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원 - [4] >
그 거대한 괴물에게 돌격하며 느꼈다. 이미 몇 마리 성공적으로 잡았지만 역시 저 거대한 괴물에게 달려드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고.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다.
‘싫을수록 더 적극적으로 해야······.’
그리 생각한 순간 달리는 와중에도 롤랑은 흠칫했다. 순 제이슨 같은 생각을 하다니.
‘어쩌면 제이슨도 이런 심리일지도 모르지.’
어쨌건 계속 달렸다. 발자국 소리가 울리자 그 거대한 코끼리는 움찔하여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즉시 대응에 나설 만치 기민하지는 못했다. 롤랑은 염동검에 힘을 실어······.
롤랑은 눈을 크게 떴다. 염동검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어째서?
당황하여 염동검을 집어넣고 다른 장검을 뽑았다. 그 동작과 동시에 괴물의 배에 파고들어 양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그었다.
괴물의 뱃가죽을 베자 거센 마찰이 느껴졌다.
일단 베긴 베었다. 괴물의 배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이내 격분한 코끼리 괴물이 날뛰었다. 괴물이 다리를 마구 움직였다. 사방에 돌이 튀었다. 그 다리에 부딪치기라도 했다가는 끝장이다.
롤랑은 급히 뒤로 빠졌다.
뒤늦게 모지가 다가와 입술을 달싹였다. 사안이었다.
그 눈에서 요사한 빛이 난 순간, 눈이 마주친 코끼리 괴물은 움츠러들었다. 롤랑은 칼을 더욱 세게 쥐며 달려들 준비를 했다.
‘좋아, 이제······’
그러나 롤랑이 뭘 할 시간은 나지 않았다. 괴물이 이내 다시 활발하게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롤랑은 물론 모지 또한 당황했다. 주문이 왜 안 걸리나? 다른 동족보다 마법 저항력이 높나? 어째서?
의문은 전혀 바라지 않은 방향으로 풀렸다. 롤랑이 그 코를 주의하며 그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차,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몰라도 롤랑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방금까지 롤랑이 있던 자리의 풀들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이윽고 코끼리 괴물의 코가 위를 향했다. 다음 순간 벌어진 현상에 롤랑은 기겁했다.
처음에는 울려나 싶었다. 그러나 보니 웬걸, 주변의 돌이며 나뭇가지 등이 허공에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 기괴한 현상에 롤랑이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감 덕분이었다.
떠오른 사물들이 롤랑을 노리고 사방에서 사출되었다.
기괴한 선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롤랑은 몸을 던져 내빼는 동시에 칼을 휘둘러 몇 개의 돌을 튕겨냈다.
롤랑은 괴물이 다시금 사물들을 띄우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 중 하나라도 모지가 맞았다가는 끝장일 것이다. 투명화?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저토록 강력한 염동력이 있다면 허공을 더듬는 것쯤 간단하지 않을까?
이내 롤랑이 고함질렀다.
“모지, 이제 빠져!”
그러나 모지는 끝내 입술을 달싹여 주문 하나를 완성했다.
롤랑의 몸이 실바람에 휘감기더니 그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가속 주문에 힘입어 롤랑은 더욱 세차게 달려나갔다. 그제야 모지는 허둥지둥 뒤로 빠졌다.
롤랑을 노리고 돌 하나가 탄궁(彈弓)에서 발사된 듯 세차게 지면을 때렸다.
불꽃이 튀었다. 롤랑은 계속 코끼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빈틈을 노렸다. 그러나 허공에 떠오른 돌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그 수많은 돌들이 또 다시 쏘아졌다. 롤랑은 피하거나 쳐내는 데만 급급할 뿐이었다.
파고들어 다시 배를 베면? 위험하다. 아까 지면의 풀들이 납작하게 눌렸다. 그것을 보아 저 염동력은 신체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대응법도 모르는 이상 아무 대책없이 다가가서는 안 된다.
‘젠장.’
롤랑이 이를 악무는 차, 뒤에서 야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새된 목소리가 그리도 반가울 줄이야.
달려온 푸른 야수가 코끼리 괴물을 덮쳤다.
푸른 야수가 코끼리 괴물을 들이받았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코끼리 괴물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되는 것을 롤랑은 보았다. 충돌의 충격 때문에? 아닌 것 같았다.
‘푸른 야수는 별로 무겁지 않은데, 어째서? 불 때문에? 아니면······’
우선은 관찰. 롤랑은 지켜보았다.
푸른 야수는 계속 미친 듯이 날뛰며 코끼리 괴물을 물어뜯었다. 이내 푸른 야수가 펄쩍 뛰어올라 코끼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사실 성과는 없었다. 그 이가 박히기에 코끼리의 목가죽은 너무나도 두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끼리 괴물은 마구 몸을 비틀며 제 목에서 놈을 떼어내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코끼리의 위에 달라붙어 있던 푸른 야수의 허리가 접혔다. 위에서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 듯 뚝 하고.
염동력을 통한 공격이었으리라. 이내 푸른 야수는 소멸했다.
그러나 다음 소환물이 나타나 있었다. 서리거인이 쿵, 쿵 달려오며 고함질렀다.
“죽—인—다—!”
또 다시 코끼리 괴물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롤랑은 판단했다.
‘큰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이 굳는군. 귀가 커서인가.’
그러나 그 사실은 생각보다 별 도움은 못 될 것 같다. 큰 소리를 내봤자 놈은 잠시 몸이 굳을 뿐인데 그 정도는 워낙 놈의 가죽이 두꺼워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어쨌건 롤랑도 전투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오딘이여—!”
과연 코끼리 괴물은 몸을 떨었지만 이내 다시금 허공에 돌을 띄웠다.
뒤이어 흑기사, 그리고 다시 소환된 푸른 야수도 전투에 가세했다. 다시 끼야아아아아악.
아군이 늘었다. 그 사실이 롤랑에게 적잖이 안심을 주었다.
그러나 당장 큰 진보는 없었다.
그나마 육중한, 그러나 저 코끼리 괴물에 비하면 가벼운 서리거인이 코끼리의 정면에서 그 코를 베고자 도끼를 휘둘러댔다.
코끼리 괴물은 그 도끼에 맞서 코를 휘둘러댔다. 그 꼴이 무슨 전사 간의 대결을 방불케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도끼날과 닿으면서도 코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도 염동력으로 강화했으리라 롤랑은 추측했다.
그리고 푸른 야수는 또 다시 그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역시 별 도움은 안 되었다.
다만 흑기사는 그보다 나았다.
흡, 흡.
흑기사 특유의 기묘한 호흡에 따라 롤랑도 합을 맞추었다. 흑기사가 먼저 달려들어 그 배를 찔렀다. 피조차 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배가 그나마 가장 연한 부위였다. 그 부위를 롤랑과 흑기사는 집요할 정도로 공격했다.
둘의 공격은 번번이 튕겨나갔는데 이 또한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롤랑의 칼은 어쨌건 금속도 구부러뜨리거나 뚫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단순 가죽이 두꺼워서라기보다는 역시 염동력이 적용된 듯했다.
그렇다면 더 강하게.
다시 한 번 덮쳐온 염동력 세례를 롤랑은 어찌어찌 피해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롤랑이 괴물의 배 아래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시 무릎을 굽힌 다음, 다시 일어서서 그 반동력으로 괴물의 배에다 칼날을 찔러 넣었다.
코끼리가 꿰엑, 하고 울었다.
‘그러나 역시 만족스러울 만큼 박히지는 않았어.’
롤랑이 조금 박힌 칼이나마 비틀려던 순간, 또 다시 강력한 중력을 느꼈다.
얼른 피하자 예상했듯 그 자리가 움푹 파였다. 이어서 돌들이 쏘아졌고 롤랑은 다시금 회피했다.
이후로도 같은 식이었다. 이쪽의 공격이 거의 먹히지 않는 가운데 코끼리 괴물은 계속해서 염동력을 내리꽂고 사물을 쏘아댔다.
짧은 격전 동안 롤랑은 광폭화의 사용을 고려했다. 이후 감당할 수 없게 되겠지만 지금 이 난국을 타파하려면······.
그때 불덩이가 날아왔다. 그것은 코끼리의 귀에 정확히 충돌하여 펑 하고 터졌다. 모지가 발사한 화염구.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코끼리는 비명 질렀다.
‘직접 에너지를 때려 박는 주문은 효과가 있군. 그럼 발키리가 번개를 쏘아주면?’
그러나 제이슨은 어느새 또 다시 죽어버린 푸른 야수를 불러낼 뿐이었다. 롤랑은 더욱 거세진 돌 세례를 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속이 타들었다.
‘저놈 눈에는 이 상황이 얼마나 난처한지 파악이 되지 않나? 거기에 발키리에게 경험치를 나눠주는 것이 그리도 싫은가?’
이어서 화염구 하나가 더 날아왔다. 그리고 명중.
노린내가 진동했다. 코끼리는 마구 비명 지르다 이내 코를 휘둘러 서리거인의 목을 쳤다. 목을 친 코가 채찍처럼 거기 휘감겼다.
서리거인이 기우뚱했다. 이내 코끼리는 휘감은 코로 그 목을 졸랐다.
거인이 쓰러지자 코끼리는 그 위에 올라타 마구 짓밟았다. 서리거인은 소멸했다.
이내 코끼리는 부릅뜬 눈으로 코를 높이 들어올렸다.
분명 서리거인이 사라진 틈을 타 동료들에게 구조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금이 바로 기회임을 롤랑은 눈치 챘다.
그러나 역시 정체불명의 염동력은 두렵다. 어떻게 해야?
그때 그 어깨를 뭔가가 툭툭 쳤다. 흠칫 돌아보니 흑기사가 보였다.
흑기사가 자신의 방패를 내밀었다. 그리고 손가락질했다.
흡, 흡.
무슨 뜻인지 롤랑은 알아챘다. 그리고 그 뜻대로 했다.
롤랑은 허리를 깊이 숙여 피탄 면적을 줄이고, 건네받은 방패를 앞세운 채 냅다 달렸다.
돌들이 날아왔지만 대부분은 피해내고 몇 개는 쳐내며 계속 달렸다. 그리하여 공기가 들어와 부풀어 오른 놈의 코를 베었다.
그와 동시에 화염구도 작렬했다.
끔찍한 고통, 나무코끼리는 눈에서 피를 흘려대며 부들거렸다. 이내 그 코에 공기가 빠져나가려다 말고 다시 주입되었다. 끝내 신호보내기를 포기하지는 않는 것일까.
이내 그 코가 다시금 부푼 순간 롤랑이 고함질렀다.
“그—만—!”
과연 소리에 민감한지 코끼리가 움찔했다. 그리고 롤랑은 다시 방패를 흑기사에게 던져주고 양손으로 장검을 붙잡았다.
바로 달려들어 그 칼날을 그 목에 찔러 넣었다. 날이 살에 파고든 감촉이 느껴지자 바로 세게 비틀었다.
코끼리가 무릎 꿇었다.
잠시 후, 싸움이 끝난 것 같자 알론소와 나병환자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염동력이 남아있으니.
롤랑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
코끼리가 다시금 코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신호를 보내려는 것일까?
제지하고자 롤랑은 그 코를 칼로 후려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꽤나 베였다. 코를 감싸던 염동력이 줄어든 영향일까.
코끼리가 신음하는 가운데 제이슨도 다가왔다. 롤랑은 놈을 노려보며 점잖게, 그러나 분노를 담아 물었다.
“발키리, 왜?”
제이슨도 짧게 대답했다.
“경험.”
무슨 소리인지 롤랑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역시 경험치 때문이었군. 미친놈.’
그 때문에 더 쉽게 끝낼 것을 더 고생스럽게 되었다. 만약 울어서 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가는 모두가 위험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순간에도 코끼리가 비틀거리며 다시 코에 공기를 넣었다. 원래 코끼리라면 그저 폐에 든 공기로 울 수 있을 텐데, 이놈은 그러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롤랑은 그 코를 또 다시 세게 쳤다. 고통에 겨워 코끼리는 움찔하다가 이내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 죽지는 않았다.
롤랑은 머뭇거리고 있는 알론소와 나병환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놈의 경험치.
그래, 경험치는 대체 어찌 받는 것인가?
전투에 동참? 모지의 경우 신전에서 그저 조명만 제공하고 죽었는데 레벨 업 한 바였다. 그렇다면 전투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면 경험치를 받는 것인가? 하지만 그 도움이란 것이 실로 애매한 것인데 기여도는 어찌 판단되나?
어쨌건 가장 단순한 방법은 하나였다. 롤랑은 이내 말했다.
“창을 드시오.”
알론소와 나병환자들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롤랑은 이어서 지시했다.
“이제 사방으로 퍼지고, 자. 다 같이 붙잡아서. 이제 찌르시오.”
나병환자들은 안면가리개 때문에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알론소의 경우에는 가능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롤랑은 다그쳤다.
“어서!”
그리고 이내 그들은 지시를 따랐다.
우선 알론소가 창을 찔렀다. 그리하여 롤랑이 만들어낸 목 부분 상처에 창날을 꽂아 넣었다.
그 다음 나병환자들이 알론소가 쥔 창에 달라붙어 다 같이 힘을 주었다. 창은 이내 그 안에 깊이 파고들었다.
코끼리가 부들거렸다. 롤랑은 미지의 발악을 주시했다.
끝내 코끼리는 죽었다. 그와 동시에 그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주변 모두의 머릿속에 한 마디가 전해졌다.
‘추, 워.’
사념파였다. 영매다운.
그 사념파는 이후로도 머리에 파고들었다. 알론소와 나병환자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롤랑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역시 준비가 미흡했다. 최소한 칼이라도 좋은 것을 썼어야 하는데. 게다가 일행끼리 맞춘 행동방침도 미흡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결과 이런 상황에 제이슨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사냥은 개뿔, 하마터면 사투가 될 뻔했어. 어제 코끼리 몇 마리 해치워놓고는 너무 자만했던 거다. ’
나무코끼리 영매라니. 예상 못한 적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한 적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리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세계수씩이나 되어 경험치를 제공하기 위한 적들만 깔려있을 리 없으니.
숨을 가다듬으려던 순간이었다. 저 먼치에서 웬 소리가 길게 울렸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코끼리 우는 소리였다. 그것도 일종의 사념파가 섞였는지 머리까지 파고들었다.
다시 머리를 부여잡으며 롤랑은 당황했다. 저것은 또 뭔?
이해 못할 상황은 연속되었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깔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롤랑은 기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불을 뿜는 용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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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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