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강기 - [1] >
기사들은 일종의 결사대였다. 저 거대한 나무코끼리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애초에 기마돌격 정도의 충격력이 아니고서야 놈들의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할 테니까.
잘 무장했다 한들 보병들에게 저들을 상대하라 맡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트롤 군대를 상대해야 할 주군이다. 주군은 온존해야 한다.
그리고 저 거대한 괴물들이 군세 한 가운데에서 날뛰다가는 아군의 수적 우위가 위험해진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 괴물에 무력감을 느끼다 못해 하나둘씩 공포에 질려 달아난 나머지 어느새 단체 탈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무리 정예병이라 한들 충분히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진짜배기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니까.
결국 일천 기사들은 영웅의 뒤를 추종하는 것치고는 엄숙하게 전진했다.
말이 없어 걷는 기사들은 롤랑과 함께 뭉쳤다. 그들 절반은 무리의 중심을 이루었다. 나머지 말에 탑승한 기사들은 쌍방에 흩어져 두 열을 이루었다.
기사들이 나아가는 전방에 놈들, 거대한 코끼리 괴물들이 있었다.
말도, 사람도 천천히 걸었다. 그리하여 괴물들과 거리를 좁혔다.
이제 두 무리의 사이는 불과 이백 미터였다.
온통 시끄러운 와중에도 롤랑의 귀에 침 넘어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롤랑은 알 수 있었다.
‘다들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롤랑 또한.
문득 롤랑의 눈에 괴물들의 중심에 있는 유독 거대한 코끼리가 보였다. 그 거대한 괴물은 코로 웬 물건을 그러쥐고 있었다.
검이었다. 그것이 발리사다라는 것을 롤랑은 멀리서도 알아보았다.
롤랑은 그저 황당했다.
‘월렴? 왜 저걸 헌납한 거지?’
코끼리의 코가 움켜쥔 발리사다는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룬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아 저 룬검을 쥔 코끼리도 발리사다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저괴물도 영매 따위 영능력자일까.
‘이번의 보스는 저놈인가? 룬검을 쥔 코끼리 괴물?’
이쯤 되서는 그저 웃길 뿐이었다.
이게 다 뭔가.
이왕 괴물들과 싸워야한다면 소극적인 던전 RPG를 꿈꾸었다.
난이도 높기로 소문난 던전 RPG는 꽤나 있다. 세계수의 어쩌고, 진여신 어쩌고, 위저드 어쩌고 등등. 그런 게임들을 할 때는 한 턴 한 턴이 전멸의 위기이므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소극적으로 나아가야 했다.
실제 몸으로 싸워야 하는 영웅들도 그러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이 매우 어려운 게임이라 가정하고 조심조심 나아가기로 했다.
한 탕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세계수 탐사에 한몫 할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작은 모험의 연속 끝에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황금사과도 구하고, 목 매달린 신도 구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안전하게. 아무도 죽지 않고.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은 용 한 마리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파탄났다. 아무 전조없이 나타난 용, 그리고 갑자기 강제 이벤트에 휘말린 결과 전쟁터에 내몰리다니.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건 싸워야 하리라.
롤랑이 검을 쥐었다.
같이 걷던 기사들의 전진이 멈췄다.
인간 군대와 괴물 군대는 서로를 바라보고 멈춰 섰다. 그 상태로 쌍방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마침내 후방에서 신호가 울려퍼졌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우선은 아군의 고둥 소리.
코끼리들도 흉내 내듯 코를 높이 올렸다. 그리고 울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자, 양쪽이 진군나팔을 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코끼리들이 돌격해왔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도 움직였다.
“롤랑을 위하여!”
말을 탄 기사들은 양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그들 기병은 괴물들의 측면으로 말을 달렸다.
말에 타지 않은 기사들은 롤랑과 함께 이 자리에 우뚝 섰다. 코끼리들이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데도 아무도 달아나지 않았다. 모두 그 자리를 잠자코 지켜섰다.
여기까지는 롤랑이 지시한 바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어떨까.
롤랑 옆에 선, 웬 기사가 고함질렀다.
“롤랑을 위하여!”
뒤이어 모두가 합창했다.
롤랑을 위하여!
마침내 달려오던 코끼리들이 이쪽에 닿았다.
괴물들이 상아를, 코를 휘둘렀다. 그리하여 맨 전방에 있던 기사들을 찌르고 갈겼다. 그 막강한 충격력에 실린 공격, 물리적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애초에 질량이 달랐다. 괴물의 돌격에 얻어맞은 기사들은 갑옷 무게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예상하던, 그리고 걱정하던 일 그대로였다.
순식간에 전방이 아작 나고 붉은 곤죽이 일렬을 이루었다.
롤랑도 최선두였다. 그러나 롤랑은 아예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괴물의 다리 사이에 롤랑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제발 이 일격이 통하기를 빌며, 양 손으로 쥔 염동검을 놈의 배에 쑤셔넣었다.
눈을 질끈 감고 팔에 힘을 주었다. 푹 하는 소리.
다행히 박혔다. 그대로 세게 힘을 주자 분명히 베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내 놈에게서 창자를 쏟아내며 롤랑이 고함질렀다.
“버—텨—!”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보나마나 끔찍할 테니까.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쿵쿵 거리는 소리. 그리고 오도독오도독, 뿌드득뿌드득. 뭔가 부러지고 박살나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찔렀다. 분명 처참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기사들은 온몸이 동강 나고, 짓이겨지며 죽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정말로 용기가 넘쳤다. 전방이 끔찍하게 박살났는데도 모두 자리를 지킨 바, 코끼리들의 일제 돌격은 일단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괴물들은 앞을 향해 밀어닥쳤다. 그에 맞서는 기사들의 반격은 헛되고 무의미했다.
웬 기사가 거대한 전쟁도끼를 들어 내리찍었다. 그 날을 한 코끼리의 코에 박아넣었다.
대단한 일격이었다. 괴물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고통에 겨워 코끼리 괴물은 몸을 뒤틀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괴물의 상아가 거대한 궤적을 그렸다.
그 궤적에 있던, 전쟁도끼를 쥔 기사의 머리통이 상아의 끄트머리에 닿았다. 그 머리통은 그대로 몸통에서 뽑혀나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모두 그렇게 박살나고 또 박살났다. 말을 탄 기사들은?
당장 아무도 돌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기병들은 그저 천천히 말을 달리며 코끼리 무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코끼리들이 그들 기병을 쫓고자 멍청하게도 무리를 나누어 허둥댔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코끼리 괴물들은 그저 모든 방향에 상아를 앞세우고 경계를 취했다. 경거망동 따위는 없었다.
‘죽어라.’
롤랑이 머리가 빠개지는 고통 속에서 염동검을 찔렀다. 칼끝이 괴물의 코를 찔렀다. 그 원통 정중앙에 구멍을 내주었다.
괴물이 광분하여 몸을 뒤트는 것을 노리고 달려들엇다. 이내 달려가는 힘으로 그 옆구리에 칼날을 쑤셔박았다.
롤랑은 계속해서 죽을 힘을 향해 달렸다.
그 뒤로 괴물의 옆구리에 긴 상처가 벌어졌다. 피와 그 내용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몇 번 싸워본 경험은 확실히 롤랑에게 도움이 되었다.
지금 이 전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지의 가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롤랑은 제법 수월히도 놈들을 죽였다.
짧은 시간 벌써 세 마리나 죽였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롤랑을 노리고 한 괴물이 다리를 바닥에 찧었다. 물론 롤랑은 쉬이 피했다. 그러나 마치 충격파와도 같은 파동에 롤랑의 온몸이 곤두섰다.
그리고 그 충격의 여파가 퍼졌다. 웬 돌멩이가 튀어 롤랑의 귀를 찢어발겼다.
롤랑의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고통스러워 할 틈은 없었다. 롤랑은 이를 악물며 다음 만만한 상대를 찾아 달려들었다.
뒤에서 거대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롤랑을 위하여!”
코끼리들의 돌파는 생각보다 느렸다. 원래 걱정했던 것은 놈들이 돌진하는 족족 다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기사들의 저지 따윈 없는 것처럼 그대로 돌파한 다음, 그대로 코끼리들이 본진의 보병들 한 가운데에서 날뛸 수도 있었다.
다행히 지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들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중앙을 사수하던 오백 명 중 절반은 죽었다. 그러나 그 정도면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기사들은 놈들에게 별 타격은 주지 못했지만, 어쨌건 시간을 제법 끌었다.
괴물들이 또 다시 머리를 휘저었다.
거대한 상아가 커다란 살육의 선을 그렸다. 또 다시 여러 목숨이 꺼졌다.
마침내 기사들의 방어선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제 괴물들로서는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될 것이다.
그리 판단하고 코끼리 괴물들이 기세를 높였다. 놈들은 높이 울부짖으며 돌파를 이어나갔다.
충돌, 비명. 괴물들이 또 한 줄의 기사들을 피 무더기로 만들었다.
그리 열 하나가 사라짐에 따라 그 사이에 기다리고 있던, 웬 거대한 물건이 드러났다.
기사들의 시체 너머에, 그러니까 돌진하던 코끼리들 바로 앞에 그 물건들은 서있었다. 거대한 철 덩어리 세 개.
세 문의 대포.
롤랑이 고함질렀다.
“발—!”
불꽃이 튀겼다. 이내 괴물들은 그마저 날려버리려고 돌진했다. 놈들이 머리를 앞세우고 지축을 울리는 그때, 마침내 발사되었다.
애초에 이쯤 발사하려고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설령 기사들이 살아남아 버티고 있었다면 그마저 날려버릴 각오로.
“사—!”
그리고 포구가 불을 뿜었다.
그 순간 모두 번개가 전장을 찢었다고 느꼈다. 그런 소리였다.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천둥. 토르가 휘두르는 묠니르처럼.
모두의 고막을 찢고, 주변 모든 이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런 소리였다.
세 발의 포격이 울렸다.
그 순간 코끼리들의 돌진이 멈췄다. 일순 괴물들은 움츠러들었다.
롤랑이 알아냈기를, 보통 코끼리들이 그렇듯 저 괴물 코끼리들도 큰 소리에 약했다. 그러나 놈들은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다. 애당초 저 괴물들의 걸음 자체가 천둥이었으므로. 웬만한 소음에도 놈들은 그저 움찔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 이상의 소리여야 했다. 천둥 중의 천둥만이 놈들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었다.
거대한 충돌음.
날아간 세 발의 천둥은 세 마리의 괴물을 부수었다. 단말마조차 없었다.
뼈와 살이 튀고 세 마리 괴물이 쓰러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소득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은 롤랑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앞에서 쏘든 언덕에서 쏘든 똑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잠시간의 천둥에 이은 고요 속에서. 그저 맴돌기만 하던 기병들이 박차를 가했다.
오백 기병들이 돌격했다.
방어를 담당하던 괴물들도 잠시 멍하던 와중이었다. 삐죽한 창날이 놈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저 깊숙한 고통으로.
한 번의 충돌만으로 창들이 부러졌다. 그러나 놈들의 살에 확실히 박혔다.
그 순간 돌격했던 기병들은 지체없이 빠져나갔다. 기병들은 순환했다. 어떻게든 몇 마리 괴물이 반격을 가해 몇 명이 죽어나갔지만 어쨌건.
다음 열의 기병들이 뒤를 이었다. 또 다시 창을 늘어뜨리고 돌격.
충돌.
괴물들의 비명이 잇따랐다.
그리하여 괴물들의 돌격이 멈췄다. 그로써 조금 안전해졌다 느낀 순간, 롤랑은 괴물들의 한 가운데에서 고함질렀다.
이 끔찍한 행위, 그 광기를 담당하는 자신의 신을 향해서.
“이 전쟁을 오딘께 바친다!”
그리고 이미 붉었던 세상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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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강기 - [1] > 끝
ⓒ 검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