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강기 - [3] >
광전사는 제 손에 들린 룬검을 즐거이 바라보았다. 이내 웃으려는 차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천둥 소리를 들었다.
괴물들이 이쪽에 달려들고 있었다. 혼잡한 와중에도 자기네 지휘관을 챙기려는 것일까.
그 지휘관 괴물 또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괴물이 호흡함에 따라 콧구멍에서 피가 철철 흐르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코 안을 관통한 칼이 호흡을 막는 것이다.
인간이어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울 터요 저 괴물들의 경우에는 더할 텐데. 저 거대한 괴물은 고통에 미쳐 발광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이쪽을 똑바로 노려볼 뿐.
저놈은 전사로군. 광전사는 판단했다.
자, 이제 저 전사와 나머지 농부들이 덮쳐올 것이다.
빠져나갈 틈은?
꽤 많았다. 일단 지휘관을 구하고자 무작정 달려오는 괴물들, 그 다리 사이로 뛰어들어도 좋을 것이다. 시체가 꽤 널렸으니 그것을 밟고 멀리 뛰어버려도 포위를 쉬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광전사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방금 전사라 판단한 괴물을 향해서. 왜냐하면 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괴물이 달려오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 단순한 동작으로도 거대한 상아가 좌우를 가득 채웠다.
염동력이라도 두른 듯 상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뿌옇고 희미한 무언가. 척 보기에도 불길한 그 무기를 마구 흔들며 괴물이 달려왔다.
광전사는 달려가며 왼손에 쥔 염동검을 내던졌다. 검에는 물론 투척 자체에도 염동력을 실어서.
거세게 날아간 염동검이 괴물의 눈에 부딪쳤다. 막강하게 달려온 괴물이 눈 감은 순간, 그 돌진도 잠시 멈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광전사가 발리사다를 찔러 넣었다. 그 상아의 결을 노리고서.
이내 상아가 잘려나갔다.
광전사는 연속해서 룬검을 앞세운 채 달렸다. 괴물의 목 아래를 통과하면서 놈의 목덜미에 한 번 꽂아 넣었다. 이내 배에도 거대한 칼금을 내어주면서 꽁무니로 빠져나갔다.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광전사는 굳이 놈을 죽였는가 확인하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광전사는 주변에 널린 다른 사냥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가장 가까이 있는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기병들의 돌격에 대비하고자 상아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놈. 그 뒷모습이 보였다.
괴물이 눈치 채기도 전에 광전사가 그 아래에 파고들었다. 이내 그 배를 다섯 번 쑤셨다.
괴물이 무언가 눈치 챘을 때는 너무 늦었다. 내장이 찔린 충격은 뒤늦게 찾아왔다.
“롤랑을, 위하여!”
괴물이 무릎 꿇은 순간 기병들이 돌격해왔다. 충돌에 이어 괴물은 안면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때 광전사는 다른 괴물의 코를 토막 내고 있었다.
이제 광전사는 정면에서 놈들을 공격하고 죽였다. 그럴 수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이 달라졌으니까.
광전사가 두 번 칼을 휘둘러 괴물의 코를, 상아를 베어 무력화 시켰다. 몸을 비트는 괴물의 목을 세게 그어서 피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괴물이 죽은 순간 지체없이 다음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같은 짓을 반복했다.
쉬지 않고 괴물과 싸우다니. 그것도 정면에서.
썩 똑똑한 짓은 아니었다. 아무리 룬검이 예리한들 괴물들의 가죽이 워낙 두꺼웠으므로 그것을 베어내는 것은 역시나 부담이었다. 한 번 베어낼 때마다 끔찍하게 힘이 들어갔다.
베고, 또 베었지만 매 순간마다 근육이 파열되고 온몸의 혈관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광전사니까.
몸의 상처는 기도하여 치유의 기적에 맡기고, 체력의 부담은 미래의 자신에게 맡겼다. 그리 계속 괴물을 죽이고 또 죽이며 광전사는 우렁차게도 고함질렀다.
“죽여라! 적들을 죽여서 네 신들을 기쁘게 하라! 신들께서 우리를 지켜 보신다!”
지축이 울리고 비명이 사방을 가득 채운 와중에도 그 고함은 똑똑히 울려 퍼졌다. 이내 기사들에게서 호응이 돌아왔다.
“토르여!”
“발두르 신이시여!”
그 밖에도 헤임달, 티르, 프레이야의 이름이 울렸다.
각자 자신이 믿는 신을 연호했다. 그리하여 이 전투를 그들에게 바쳤다.
정말로 신들이 지켜보고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지금의 영광이 천상에 닿기를. 지금 이 순간 기사들은 간절히 소망했다.
죽어 허공에 흩어질 영혼을 위하여.
그러나 문득 광전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들에게서 가장 위대한 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속상하시리라.
그리하여 광전사가 대신 외쳤다. 지금껏 불리지 않은 몫을 대신 외치려는 듯이.
“오오오오오오오오오디이이이이이이이인!”
입에서 피가 튈 만치 크게 외쳤다. 주변 괴물들이 일순 굳을 만치 그 소리는 거대하게 울렸다.
아마 소음 때문이겠지만 어쨌건 놈들이 겁먹었다. 놓칠 수 없었다.
광전사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에게 바칠 제물을 죽이고 또 죽였다.
*******
일행은 모두 함께 떨어져 내렸다. 가속이 붙을수록 절벽과의 거리도 급속도로 멀어졌다.
당장에는 저 멀리에 있지만, 어쨌건 지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모지는 입 다물고 있었다. 그놈의 공중부양 주문을 읊지 않고 말이다.
추락하는 공포에 미칠 것 같은 와중에도 제이슨은 그 침묵을 보고 분노했다. 중력에 저항하려는 듯 사지를 마구 흔들며 고함질렀다.
“개새끼야, 주문!”
그러나 모지는 계속해서 침묵했다.
그 입술이 달싹인 것은 잠시 후였다. 모지는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대상을 선택했다.
이윽고 제이슨은 자신의 몸이 중력에서 조금 풀려난 것을 느꼈다. 드디어 공중부양 주문이 걸린 것이다.
그 몸이 허공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가운데 제이슨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다른 동료들을 내려다 보았다.
벌써 많이도 떨어졌다. 대체 왜 지금에야 주문을 썼나?
지금 이 속도라면 분명 한두 명은 주문의 효력을 입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대로 바닥과 충돌해 죽으리라. 온몸이 산산조각 나서.
그러나 당장 아무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였다. 어쩔 수 없이 눈 감고, 제이슨은 그저 기도했다. 자신의 신에게.
한편 모지는 계속 추락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같이 떨어져내리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주문을 걸어줄 수는 없었다. 같은 주문을 연속해서 쓰기는 힘들거나 아예 불가능했다. 게임으로 치면 소위 말하는 쿨타임이 존재하기에.
이내 주문 사용이 가능해졌다 느낀 순간 모지는 바로 읊어나갔다.
우선은 알론소에게 공중부양을 걸어주었다. 모지 자신이 아니라.
주문을 걸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야 한다. 시전자 자신의 낙하속도가 저들과 달라졌다가는 거리도 벌어질 테니 주문을 걸어줄 수 없게 된다.
계속 떨어져내렸다. 다음에는 아말릭에게 주문을 걸어주었다. 다른 나병환자들보다 그가 똑똑한 것 같았고 더 중요한 것 같았으니까.
모지 자신은 계속 추락함에 따라 낙하속도가 느려진 동료들은 저 위로 멀어져갔다.
주문의 쿨타임은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주문을 쓴 순간 머릿속 주문을 구성하는 룬의 빛이 꺼졌다. 그 빛이 다시 밝아지면 다시 주문을 쓸 수 있었다.
그 지연시간이 지나기를 그저 애타게 기다리며 모지는 생각했다.
잘한 짓일까?
공중부양 주문을 쓰려면 일단 용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의 코앞에서 낙하를 멈췄다가는 그대로 사냥당할 터였으니까.
그래서 조금 시간차를 두고 주문을 걸었는데, 그 결과 벌써 지면이 저토록 가까워졌다.
마침내 머릿속 룬이 밝았다. 모지는 다른 나병환자에게 주문을 걸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모지와 나머지 나병환자 한 명뿐이었다.
‘자칫하면 저놈도 죽겠지.’
마지막까지 남겨서 미안하다. 사과의 눈짓이라도 하고자 병자를 바라본 순간 모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나병환자의 눈이 흐리멍덩했다. 또한 그 몸은 그저 흔들릴 뿐 몸부림치는 기색조차 없었다.
설마 이미 죽은 건가? 추락의 공포로, 심장마비가 찾아왔나?
그렇다면 주문을 걸어주지 않아도 될까?
오래 고민할 틈은 없었다. 지면이 벌써 저토록 가까이 다가온 채였다.
이내 모지는 다음 주문의 대상을 선택했다.
나병환자의 낙하가 느릿해졌다.
이제 지면과의 사이는 가까울 대로 가까워졌다. 모지는 지면의 타일을 셀 수 있게 되었다.
저 타일을 붉게 물들이기 전까지 주문을 쓸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도 불가능했다. 쿨타임이 반도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모지는 이내 주문을 읊어나갔다.
공중부양 주문이 아니라 다른 주문을.
분신 주문.
게임 메디아에 있던 마법사 전용 주문이었다. 이름처럼 시전자의 분신을 만드는 효과였는데, 그리하여 만들어진 분신은 환영이 아니라 실체였다. 본체가 죽으면 그 분신이 이내 본체가 되었다.
굉장히 좋은 주문이었다. 행동 기회도 두 배로, 생존 가능성도 두 배로 늘어나는 주문이었으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 했다.
허상이 아닌 실체로서 자아를 가진 분신이라니. 불안해서 어찌 부른단 말인가?
다른 우려도 있었다. 그리 나타난 분신은 게이머 왕은지로서의 자아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고대 마법사 모지로서의 자아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
후자의 경우 새로운 모지는 동료들의 영혼을 웬 이계 잡놈들이 차지했음을 깨달으리라. 이내 그 고대 마법사는 영웅적인 분노를 터뜨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이 아니면 쓰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그리 판단했으므로 모지는 지체 없이 머릿속 룬을 구성했다.
“영혼은 편재하노니 육 또한······”
생겨난 분신은 지상에서 그리 높지 않은 위치에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내 떨어져내려 모지는 죽고 분신은 살아남아 본체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팀의 전력은 유지될 것이다.
자, 곧 생겨날 분신은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제발 그러기를 모지는 바랐다.
소극적이고 잡무도 변변히 하지 못하던 왕은지는 현실에서 너무 쓸모가 없었다. 정말이지 여기서나마 도움이 되기를.
어쭙잖은 영웅심리일지 몰라도 제발.
“편재하여······”
주문을 거의 완성한 순간이었다.
위에서 빛이 덮쳐왔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의 빛이라니, 천사인가?
과연 그랬다. 모지에게 날아온 그것은 발키리였다.
맹금류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모지의 양 겨드랑이를 쓰다듬듯이 안아 올렸다.
이 낙하 속도대로라면 그 동작만으로도 겨드랑이가 부러질 터였지만 발키리는 정말로 부드럽게 모지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위, 그러니까 하늘을 향해서.
모지는 주문을 외우다 말고 아연하게 갑작스러운 상승을 느꼈다. 방금 죽을 뻔한 와중이지만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안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발키리였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소환물 발키리는 못 날지 않나?’
그러나 날고 있었다. 어떻게?
제이슨이 불러낸 소환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발키리는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 강림한 천사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모지를 이대로 발할라에 데려갈 것인가?
아니었다. 여전히 허공에 있는 동료들이 가까이서 보일 즈음 발키리가 지시했다.
“마법사, 주문을 읊어 네 몸을 허공에 고정시켜라. 나는 이대로 전투에 나서야 하니.”
모지는 떨떠름하게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모지가 공중부양 주문을 읊는 순간, 발키리는 미련없이 모지를 던져버리고 날아가버렸다.
모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 가까이에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용이 보였다.
이내 날개를 쫙 편 발키리가 용을 향해 룬 창을 겨누었다.
*******
< 승강기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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