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강기 - [4] >
기도하고자 눈 감았던 순간, 제이슨 앞에 펼쳐진 것은 눈꺼풀 아래 어둠이 아니었다.
옥좌와 거기 앉은 금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망토 하나 걸쳤을 뿐 거의 벌거숭이였다. 그러나 제이슨은 저 나체 남자에게서 조금도 추잡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고귀한 금발을 빛내며 프레이 신이 말했다.
“이아손? 고생스레 일하고 있나 보지.”
이아손? 어쨌건 자신에게 말한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제이슨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저는······”
“닥쳐. 말 섞기 싫다. 룬을 애걸하러 온 게 아니더냐? 뭐 주리라.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럼 뭘 주면 만족할 테냐?”
제이슨은 잠시간의 고민 끝에 말했다.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전 당신의 미천한 노예이며 대가를 바라고 봉사하는 게 아닙니다······.”
프레이는 비웃었다.
“네가 바라는 게 없으면 네 종이나 좀 챙겨주겠다. 너와 붙어먹은 발키리는 벌써 수십 년째 승격하지 못했지. 이번 기회에 그년 승격이나 시켜주랴?”
제이슨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가 웃었다.
“장하구나. 네 주제에 하수인에게 뭔가 해주다니? 그년이랑 자기라도 했나? 그 절반만큼이라도 전처를 좀 챙겨줬음 오죽 좋았지 뭐냐? 뭐 됐다. 그리 해줄 테니 얼른 꺼지도록.”
******
눈 뜨자마자 불러낸 발키리는 과연 전보다 뛰어나진 채였다. 머릿결도 더욱 찰랑거렸고 무엇보다 날개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을 제이슨은 즉시 알 수 있었다.
공중에 뜬 채 발키리가 예를 표했다.
“까마귀는 감사한다.”
제이슨이 고함 질렀다.
“됐고, 가장 아래에서 떨어지는 새끼 구해!”
발키리는 바로 명에 따랐다.
제이슨은 급히 하강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위로 향했다.
절벽 위의 용이 보였다. 용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비행하려고? 추락하던 놈들이 떨어져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눈치 챘나?
그렇다면 곧 덮쳐올 것이다.
제이슨은 이를 악물고 뭘 어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지상에 발 디디고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괴물이 덮쳐온다니?
발키리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동안은 그저 무방비일 뿐이다. 대체 어찌해야 하나?
제이슨은 일단 입술을 달싹여 활을 불러냈다. 그것을 쥐고 화살을 끼웠지만 과연 이 물건이 용에게 상처나 입힐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게임이라면 HP만 깎으면 되었으니 경비병의 화살도 열심히 쏘기만 하면 용을 죽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척 보기에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젠장.’
이내 제이슨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발키리는 언제 오나?
당장 발키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허공을 허우적대는 못미더운 동료들뿐.
당장 보이는 것은 알론소였다. 알론소는 사지를 펄떡거리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공황상태였다.
저 쓸모없는 새끼. 제이슨은 욕설을 지껄이려다 말고 이내 고함질렀다.
“기도해라!”
알론소가 몸부림치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얼핏 봐도 말을 알아먹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거리가 꽤 멀었으니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리라.
제이슨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비명 지르듯 외쳤다.
“기도하라고! 저 밑에 있는 새끼들한테도 전해!”
이번에는 겨우 들렸다. 알론소는 바로 시킨 대로 따랐다.
“제이슨 경께서 기도하시라신다!”
그러고는 과연 말이 전달되었는지 확인도 않고 눈 감더니 기도하기 시작했다. 환장할 일이었다.
다들 허공에 있으니 공포로 미친 상황일 것이다. 겨우 한 마디 외쳤다고 바로 들을 리가 없다. 저 지시는 당연히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슨은 속이 끓어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화낼 틈이 없었다.
용이 이내 허공에 떴기 때문에.
제이슨은 활을 당기기 전 흘긋 알론소를 바라보았다. 기도하는 노인네.
제이슨이 알기로 잠들거나 신에게 기도하면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도 지금 이 기회에 레벨 업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일단 기도하라 지시했는데, 사실 뭔 소용인가 싶었다. 어차피 레벨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들 아니었던가.
저들이 설령 레벨 업을 한들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레벨 높은 영웅들도 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마당 아닌가. 이 와중에 레벨 낮은 머저리들이 뭔 쓸모일까.
이내 용은 빠르게 날아왔다.
용이 입 벌린 순간 제이슨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눈 감으려던 찰나 발키리가 돌아왔다. 얼빠진 표정의 모지를 데리고서.
이내 발키리가 모지를 내던지고 용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룬 창에서 방출된 전격이 허공을 찢었다. 그 노란 광선이 용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그러나 용은 날개를 살짝 움직여 비행궤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그 공격을 흘려보냈다.
쉽게도 피해버렸다. 그 사실이 제이슨의 표정을 찌푸리게 한 다음 이내 희망을 주었다.
‘위협적이니까 피한 것이겠지?’
용이 발키리를 흘긋 보았다. 그리고 목표물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발키리와 용이 허공에서 뒤섞였다.
방금 승격했으니 난생 처음 비행하는 것이련만, 발키리는 생각보다 잘도 날아다녔다. 그렇게 불길과 번개가 허공을 수놓는 가운데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지였다. 자기에게 공중부양 주문을 걸었는지 허공에 뜬 채로 물어왔다.
“네 발키리야?”
제이슨으로서는 왜 이 상황에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용만 노려보고 있자니 모지는 다시금 물어왔다.
“네 발키리냐니까?”
결국 참지 못한 제이슨이 소리 질렀다.
“어, 새끼야. 어!”
“어떻게? 원래 못 날잖아?”
“레벨 업 했더니 저년 진화 좀 했다! 어? 됐냐!”
“레벨 업? 아, 코끼리 영매 경험치가 꽤 들어왔나 보지.”
그러면서 중얼중얼.
평소에는 우물우물 거리는 주제에. 지금 이 상황에 허공에서 잘도 말한다 싶었다. 제이슨은 더 뭐라 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활을 들었다.
그리고 용에게 겨누었지만, 시위를 당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의미 없이 화살을 쏘았다가 눈길만 끄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기에.
그때 아래에서 모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여······.”
힘 빠지는 목소리. 레벨 업 하고자 기도하는 것일까.
제이슨은 왠지 모르게 욱하며 활 너머로 용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그 비행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지는 않았다. 일단 시야에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좋아, 날개를 노리자. 피막에 바람구멍 좀 내면 어찌 먹힐지도······.’
그리 생각하고 이내 손을 놓았다. 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은 이내 용에게 명중했다.
날개가 아니라 머리통 비늘에.
불운한 일이었지만 더욱 나쁘게도 용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용의 입이 달싹였다.
“마침 날벌레 같은 이년과 노는 데 질리던 참이었더랬지.”
그리고 용이 이쪽을 향해 날아온 순간 그 뒤에서 발키리의 번개가 번뜩였다. 그 노란 광선이 용을 관통했다. 그 순간 제이슨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그러나 그 표정이 곧바로 굳었다. 용이 그저 비늘에서 불꽃 몇 번 튀기고는 이쪽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으므로.
‘미친.’
이제 정말 방법이 없었다.
제이슨은 기도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곳의 신들은 제이슨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프레이의 태도만 봐도 그랬다······.
용이 아가리를 벌렸다. 태양과도 같은 열이 그 속에서 달아올랐다.
제이슨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 손목에서 웬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묘한 어지럼증이 덮쳐왔다.
어둠 속에서 세상이 한 번 반전했다.
체념한 와중에도 놀라 제이슨은 눈을 떴다. 위가 너무 환했기에 고개를 올려보았더니, 용의 불길이 저 위를 불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용 또한 저 위에 있었다. 왜 올라간 거지?
아니, 용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제이슨이 아래 지점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분명 아래에 위치하던 알론소가 바로 옆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동료가 하나 더.
제이슨은 제 손목을 붙잡은 모지를 바라보았다.
“뭐야?”
모지가 대답했다.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사의 13레벨 주문이라는 것을 제이슨은 겨우 떠올려냈다.
원래도 배울 수 있는 주문이었지만 그동안 습득하지 않은 터였다. 게임 시절 모지는 PVP를 즐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마법사 모지는 그저 분신을 만들어놓고 투명해진 다음 가속, 사안, 화염구만을 반복하는 캐릭터였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유용하더라도 사실 여기서 그런 부류의 마법사는 썩 훌륭하지 않을 것이다. 제이슨은 뭐라 핀잔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고찰했다.
레벨 업 하자마자 지금 딱 필요한 주문을 얻어냈다니. 어떻게?
제이슨도 레벨 업 결과 상황이 개선되기는 했다. 발키리가 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제이슨의 의지가 아니었다. 벌벌 떨고 있자니 프레이 신이 그리 해주었을 뿐.
그 신과 대면할 때 제이슨은 그저 무력했다. 주인 앞에서 하고픈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불쌍한 노예처럼.
그런데 모지는 달랐단 말인가?
제이슨이 모지를 바라보는 차 모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발키리 옆에 나타나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발키리에게 가속을 걸어준 다음 모지가 다시 순간이동하여 둘 옆에 돌아왔다.
더욱 빠르게 허공을 날기 시작한 발키리를 보며 모지가 중얼거렸다.
“당장 세운 계획은 이래. 이제 계속 순간이동해서 아래로 내려가 동료들을 회수할 거야. 그리고 끝내 지면에 닿으면 냅다 튀는 거지. 더 좋은 의견 있어?”
“아니.”
“그럼 이동한다.”
모지가 알론소와 제이슨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용이 덮쳐온 순간 순간이동.
아말릭과의 거리가 꽤 멀었으므로 그 옆에 바로 도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순간이동 두 번으로 아말릭 옆에 도달했다. 이내 모지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머리가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여럿과 함께 순간이동하자니 정신적으로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참아내고는 입을 열었다.
“제이슨?”
“응?”
“당분간 순간이동 못 해. 몇 번 연속사용하면 쿨타임 가동되나봐. 잠시 버텨.”
제이슨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 계속해서 하강하여 이쪽을 노려왔다. 제이슨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웠다.
“우트가르트에서······”
그리고 용은 그 주문을 감지했다.
따라서 경계하는 가운데, 용은 위에서 웬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뭔지 몰라도 상서로운 징조가 아니었기에 용은 얼른 피했다.
그리고 방금 용이 있던 자리를 지나 서리거인이 떨어져내렸다.
속절없이 추락하며 서리거인이 비명 질렀다.
“개—새—”
이내 서리거인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제이슨은 이를 악물었다.
용의 위에 거인을 불러내 그 위에 거인을 달라붙게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거인의 무게를 못 이기고 용은 추락하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저리도 간단히 피해버리나?
때마침 발키리가 날아와 룬 창을 번뜩였다. 그 창 끝에서 번개가 방출되려는 찰나, 용이 그쪽에 고개를 휙 돌리더니 불을 뿜었다.
그리 고개를 돌려가며 불줄기를 내뿜어 발키리를 태우려 들었다.
발키리는 마법을 중단하고 황급히 회피기동에 전념해야 했다.
그리 사냥하던 와중에도 용은 또 다시 주문의 기척을 느꼈다.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를 용은 감지했다.
완성될 즈음이면 또 다시 피해주면 되겠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용은 그것이 가능했다.
용의 이름은 모르가나였다. 마녀였고 타락한 발키리였으며 고대 영웅들을 괴롭히거나 혹은 보살피던 존재였다.
모르가나에게 다른 마법사의 주문을 주의 깊게 듣는 것쯤 간단한 일이었다. 하찮은 발키리가 흔해빠진 번개를 언제 어떻게 쏠지 알아채기 쉬운 것처럼.
용이 이내 이쪽에 불줄기를 향한 순간, 모지가 주문을 완성했다.
새로이 아말릭을 포함한 네 명이 순간이동하여 사라졌다.
눈앞에서 사냥감이 사라지다니. 기가 찬 일이었지만 모르가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저 주문의 한계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저쯤에 이동했겠지.’
과연 그랬다. 다섯 사냥감이 저 아래에 보였다.
어차피 따라잡은들 바로 이동해버릴 것이다. 그러니 좀 기다렸다가 죽이면 된다.
그리 생각한 모르가나는 여유 있게 하강했다.
*******
기사 둘을 짓밟은 끝에 마지막 괴물의 발버둥은 끝났다. 괴물이 이내 돌진하려던 순간, 괴물의 거대한 몸뚱이에 일곱 개의 창이 꽂혔다.
그렇게 마지막 나무코끼리가 쓰러졌다. 그 거대한 생물의 종말을 광전사는 달성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광전사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딘이여! 이 사냥감들을 당신께 바칩니다!”
계속해서 저 위에 계실 자신의 신께 외쳤다.
“흡족하시길 바랍니다—!”
굳이 바랄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목 매달린 와중에도 전쟁신은 웃고 있었다.
********
< 승강기 - [4]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