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 - [1] >
아틀란티스 대륙의 공주, 메데이아 공이 바다 건너 이곳 미드가르드에 발을 디뎠을 때 그녀는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데다 신화적인 혈통의 여자였다. 고귀한 왕족이요 그녀의 선조 중에는 다른 땅의 신도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도 위대한 청혼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 왕, 대영주 등등.
종국에는 신까지.
흘리드스캴프, 최고신의 옥좌에 몰래 앉은 프레이 신이 그녀를 보았다. 급기야 반해버리더니, 그녀의 신분이 천하지 않노라 판단한 순간 바로 청혼했다.
그 과정에서 중매를 서주기로 한 하인에게 보수로 룬검 레바테인을 줘버렸고, 그 룬검이 종말의 거인 수르트의 손에 넘어간 불상사가 생겼지만 그것이 당장 중요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롤랑 경을 비롯한 영웅들의 호위를 받으며 메데이아 공은 세계수에 올랐다. 그리고 그 거룩한 나무 안에서 고귀한 청혼자와 혼약을 맺었다.
마침내 둘은 혼인까지 하고서야 세계수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공주의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세웠으니, 바로 이제는 국가가 된 메디아였다.
황홀한 시간이 흘러 메디아에 또 다시 다른 대륙 사람이 발을 디뎠다. 그 이방인의 이름은 이아손으로, 메데이아 공을 내버린 전남편이었다.
결별한 부부라면 흔히 그렇듯 이아손 역시 메데이아 공의 약점을 많이 알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벌인 패륜행위들을 이아손은 두 눈으로 목격해온 바였다.
그것을 빌미로 이아손은 메디아 궁성에 찾아가 메데이아 공을 협박했다. 당장 자기 몫을 내놓지 않으면 그녀의 모든 추잡한 악행들을 널리 퍼뜨리겠노라고.
쉬이 무시할 수 있을 협박은 아니었다. 이때 이아손은 병력을 대동한 채였으며, 그 자신부터가 꽤 대단한 영웅이었으므로.
웬만해서는 충분히 협박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메데이아 공의 옆자리에 그 남편만 앉아있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프레이 신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
일행은 지상을 향해 필사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꽁무니를 쫓아서 용이 하강하고 있었다.
발키리가 필사적으로 따라붙으며 용에게 번개를 퍼부었지만 거의 소용이 없었다. 그 강력한 공격은 거의 다 빗나가거나 맞아도 무방할 부위에만 명중할 뿐이었다.
그렇다. 용은 발키리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용에게 공격 비슷한 것도 하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이 답답한 상황에 제이슨은 내내 애가 탔다.
‘번개든 뭐든 저 날개 피막에 맞기만 하면 꽤 치명적일 거 같은데.’
그러나 맞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용이 이쪽에 접근해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용이 불을 뿜으려는 듯 아가리를 벌렸다. 모지는 부랴부랴 순간이동 했다.
일행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제 일행이 사라진 자리를 불길이 허무하게 스치고 지나가면 좋으련만, 용은 목표물이 사정거리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챈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여유롭게 추격을 계속했다. 그 사실이 모두는 끔찍하게 무서울 뿐이었다.
어떻게든 저 괴물에게서 멀어지고자 순간이동, 그리고 또 순간이동.
“아······”
주문의 연속사용은 머리의 송과체를 과부하시켰다.
모지의 눈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충혈 되었다. 물론 일행은 아무도 그 사실을 신경 써주지 못했다.
망망대해에서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거대한 상어에게 쫓기는 마당인 것이다. 정말이지 그런 상황이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허공에서 덮쳐오는 거대한 괴물이라니.
지금 어찌어찌 도망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행이 열심히 발을 움직인 덕분이 아니라 한 마법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말릭이 양 턱을 덜덜 부딪치며 물어왔다.
“어쩔까요?”
제이슨 역시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애써 정신을 추스리고자 쏘아붙였다.
“뭘 어째?”
“제가 뭘 어째야합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제이슨은 왜 그것을 자신에게 묻느냐 마구 욕을 지껄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조용히 말했다.
“기도해.”
“기도요?”
“그래, 기도!”
그 말을 아말릭은 방법이 없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이내 아말릭이 절망하고 입 다문 차 제이슨이 고함질렀다.
“뭐하고 자빠졌어? 기도하라고!”
그제야 아말릭은 그것이 지시였음을 깨달았다. 이내 지시를 따르기 전, 대체 어느 신에게 기도해야 하나 생각했다.
아말릭은 당장 신앙하는 신이 없었다.
아말릭은 문둥이였고 신의 저주를 받은 몸이었다. 얼굴이 짓무르고 가문에서 내쫓긴 동시에 신앙심도 달아나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니 아무 신이나 골라서 기도해야 할 텐데, 누구한테?
오딘? 아무 전조도 없이 실종된 신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발두르? 원래 신앙하던 신이던 만큼 이 상황에 부르기 껄끄러웠다······.
결국 아말릭이 부른 신은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신이었다.
‘토르여.’
그리고 그 눈이 절로 감겼다.
*******
눈을 뜬 순간 아말릭은 웬 옥좌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수염을 기른 거대한 남자.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말릭은 위축되었다. 어째서? 남자의 거대한 덩치와 근육질 몸 때문에?
아니면 그 손에 들린, 짧은 자루 길이에 비해 지나치게 육중한 망치 때문에?
망치를 든 남자가 수염 속에 감춰진 입을 열었다. 그 말은 허공에서 강력하게 울렸다. 마치 천둥처럼.
“이봐, 겁쟁이.”
아말릭은 그 즉시 무릎 꿇었다. 그리고 천둥신의 말을 경청했다.
토르가 말했다.
“떨고 있군. 아무것도 못하고 있고.”
아말릭은 그저 안절부절 못했다.
“죄송합······”
“내가 지금 사과 받으려고 이 빌어먹을 흘리드스캴푸에 앉은 것이 아니다. 아니, 흘리드스캴프? 젠장, 발음 한번 더럽게 꼬이는군. 뭔 놈의 의잔지 아나? 이곳 아스가르드에서 너희 땅을 보여주는 물건이야. 그토록 멀리 보면 당연히도 끔찍하게 어지럽고 말이다. 지금도 토 나올 것 같다. 웬만하면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아. 그러니 빠르게 용건을 전한다. 알겠나?”
아말릭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는 그 꼴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말했다.
“쫓기고 있더군. 도움이 필요하겠지?”
“예······”
“그럼 무기를 내줄 테니, 싸워라.”
“제 어찌······”
“왜 못한다는 거냐? 밭을 가는 농부도 제 몫을 빼앗기기 싫으면 괭이를 창처럼 휘둘러야 하는 법이다. 그 의무를 훌륭히 행한 바 내 저택에 불려온 자들이 널렸어. 밭 갈던 농부도 그럴 수 있는데 왜 넌 못하나? 너 이 형편없는 겁쟁아, 귀족 나리 아니냐?”
“예······”
“네 혈관에 흐르고 있는 신의 피를 자각하고 있나?”
“얼핏 듣기는 하였습니다마는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지 잘······”
“흐른다. 어느 머저리가 너희 땅에서 바지 벗었는지 모르겠다마는 그 불륜의 결과 네 피에 신성이 빛나. 그러니 싸워라. 싸워서 피의 의무를 행해라.”
한참을 굳은 끝에 아말릭이 중얼거렸다.
“전 문둥인데요.”
토르가 물었다.
“그래서?”
“문둥이는······”
“장님이 아니지. 절름발이도 아니고. 그럼 할 수 있어.”
아말릭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조금 뜸 들인 후에야 물었다.
“제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래, 당연히 너는 할 수 있다. 몇 번을 말해야겠나? 이제 그만 일을 마치자, 겁쟁이! 전사가 되어라! 네가 보낸 영혼과 교환해 어설픈 솜씨나마 룬을 마련해두었다. 새겨주지. 어느 룬을 원하나?”
“저는······ 만약 정말 제게 신의 피가 흐른다면······ 그에 합당한······”
아말릭은 더럽게도 더듬거렸지만 토르는 잘도 알아들었다.
“좋아. 신성을 더해주마. 순수한 힘보다는 못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지. 그럼 이제 뒤돌아서라.”
아말릭이 뒤돌아선 순간 등 뒤에서 섬광을 느꼈다. 뒤이어 천둥 같은 고통이 뒤따랐다.
아말릭은 미친 듯이 비명 질렀다.
마침내 아말릭이 엎드려 신음할 수 있게 된 차, 토르가 말했다.
“잘 받았나? 그렇다면 싸워라. 겁쟁이가 아닌 한 명의 전사로서 말이다. 이번에만 말고 앞으로도 열심히 싸워. 그러다가 연 닿으면 내 아비 좀 풀어주고. 알겠나?”
토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토르 신이 옥좌에서 일어난 동시에 아말릭은 이 신성한 세계에서 쫓겨나버렸다.
그리고 아말릭은 낙하를 느꼈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 아말릭은 중력에 이끌리고 있었다. 주문이 걸린 탓에 느릿하지만 어쨌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같은 처지인 일행과 함께.
아말릭이 숨을 헐떡이자 제이슨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어왔다.
“신 봤냐?”
아말릭이 물었다.
“제가 본 게······ 착각이 아닙니까?”
“씹할, 왜 질문으로 되돌리는 거야? 아무튼 봤다 이거지? 뭘 받았냐?”
아말릭은 겨우 대답했다.
“신성을······”
“그 밖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뭔가 받았겠지. 이제 머릿속을 더듬어. 그리고 그 안의 룬을 읽어라.”
무슨 지시인지 아말릭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머릿속의 룬이라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말릭은 어찌어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또 다시 모지가 순간이동 했다. 공간이 갑작스럽게 바뀌어버린 나머지 엄청난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흔들리는 머릿속에서 아말릭은 빛나는 문자들을 발견했다······.
눈 감고 있는 아말릭을 제이슨은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옆에는 아말릭 말고도 또 다른 나병환자가 있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 같았다. 사인은 아마도 심장마비.
이미 하나 불타죽은 와중에 또 하나 죽었다. 동료라기에는 별 쓸모가 없는 치들이었지만 순식간에 둘이나 이탈해버렸다.
그 사실이 제이슨은 끔찍하게 서글펐다. 이유는 몰라도 어쨌건.
문득 모지가 말을 걸어왔다. 그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제이슨은 놀랐다.
“지상에 닿기 전 용에게 잡힐 것 같아.”
제이슨이 느끼기에도 그래보였다. 주문을 쓸 때마다 지치는지 순간이동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용은 느긋하게 쫓아오는 것이, 분명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분명했다.
“씹할, 그래서?”
제이슨의 물음에 모지는 단언했다.
“그 전에 수를 써야해. 작전 말할게. 내가 일순간 사안으로 용을 멈춘다. 그리고 그 틈에 네가 뭔가 해서······”
작전이라기에는 너무 어설프고 짧았다. 그러나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아온 용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 순간 모지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순간이동.
일행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용이 도로 아가리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금 하강하려다가 문득 옆에 웬 사람이 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투구와 갑주로 온몸을 가린 놈. 그 복장은 나병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용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쨌건 복장만 봐서는 꽤 근사해 보였다. 그리하여 모르가나는 생각했다.
‘롤랑 곁에 있던 놈이니까 꽤 대단한 놈이겠지. 분명 영혼의 격도 높을 것이다.’
그 영혼을 먹어치우고자 모르가나는 시체의 머리를 깨물었다. 그렇게 그 안의 뇌와 송과체(松果體)를 흡입했다.
용이 고개를 들어 목구멍 너머로 음식물을 넘겼다. 꿀꺽 하는 순간, 또 다시 번개가 날아왔다.
날개를 노린 공격이었지만 용은 쉽게도 머리를 휘저어 받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궤도를 바꿔 하강했다.
저 영웅적인 사냥감들을 노리고자.
*******
광전사는 핏발 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시체 위에서 기사들이 무릎 꿇고 환호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창이, 사지가 부러졌지만 그럼에도 모두 천상을 향해 기도드렸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얻은 성과를 신들께 바쳤다.
웬 기사가 부르짖었다.
“프레이여!”
그 신의 이름이 불리자 광전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광전사는 평소 프레이 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 옛날, 광전사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아름다운 공주를 지켜낸 적이 있었다. 광전사는 그 공주를 흠모했으나 그녀의 손목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
애써 광전사가 보호한 공주는 저 헐벗은 프레이 신과 결혼해버렸다.
그 신한테 당한 것이 어디 그뿐이던가.
어느 마녀가 롤랑을 파멸시키고자 룬검 발리사다를 벼려냈다. 그러나 광전사의 최후를 찌른 검은 발리사다가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 광전사의 배를 찌른 것은 불타는 룬검 레바테인이었다. 프레이 신이 뚜쟁이 노릇해준 대가로 자신의 하인에게 내주었고 그 하인이 쉽게도 팔아넘긴바 결국에는 수르트의 손에 들어간 룬검 말이다.
죽어가던, 불타는 고통의 순간 광전사는 발할라를 부르짖지 않았다. 당시 광전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빼앗긴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래, 공주가 다 뭐냐. 결국 기사에게 남는 것은 영광뿐인 법. 광전사는 신음했다.
‘젠장.’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탓이리라.
그와 함께 온몸의 피로가 덮쳐왔다.
그러나 광전사는 다음 영광을 찾아 다리를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이미 너무나도 혹사시킨 나머지 사지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젠장.’
이 순간 느껴지는 고통은 자신의 신체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러나 광전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에 적들이 있었다. 트롤들. 가증스러운 괴물들.
세상의 적들.
비록 지쳤지만 놈들과 싸우리라. 이만 쉬고 싶노라 부르짖는 이성을 내쫓고 전의를 북돋고자, 광전사는 자신의 신에게 부르짖었다.
“이 전쟁을 오딘께 바친다!”
그것은 일종의 기도였다. 그리 외친 순간 광전사의 눈이 절로 감겼다.
그리하여 광전사는 목 매달린 신을 또 다시 뵙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바친 전쟁의 대가로 또 다시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맨 정신의 롤랑이라면 이 순간 또 레벨 업 했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전사는 그저 자신의 신을 뵈었다는 사실에만 감격했다.
이내 광전사는 자신의 신에게 더 많은 영혼을 바치고자 달려 나갔다. 적들의, 전쟁의 한복판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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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