만 모지가 느끼기에 당장에는 정말 그랬다. 순간이동의 부담이 덜해지는 것만으로도 도주의 희망이 싹튼다.
이제야말로 지면과 가까워졌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도할 때는 결코 아니었다. 모지 또한 그 사실을 이해했다.
‘이제 막무가내로 순간이동 해서는 안 돼.’
모지는 추론했다.
지금 용이 자기 날개를 보호하는 것은 지금 이 높이에서 추락했다가는 끝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추락해도 죽지는 않을 높이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 떨어져 죽을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 용은 본격적인 사냥에 나서리라.
지금껏 발키리의 번개에 신경 쓰며 차근차근 쫓아오던 것과 다른,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위한 맹목적인 추격을 해올 것이다.
그 매서운 추격을 어찌어찌 피해 지상에 발을 디뎌도 위기는 끝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때야말로 가장 위험하리라.
공중에서 용의 불꽃은 그저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면에서라면 그 불길은 옆으로 퍼질 것이며 피하기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저 용을 해치우려면 바로 지금이어야 해.’
또 다시 모지가 순간이동 했다. 이미 죽은 나병환자는 공중에 내버려둔 채로.
이내 용이 병자에게 날아갔다. 그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까 다른 병자의 두개골은 마치 땅콩처럼 깨졌더랬다.
모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또 다시 순간이동 했다.
그 순간 용이 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막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던 나병환자의 머리는 내팽개쳤다.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용은 그대로 두 날개를 수평으로 펼쳤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아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내리꽂히는 것 같은 속도였다. 용이 지나치게 빨랐기에 그 순간 쏘아진 발키리의 번개는 용의 이동궤적을 예상하고 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이 지나간 자리를 허무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용이 작살처럼 쫓아왔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제이슨은 그저 비명 질렀다.
“씹할!”
어쨌건 예상대로였다. 모지는 용을 똑바로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자, 온다.
모지는 한 차례 더 순간이동 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 룬이 꺼진 것을 느꼈다. 이제 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용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이제 용과 일행의 거리는 충분히 가까워졌다.
알론소마저 겁에 질려 비명 지르는 가운데 용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 목구멍 너머가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그때였다.
모지가 피 흘리는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껏 쓸 수도 있었던, 그러나 숨기고자 애써 쓰지 않았던 사안이 빛났다. 마비의 저주. 그 시선과 마주친 용이 공중에서 일순 굳었다.
날개를 움직이지 못한 나머지 용이 낙하했다.
한편 제이슨은 필사적으로 소환을 위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모지는 용이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그 시선을 마주쳤다. 최대한 오래 용을 멈추기 위해서.
이미 알다시피 사안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정신력이 높으면, 그러니까 마법 저항력이 충분하다면 저주를 금세 타파할 수도 있다.
과연 용은 일행보다 아래로 떨어져 내린 즉시 마비에서 풀려났다.
분노에 찬 용이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글거리는 주둥이가 일행을 향했다.
이내 불길이 분출되려던 찰나, 귀를 찢는 야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푸른 야수가 떨어져 내렸다. 위를 향해 한껏 벌린 용의 주둥이 아래로.
이내 푸른 야수의 몸뚱이가 그 턱 사이에 맞물린 순간, 용의 불꽃이 분출되었다. 그러나 그 주둥이가 막혀있었기에 불꽃은 용의 턱과 야수의 틈새 사이로 퍼져 나왔다.
허공에 기괴한 불꽃의 선이 여러 줄기 퍼졌다.
‘좋아, 일차 시도는 성공이다.’
속으로 땀을 흘려대며 제이슨은 다음 소환을 준비했다······.
갑자기 푸른 야수의 무게가 더해진 충격은 컸다. 이 순간 모르가나는 중력을 느꼈다. 지금 용은 아래로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낙하하고 있었다.
당황한 용은 이내 주둥이를 아래로 향했다. 놈을 떨어뜨리고자.
푸른 야수는 버둥거리며 사지를 벌려 그 턱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다. 이내 용은 주둥이에 힘을 주었다.
용의 턱이 조여왔다. 푸른 야수는 열심히도 발버둥 쳤지만 결국 그 악력(顎力)을 버텨내지 못했다.
이내 야수는 용의 입 안에서 푸른 불꽃이 되어 소멸했다.
그제야 겨우 날 수 있게 된 용은 다시 궤도를 바꾸어 수평으로 비행했다.
용은 타원의 궤도를 그리며 사냥감에게로 접근했다. 그 와중 용은 또 다른 주문의 기척을 느꼈다.
기척은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또 다시 뭔가 소환되려는 것이다.
그리 판단한 즉시 모르가나는 휙 하고 비행궤도를 바꾸었다. 그 순간 제이슨이 주문을 완성했다.
결국 소환된 흑기사는 용이 방금까지 있던 지점, 그러니까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게 되었다.
‘똑같은 짓을 해서 소환물을 날려먹다니. 소환이 그리 쉽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이 추태를 모르가나는 마녀로서 비웃었다.
“큰일이네?”
그리고 대답한 것은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러게.”
그리고 날개를 가진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용의 옆을 가로질렀다. 모르가나는 기겁했다.
날개 달린 사람이라니, 발키리? 아니, 그녀는 저쪽에 보였다.
그렇다면 저 비행체는 뭔가?
급히 모르가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 비행체가 포착되었다. 과연 놈은 발키리가 아니었다. 그 날개는 맹금류의 것이 아니라 박쥐의 피막 달린 날개였다.
지금 용의 근처를 날고 있는 그것은 악마였다. 모르가나는 그 악마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아스타로트?”
날아간 아스타로트가 떨어지던 흑기사를 붙잡았다. 가슴에 단단히 껴안더니, 악마는 이내 위를 향해 날아올랐다.
제이슨이 아니라 모지가 불러낸 악마였다.
악마는 흑기사를 안은 그대로 용을 향해 날아왔다. 그 의도는 뻔했다. 용의 등 위에 저 소환물을 내려놓으려는 것이리라.
모르가나는 빠르게 궤도를 바꾸어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달아나려던 방향에서 발키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미친.’
모르가나는 다시금 비행방향을 바꾸고자 몸을 뒤틀었다. 그러느라 공중에서 잠시 멈추었다.
한편 일행은 공중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별 쓸모가 없는 두 명조차 그랬다.
알론소와 아말릭은 내면에서 룬을 보고 있었다.
신성하게 빛나는 룬. 둘은 그것을 읽었다.
이내 눈을 뜬 알론소가 창을 들어올렸다. 그 창이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용 또한 눈치챌 정도로.
알론소가 창을 내던졌다. 가장 고귀한 신에게 기적을 빌며.
“발두르여!”
창은 빛으로 휘감겨 날아갔다. 용은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다음 공격은 그러지 못했다.
아말릭 또한 알론소와 같은 룬을 보았다. 그리고 같은 짓을 벌였다.
부른 신의 이름이야 달랐지마는.
“토, 르여!”
더듬거리며 외쳤지만 토르는 응답해주었다.
‘그래, 좋아!’
그리고 토르가 자신의 망치를 빌려주었다. 그것은 아말릭이 든 단검에 깃들었다.
단검의 끝에서 전격이 뭉툭한 망치 추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 기적은 게임으로 치면 다음과 같았다. 성기사 3레벨 주문. 신 내린 무기.
토르가 외쳤다.
‘던져라!’
아말릭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 손에서 단검이, 아니 망치가 벗어난 순간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천둥과 함께 날아간 망치가 이내 목표물에 명중했다.
아쉽게도 날개에 맞지는 않았다. 다만 머리에 맞았다.
그 타격의 순간 모르가나의 머릿속은 거대한 번개로 채워졌다. 그리고 번개에 맞은 것처럼 모르가나는 공중에서 비틀거렸다.
그 위로 아스타로트가 비행했다.
용의 날개 위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아스타로트는 용의 등에다 자신이 든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용의 위에 흑기사가 달라붙었다.
모르가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모두 늦었다.
겨우 시야가 돌아오기 무섭게 모르가나는 목 부위에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그 목덜미에 달라붙은 흑기사가 방패를 마구 내리찍고 있었다.
어떻게든 떨쳐내고자 모르가나는 몸을 뒤틀었으나 흑기사는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르가나는 비명 지르듯 고함질렀다.
“썩 떨어져!”
그리 발버둥치는 사이 이내 발키리가 날아왔다. 맹금류처럼 거세고 빠르게.
그러나 그 룬 창에서 번개는 쏘아지지 않았다. 번개는 쏘아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고 있었다.
전격을 한껏 머금은 룬 창을 앞세운 채로, 발키리는 두 날개를 쫙 펼친 채 날아왔다. 그리고 룬 창을 내찌르며 용과 충돌했다.
창날과 거기 머금은 전격이 용의 날개를 찢어발겼다.
고통과 함께 중력이 덮쳐왔다. 모르가나는 미친 듯이 비명 질렀다.
이제는 더 주문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모지는 그 위로 화염구를 쏘았다.
그 피막에 닿은 불덩이가 환하게 폭발했다. 그리하여 용에게 중력의 속박을 더해주었다.
양 날개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며 용이 추락했다.
*******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사방에 인간과 트롤의 시체가 널린 가운데 광전사는 그것을 짓밟고 달렸다. 그리고 도주하는 트롤들을 베고 또 베었다.
트롤 군대는 후퇴하고 있었다.
트롤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미 동맹군이 궤멸한 마당에 굳이 수적 열세를 감수하고 계속 싸울 수는 없다.
물론 이미 너무 많이 죽었다. 이대로는 패배한 채 물러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트롤들의 전투추장은 그 치욕을 기꺼이 감수했다.
전투추장은 계속해서 철수의 뿔나팔을 높이 불었다.
그 요란한 소리를 통해 광전사는 놈이 대장임을 알아챘다.
죽여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마리의 트롤을 베며 흘긋 보니 놈들의 대장은 저 멀리 있었다. 심지어 이 장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주변에 호위병들을 거느린 채로.
당장 뛰쳐가더라도 그 뒤를 따라잡기는 버거울 터였다. 그 사실이 명백했고 놈을 죽여야 한다는 충동 또한 끓어올랐지만 광전사는 분해하지 않았다.
광전사는 그저 오딘께 감사했다. 또한 그 분께서 내려주신 선물에도.
광전사가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장창을 주워들었다. 그것을 단단히 잡고는 지면을 박차고 높이 도약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전사가 공중에서 포효했다.
“오딘이여!”
그 손에 들린 장창이 시뻘겋게 빛났다.
도약의 최고지점에 다다른 순간, 광전사는 자신의 팔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냈다.
단순 완력뿐만 아니라 염동력까지 동원하여 장창을 내던졌다. 증오스러운 적들의 대장을 향해서.
공기를 찢어발기며 장창은 궁니르처럼 쏘아졌다.
실제로 그런 선물이었다. 신 내린 무기, 이 성기사 주문에는 신앙하는 신이 자기 무기를 빌려준다는 근사한 설정이 붙어있었다.
궁니르가 길고 시뻘건 선을 그렸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선은 이내 목표물의 등에 닿았다.
트롤 전투추장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부족, 그리고 세계수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러나 붉은 선과 함께 찾아온 고통이 그 모든 상념을 지웠다.
전투추장은 자신의 가슴 밖으로 빠져나온 창을 보았다.
< 허공 - [2]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