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48화 (48/164)

< 오십이 층 - [4] >

트롤은 하등한 거인이다.

거인의 일종치고는 작은 것이 인간보다 머리 두세 개 정도 클 뿐이다.

보통 거인들이 보기에는 꽤 큰 난쟁이인 셈이지만 이들과 싸워야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이 상대하기에 트롤은 크고, 강하며,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괴물이다. 생존력도 좋아 대부분의 괴물이 사라진 이 시대에도 마을 근처 어딘가에 숨어 살 정도다.

만약 이 괴물이 마을 근처에 모습을 보였다면 주민 모두가 창을 쥔 채 며칠이고 숲속을 배회해야 한다. 빠른 시일 내에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아이와 가축의 절반은 그 뱃속에 들어가 버릴 것이므로.

그 결사의 사냥에 나설 때 토끼잡이에나 쓰던 사냥용 활은 창고에 두고 오는 것이 좋다. 트롤의 두꺼운 가죽에 부실한 화살은 박히지 않는다. 트롤을 상대하려면 커다란 군용 활이나 기다란 창이 필요하다. 그것도 여러 벌이.

그처럼 막강한 적수이지만 모두가 트롤을 두려워하기에 놈이 발견되는 즉시 사냥에 나서곤 한다. 그 덕에 트롤들은 인간 세상에서 번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없는 이곳 세계수에서 트롤은 대가족을, 부족을 이루었다.

******

롤랑은 트롤들이 이룬 군세를 보고 당황했다. 놈들이 의외로 인간처럼 생겼다는 사실에. 그리고 놈들이 이룬 군대의 규모에 당황했다.

평원 전체가 빼곡했다. 그 거대한 덩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해일이었다.

롤랑은 군 시절 당시를 떠올렸다. 사단 사열식 당시의 연병장을. 사단 규모가 저들보다 못하지는 않을 텐데, 위압감이 전혀 달랐다.

어째서인가? 저런 무리를 아군이 아니라 적으로 마주해서?

롤랑은 아군의 군세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군의 규모가 더했다. 자그마치 삼만 대군인 것이다. 웬 나무를 곤봉이랍시고 든 트롤들 보다야 이쪽이 무장도 훨씬 뛰어나다. 아군 병사들은 장창에 질 좋은 장궁, 갑주로 빈틈없이 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든든하지 않았다.

롤랑은 그저 공포에 질려 적들을 바라보았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전쟁이라 한들 대규모 괴물 소탕인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진짜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영웅의 무용이 크게 도움 될까? 모른다. 삼국지마저 전쟁 묘사가 심히 허황되다는 평판이다.

실제 어떨지는 전혀 모른다. 실제 전쟁 따위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롤랑이 아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개인의 승리가 곧 무리의 승리가 아니라는 것. 전투에서의 승리와 전쟁에서의 승리가 다른 것처럼.

문득 롤랑은 자조했다.

‘아니, 지금 내가 승리를 신경 쓸 겨를인가?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걱정해야 할 판에.’

이제는 설령 후미가 막혀있지 않더라도 퇴각할 수 없을 것이다. 저런 대군을 앞에 두고 무작정 내빼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소리가 울렸다. 지면을 울리며 놈들이 나타났다.

세계수의 계단에서 그 거대한 몸뚱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코끼리들.

사람들은 놈들의 출현을 그저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모두 잠시 말도 잇지 못했다.

이내 사령관이 중얼거렸다.

“포라도 빨리 설치해야······ 고지대랍시고 언덕 하나뿐인가? 저기라도 빨리······”

롤랑은 그 언덕이 어딘가 바라보았다.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과연 불룩한 지형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저 초원 일부가 살짝 솟았을 뿐인 지형상의 오차에 불과했다.

고지대의 이점? 저곳에 있기나 할까?

그리 생각했지만 롤랑은 당장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저곳에 포를 설치하라?

당장 듣기에는 멍청한 지시 같다. 그래도 일군을 이끄는 사령관의 발언 아닌가?

‘다 생각이 있어서 내뱉는 발언일 텐데 거기에 군사 문외한이 간섭한들 말아먹을 뿐 아닌가?’

사령관이 고함질렀다.

“보어조아, 부하들을 닥달 하시오. 놈들의 공세에 앞서 빨리 포격을 준비해!”

보어조아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 역시 여기저기에 명령하고 호통하느라 여념 없었다. 하기야 모두가 보기에도 급박한 상황이다. 서로 비난할 여력조차 없을 만큼.

롤랑은 문득 보어조아의 포를 보았다.

야포? 공성포?

구분할 수 없어도 크기는 엄청나게 컸다. 적어도 포격이 저 괴물에게 먹히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연사력은 어느 정도인가? 오 분에 한 발은 발사할 수 있나?

설령 꽤 빠르게 쏠 수 있더라도 안심할 수가 없다. 달랑 포 세 문만으로 저 백 마리 가까운 괴물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군사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포병은 위협적이기에 맨 먼저 사냥당할 것이다. 그리고 저 괴물 코끼리들이 노리고 돌격해온다면 결코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전차의 돌파를 일개 땅개들이 어찌 막나?’

롤랑은 한참을 망설였다.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닫고, 입속에서 혀를 굴리다가 말았다.

거의 눈앞에 괴물 무더기가 있는 수준의 공포. 그 짧은 시간, 인생의 수많은 고뇌를 느낀 끝에 롤랑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에다 포를 둔들 도움 되겠소?”

지휘관들이 모두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롤랑은 소스라치게 위축되었다. 롤랑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모든 힘을 기울여야 했다.

사령관이 말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뭐?”

“포 세 문이니 괴물 셋 잡을 수 있다 쳐도, 그게 끝 아닌가?”

사령관은 입가를 삐죽였다.

“사실 셋이나 잡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 댁이 롤랑이라는 주장에 맞추어 말씀드리자면, 고대 기사니까 포가 뭔 물건인지도 모르시겠지? 포라는 물건은 명중률부터가 형편없다오. 저놈들 저기 저렇게 멍하니 서있어도 빗나갈 수 있는 거야. 아주 코앞에서 쏘면 모를까.”

롤랑이 물었다.

“그런데 왜?”

“왜냐니?”

“당신 말대로면 저기까지 저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수고를 들이고서도 두 마리 겨우 잡을까 말까 한 셈 아닌가. 그렇게 이해했는데, 맞나?”

“맞아. 고대에서 오셨는데 잘도 현대 병기를 이해한다고 칭찬해드릴까? 아니면 급박한 와중에 토론 못 하게 방해한다고 핀잔해드릴까?”

또 다시 빈정거린다. 주변의 지휘관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또 실랑이가 벌어지기 전에 롤랑이 얼른 말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아무튼 간에 당장 포를 저기 세울 경우, 그에 따른 이득은 괴물 두세 마리 잡는 정도가 다일 거라 이거요?”

“그렇대도. 그래서 자꾸 같은 말 반복하여 작전지시 못 하게 방해하시는 이유가 뭔가?”

급박한 와중에도 과연 롤랑을 위해 화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에 있던 롤랑 추종자들의 분노가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와중 롤랑이 말했다.

“그보다 낫게 쓸 방도가 있을 것 같소.”

*******

모지와 제이슨은 불탄 세계수의 입구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온통 그을리고 무너져 있었다.

물론 계단까지 폭삭 무너졌다. 계단이라 해봤자 사다리를 걸쳐놓고 그 아래에 좀 보강한 형태였던 것이 문제였다.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이제 우린 뭐하면 되지? 팝콘이나 먹으면 되나?”

다른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단어가 섞였다.

당연히도 그 말을 받은 것은 모지였다.

“파병은 늦더라도, 우리라도 가야지.”

“어떻게?”

“승강기.”

그 단어 한 마디에 제이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씹할, 야 이 병신 새끼야. 그 도마뱀 새끼가 계단은 태워먹고 승강기는 내버려두겠냐?”

모지는 그저 중얼거렸다.

“그랬을 수도 있지.”

그래서 일단 모두 가보았다. 거리가 꽤 있었으므로 헛걸음할 경우 그 자체로 엄청난 시간손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승강기는 건재했다.

하나도 불타지 않았다. 심지어 용의 출현이 여기까지 전해지지 않은 듯 조합원들은 멀쩡히 영업하고 있었다.

모지가 말했다.

“이제 타야지?”

아말릭은 그 말에 뭔가 반박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제이슨은 아말릭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지 예상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그래서 그것을 제 입으로 말했다.

“올라가는 도중에, 승강기를 용이 불태워먹으면?”

“공중부양 주문.”

모지는 쉽게도 말했다. 제이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방도가 있기는 있군.’

그러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제이슨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모지에게 속삭였다.

“그걸로 모두는 못 챙기지?”

모지 역시 작게 속삭였다.

“어.”

사실 걱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이 또 다시 나타날 경우, 놈은 승강기만 끊어먹고 만족할 것인가?

설령 주문의 힘으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 한들, 낙하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 아닌가?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용이 그것을 잠자코 내버려둘까?

용이 왜 승강기를 내버려뒀는지는 모른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용으로서는 승강기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 평생 나무 안에서 살았을 괴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함정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끝장이다. 틀림없이.

모두가 망설이는 가운데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알론소였다.

“자, 갑시다! 성전을 위하여!”

알론소는 성큼성큼 걸어가 조합원에게 주화를 건넸다. 그 모습을 두 영웅과 아말릭은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하여간 생각 없는 노인네. 어째야 하나? 막아야 하나?

결국 승강기가 내려왔다. 탑승객들이 내린 가운데 알론소가 먼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제이슨이 뛰듯이 걸어 승강기에 발을 디뎠다.

“뭐 그래, 씹할! 가자, 가자!”

그 뒤를 나머지 사람들도 불안하게 따랐다. 나병환자 한 명은 불탄 시체를 운구하도록 남겨두었다. 나머지 나병환자 둘은 제외된 그를 매우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조합원이 승강기를 닫고 빗장을 걸었다.

이내 도르래에 연결된 황소들이 힘쓰는 가운데 승강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

롤랑은 선두를 자처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겠노라 외치는 기사들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심지어 지휘관인 주제에 롤랑을 따라 돌진하겠노라 우기는 기사들마저 있었다. 사령관 휘하의 기사들마저 그랬다.

이곳 비프로스트에 온 자들다웠다. 군인이라기보다는 모험가에 가까운 자들. 지휘체계에 상관없이 일천에 달하는 기사들이 영웅의 뒤를 따랐다.

롤랑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장관이었다.

군마에 탑승한 기사만 오백. 나머지 절반은 여기까지 말을 운반해 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절반은 기사이면서도 도보였다.

그래도 어쨌건 중무장한 기사들이 보무당당히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든지 해치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그들의 얼굴에서 엿볼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들이 상대해야 할 적들은 바로 전차들이었으니까.

기사들은 코끼리 괴물들을 상대하기로 했다.

*******

< 오십이 층 - [4]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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